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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29화 (29/190)
  • 29화

    라테 먹고 갈래?

    “시X!”

    암호를 외치자 순식간에 그리운 온천의 풍경이 나타났다.

    “어르신!”

    약 항아리 어르신의 안경을 돌려주려고 곧장 약방으로 올라가려는데 누군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베카?”

    고개를 숙이니 베카가 식빵 같은 희고 보드라운 손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이제 온 거야? 한참을 기다렸는데.”

    날 기다렸다고?

    금방이라도 별을 쏟아낼 듯 맑게 빛나는 베카의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몸을 낮춰 눈높이를 맞추게 되었다.

    “베카,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날 기다리고 있었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베카가 입술을 오리 주둥이처럼 삐쭉 내밀었다.

    “약속했잖아.”

    약속? 베카랑 놀아주기로 약속을 했던가?

    베카와의 약속이라면 46층에서 나올 때 온천으로 초대하겠다는 것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렇지. 약속했지! 그런데 내가 우리 베카랑 무슨 약속을 했더라?”

    기억이 나는 척 맞장구를 치며 무슨 약속이었는지 은근슬쩍 되묻자 베카의 낯빛이 더욱 시무룩해졌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아니, 약속을 한 건 기억이 나는데…… 우리 베카가 누나랑 한 약속을 잘 기억하고 있나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정곡을 찔린 나는 당황한 것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변명을 줄줄이 늘어놨다.

    다행히 순진한 베카는 의심 않고 내 말을 믿어주는 것 같았다.

    “날 사랑해주기로 했다. 진하게.”

    ……내가 베카를 진하게 사랑해주기로 했었나?

    나는 찬찬히 그간의 기억을 되짚었다.

    맞아! 내가 베란다를 가루로 만들었을 때, 그걸 덮을 만한 구실을 만들어주면 찐하게 사랑해준다고 말했었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한 번에 휘몰아쳐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었는데, 베카는 그 말만 믿고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구나.

    이 깜찍한 생명체 같으니라고!

    “우리 베카, 내가 늦게 와서 섭섭했구나? 이리 와! 누나가 약속대로 찐하게 사랑해줄게!”

    나는 베카를 품에 안아 들고 그 탐스러운 볼에 연신 입을 맞췄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다시 봐도 속이 음흉한 꼬맹이”라고 말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하마터면 본인도 꼬맹이로 착각할 뻔했다”며 이마를 짚습니다.]

    ‘베카가 꼬맹이가 아니면 뭐라는 거야?

    음흉한 건 또 뭐고?’

    난 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베카와 눈을 맞췄다.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모양이 꼭 아기 토끼 같았다.

    ‘딱 보기에도 그냥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꼬맹이 같은데.’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 아이가 인간들에게 얼마나 두려움을 사는지 알고 말하는 거냐”고 묻습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탑을 오르는 모두가 그 아이를 사악한 존재로 여기며 세상에서 없어지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운수, 너 베카 만나본 적 있어?’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으면서 베카를 함부로 말하지 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아. 난 내가 눈으로 보고 겪은 베카만 믿어.’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이상한 녀석”이라며 투덜대면서도 계속해서 날 지켜봅니다.]

    기분이 상했다며 평소처럼 휑하고 가버릴 줄 알았는데 별일이었다.

    걱정해서 한 말인 것 같았는데 내가 너무 세게 말했나 싶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 말만 듣고 누군가를 판단하는 건 옳지 못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기에 사과는 하지 않기로 했다.

    S급 헌터만 배출하는 집안에서 나 홀로 각성하지 못했을 때의 내가 지금의 베카와 비슷한 처지였으니까.

    ‘저 집안에서 혼자만 각성 못 하는 거면 저주받은 거 아니야?’

    ‘어디가 부족한 걸지도 모르지. 불쌍해라.’

    ‘생긴 건 반반한데, 얼굴값을 못해서 어째?’

    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억측들과 가족들과 달리 평범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어린 날의 나는 불행한 아이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출신을 숨기고 생활하게 된 건 그 이유에서였다.

    “덕분에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어, 베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베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던전 브레이크가 SS급이나 되는 바람에 고생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베카는 날 도와주려고 한 걸 테니까.

    내 말에 베카는 조용히 내 입술이 닿았던 뺨을 만지작거렸다.

    뽀뽀를 당한 게 쑥스러운 것 같았다.

    귀여워! 수줍어하는 아기 토끼라니!

    이렇게 베카를 보고 있으니 오늘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어른들이 자식을 보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건가?

    나도 모르게 엄마 미소를 짓게 됐다.

    “아, 맞아. 누나가 지금 어르신한테 돌려드려야 할 게 있어서 가봐야겠다. 또 보자, 베카.”

    어르신에게 안경을 돌려줘야 한다는 걸 떠올리고는 내가 베카를 내려주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빌린 물건인데 닦아서 드리는 게 맞겠지?”

    난 급한 대로 웃옷으로 안경을 문질러 닦으며 약방으로 들어갔다.

    * * *

    수온이 약방으로 사라진 뒤, 계단 옆으로 드리워진 베카의 그림자가 점차 커지며 어느덧 성인의 형상이 되었다.

    베카의 모습은 방금 전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곱슬기가 있는 짧은 흑발에 넓어진 골격과 또렷해진 이목구비. 매력적인 장밋빛 적안과 선홍빛 입술은 만족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베카 님!”

    그때, 베카의 곁에서 검은 구름 같은 안개가 피어나더니 박쥐 날개를 단 검고 작은 용이 나타났다.

    “46층에 헌터 애송이들이 찾아왔습니다. 성가시게 느껴지시겠지만, 베카 님이 친히 행차하셔서 그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십시오!”

    탑의 상황을 전한 검은 용은 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사악하게 웃었다.

    그때 베카의 앞으로 검은 거울이 떠오르더니 탑 46층 입구에 있는 시우와 지호를 포함한 길드 ‘집필’의 모습을 비추었다.

    베카의 시선이 시우와 지호를 향했다.

    ‘저 얼굴들은 수온의 집에서 본 적이 있는데. 가족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요!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녀석들을 이번 참에 죽사발을 만들어놔야……!”

    베카의 말에 검은 용이 콧김을 뿜어내며 큰소리를 냈다.

    “조용.”

    베카의 서늘한 눈빛을 눈치챈 검은 용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꼬리를 내렸다.

    베카가 계단에서 돌아서자 그와 검은 용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 * *

    “어르신, 계세요? 빌린 물건을 돌려드리려고 왔는데.”

    내 부름에 약 항아리가 사람으로 변했다.

    “내게 빌려 간 물건이 있었더냐?”

    어르신이 연회색 옷자락을 흩날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직접 빌린 건 아니고요, 여기…….”

    난 주춤주춤 눈치를 보며 어르신에게 금테 안경을 건넸다.

    “내 안경이 거기에 있었나? 어쩐지 한참을 찾아도 없다 싶었지.”

    어르신이 금테 안경을 받아 들었다.

    “허락도 없이 사용해서 죄송해요.”

    “네게 도움이 되었다면 그걸로 됐다. 내 물건을 훔쳐 간 인간이 누군지는 대충 짐작이 가기도 하고.”

    이미 범인이 샤레니안이라는 걸 아는 건지, 약 항아리 어르신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분명 몰상식하고 앞뒤 생각 따위 없이 일을 벌이고 보는 ‘그 녀석’이겠지.”

    작게 혼잣말을 남긴 약 항아리 어르신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약방 입구로 돌아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양반은 못 되겠군.”

    어르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를 지나던 호랑이, 샤레니안이 안으로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 주인, 오늘은 출근했네?”

    어떻게 기다렸다는 듯이 딱 나타나는 거지?

    어르신의 촉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대단했고, 샤레니안은 생각했던 것처럼 눈치라고는 없어 보였다.

    “온 김에 마실 것 좀 만들어주지?”

    샤레니안은 약 항아리 어르신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겁도 없이 내 곁으로 다가와 살갑게 말을 붙여왔다.

    “날 보고도 할 말이 그것밖에 없는 거냐? 도대체 네놈에게는 윤리란 게 없단 말이야?”

    어쩐지 아슬아슬하다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어르신의 부채가 샤레니안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악! 왜 때려? 약 할아범, 진짜 노망났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샤레니안이 되려 고함을 내질렀다.

    “노망? 이놈이 내 물건을 훔쳐 가놓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막말까지 해대?”

    “아…….”

    뒤늦게 어르신의 안경을 발견한 샤레니안이 양심에 찔렸는지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건 미안하게 됐어, 약 할아범…….”

    웬일로 샤레니안이 순순히 꼬리를 내리고 어르신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러니까 이제 너그럽게 용서를…….”

    하지만 그 정중함은 단 몇 초도 넘기지 못했다.

    “뭐라고! 용서를 할지 말지는 내가 정한다! 네놈이 정하지 말란 말이다!”

    결국에 약 항아리 어르신의 화는 머리끝까지 솟구쳤고, 샤레니안은 마지막까지 매타작을 피하지 못했다.

    “한 번만 더 네 멋대로 내 물건에 손을 대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줄 알아라!”

    “알았다고요, 영감님…….”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어르신의 경고를 한 귀로 흘린 샤레니안이 다시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마실 것 좀 만들어줄 수 있어?”

    그새 어르신에게 맞은 건 잊어버린 건지 샤레니안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던전을 다녀와서 많이 피곤하거든?”

    그러니까 오늘은 휴업이라고 통보할 참이었다.

    [!!경고!! 근무 태만]

    [오랫동안 ‘온천표 쑥 라테 만들기’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고 방치했으므로 온천 사장의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위기에 놓입니다.]

    [퀘스트 ‘온천표 쑥 라테 만들기’에 조건이 추가됩니다.]

    [!!온천표 쑥 라테 만들기!!]

    [온천표 쑥 라테 만들어서 대접하기 (0/1)]

    [보상 : 100만 골드 / 추가 보상 : ???]

    [!!경고!! 근무 태만으로 실패 시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페널티 : 실패 시 온천 이용권 전액 환불]

    “하긴 피곤하겠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난 떠나려는 샤레니안의 팔을 박력 있게 붙잡아 돌려세우고는 달아날 수 없도록 벽으로 밀어붙였다.

    “라테 먹고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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