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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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심쿵했어?”
우나한테 잡혀서 한 방 맞고 나가떨어지더라도 이건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왜냐고? 경고등처럼 붉게 물든 해령의 얼굴을 보자 미친 듯이 놀리고 싶어졌으니까.
이럴 때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사실 하나.
나에게 박시우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
“심장이 뛰긴 했지.”
이렇게 쉽게 인정한다고?
원하던 반응이 아니라는 듯 내가 미간을 좁히자 해령이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곱상한 얼굴을 감싸며 날 번뜩이는 눈으로 바라봤다.
“열이 뻗쳐서.”
날 보는 해령의 표정이 살벌했다.
설레서 심장이 뛴 게 아니라 화가 나서였어?
어쩐지 내가 뭘 해도 반응이 없더라니.
친밀도를 올리는 데에는 역효과가 난 것 같지만, 어쨌든 ‘심쿵’시키는 데 성공했으니까 된 거지.
“자, 놨다. 이제 됐지?”
목적을 달성한 나는 해령을 놓아주고 손을 툭툭 털었다.
“뭐지? 이 볼일 다 봤으니 미련 없다는 태도는?”
역시 해령은 눈치가 빨랐다.
난 성좌의 부채를 펼쳐 든 채 입을 가리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제 다 클리어 했거든. 2단계 스킬 개방 퀘스트.”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자신이 퀘스트를 깨는 데에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허탈한 듯 실소를 터뜨립니다.]
나는 그대로 해령을 등지고 우나가 있는 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끼에에엑!”
우나는 여전히 눈이 뒤집힌 채 글러브를 휘두르고 있었다.
스킬도 얻었으니 이제는 우나를 되찾아볼까?
비장하게 부채를 집어 들고 휘두르려던 찰나, 나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해령을 돌아봤다.
“근데 태초의 바람은 어떻게 쓰는 건데?”
스킬은 얻었는데, 쓰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사용법도 모르면서 폼 잡은 거냐”며 내게 삿대질을 하며 웃습니다.]
‘그 손가락, 분질러지기 전에 내려놓는 게 좋을 텐데.’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조용히 손가락을 내립니다.]
내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샤레니안이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끼에에엑!”
망설이는 사이, 우나가 내게 돌진해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뒷걸음쳤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내 뒤로 성큼 다가온 해령이 부채를 쥔 내 손을 포개어 잡았다.
“부채에 깃든 건 ‘용의 힘’이다. 그 힘을 느끼면서 네가 원하는 것을 떠올려.”
용을 떠올리라고?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될 리가.
[용의 기운이 성좌의 부채에 감돕니다.]
되네?
“다, 다음은?!”
우나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탓에 나는 다급하게 해령을 향해 물었다.
해령이 내 손을 잡은 채로 부드럽게 부채에 힘을 실은 뒤 곧이어 힘껏 휘둘렀다.
“그대로, 내리꽂는 거다.”
귓가에 울리는 해령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 함께 거센 돌풍이 일더니 우나의 몸체를 정통으로 때렸다.
[성좌의 부채가 ‘태초의 바람’을 일으킵니다.]
[스킬 ‘태초의 바람’ 효과로 ‘흑화한 사우나 통, 우나(SS)’가 추억에 잠깁니다.]
순간 우나에게서 카메라 필름 같은 것이 주르륵 쏟아져 나와 허공에 길게 펼쳐졌다.
그곳에는 박시우와 우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게 다 뭐야?”
“그 사우나 통이 가진 기억의 부분이다.”
사우나 통도 기억 회로가 있어?
최종 보스가 우나라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럼 이것들은 우나의 추억 같은 건가?
호기심이 든 난 손이 닿는 위치에 펼쳐진 필름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그러자 필름 속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영상이 흘러나왔다.
그곳에는 수건을 두르고 거실로 나오는 박시우와 베란다에서 건조 중인 우나가 보였다.
“상품 리뷰가 좋더니 튼튼하고 좋네. 몸도 풀리고 사우나 하기에 딱이야.”
몸을 낮춰 앉은 박시우가 건조 중인 우나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 오늘부터 너 내 동료가 돼라!”
“…….”
말도 못하는 물건을 잡고 박시우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 동료가 되었으니까 이름을 지어줘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박시우가 곧 뭔가 떠올린 듯 표정이 밝아졌다.
“우나! 그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사우나니까 오늘부터 널 우나라고 부르도록 하지! 준비됐냐? 동료!”
뭐지? 이 손발 오그라드는 1인극은?
그러게 내가 『원X스』 작작 보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호적 메이트의 알고 싶지 않은 사생활을 기어이 알아버렸다.
더 볼 생각은 없었지만 필름이 멋대로 넘어가며 다음 장면을 고르는 듯했다.
“이거 어떻게 멈춰?”
“때가 되면 알아서 사라진다. 지나간 기억을 되돌아보는 건 처음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니까.”
계속 보고 있다가는 영상이 꺼지기 전에 내가 먼저 오징어가 돼버릴 것 같은데.
“우나야! 비 온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 와중에도 내가 원하지 않는 영상은 눈앞에서 제멋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영상 속에 박시우는 온몸으로 우나를 감싼 채 비를 맞으며 거실로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주 로맨틱 가이가 따로 없어.
청춘물 장인이야, 장인.
헌터를 할 게 아니라 영화감독을 시켰어야 하는 건데.
[기억을 되찾은 ‘흑화한 사우나 통, 우나(SS)’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허공을 수놓았던 필름은 끝내 모두 사라지고, 우나가 가진 기억의 재생도 멈췄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간 곳에는 박시우의 영혼의 단짝, 우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역시 성물은 위력은 차원이 달랐다.
SS급 보스를 단번에 날려버리다니.
추억팔이도 SS급인 게 문제인 것 같지만.
[던전 브레이크 <등급 : SS>를 클리어 합니다. 던전 밖으로 나가는 포털이 개방됩니다.]
[던전 브레이크 <등급 : SS> 클리어 보상으로 ‘사우나 가운’을 획득합니다.]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 보상이 겨우 사우나 가운이라고?’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립니다.]
“왜 웃어?”
해령을 향해 따지듯 묻자, 그는 짐짓 웃음기를 감추려 했지만 참을 수 없는지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축하의 미소랄까. 온천 사장한테 사우나 가운만큼 좋은 복장이 또 어디 있다고?”
저건 놀리는 게 분명했다.
“그런 말은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나 감추고 하든가.”
타박에 해령이 못 이긴 척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나는 별다른 기대 없이 사우나 가운을 들여다보았다. 가운은 획득과 동시에 내게 걸쳐져 있었다.
[사우나 가운(SS)]
[SS급 던전 목욕탕의 기운이 깃든 가운. 착용 시 일정 시간마다 체력이 회복된다.]
[착용 시 10초마다 체력이 100씩 회복된다.]
입기만 해도 체력이 회복된다고?
이거 완전 입고 다니는 HP 포션이네.
처음에는 사우나 가운이라고 해서 실망했는데, 가만 살펴보니 꽤 쓸 만한 물건인 것 같았다.
적어도 이걸 입으면 체력이 달아서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걸?
물론 애초에 내 체력이 100도 안 되는 건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해령, 이제 돌아가. 다 끝났으니까 자는 사람들을 깨울 생각이거…….”
말 끝나기가 무섭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해령은 사라진 뒤였다.
‘퇴근은 칼같이 하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원래 퇴근은 칼퇴근이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하여간 뭘 좀 아는 성좌야. 말하는 것만 보면 성좌가 아니라 사회생활에 찌든 직장인 같다니까?
난 모두를 깨우기 위해 보호 결계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우나에게 얻어맞아서 피떡이 된 박시우의 얼굴이었다.
‘살아 있는 건 맞겠지?’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좋은 물건이 있다며 ‘약 항아리의 안경’을 던져줍니다.]
어느새 내 손에는 어르신의 금줄로 장식된 동그란 금테 안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르신 물건이 왜 너한테서 나와?’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많이 알면 다친다”고 말합니다.]
내가 아니라 네가 다칠 것 같은데?
난 부채로 샤레니안의 머리를 내리치던 어르신을 떠올렸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어쨌든 그 안경을 쓰면 상대의 체력 상태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진짜 이걸 쓰는 것만으로도 몸 상태를 알 수 있다고? 세상에 그렇게 쉬운 게 어디 있어?
난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어르신의 안경을 쓰고 박시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체력 : 999/201301 , 마나 : 9999/940730 <상태 : 위태로움>]
우나한테 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맞았네.
한 대라도 더 맞았으면 어쩌려고, 진짜 무모하다니까.
하필 꺼림칙하게 숫자도 999에 9999고. 오싹하게끔.
불길함을 떨치려 몸을 파르르 떨던 나는 가방에서 미리 만들어둔 약을 꺼내 들었다.
이 정도면 나 운수 말대로 자리 깔아야 할지도?
내가 꺼낸 약은 미리 만들어둔 명약 ‘새살이 솔솔’이었다.
나는 박시우의 머리를 무릎 위에 받치고 입안으로 약을 흘려보냈다.
약을 먹이자 박시우의 체력이 빠르게 차오르는 것이 안경을 통해 보였다.
마나는 알아서 회복하겠지?
일단 목숨 줄이라도 붙여놓은 걸로 만족하자.
한숨 돌리고 나자 다른 사람들이 생각나 재빨리 주변을 돌아봤다.
저 멀리 쓰러져 있는 지호와 현정우가 보였다.
지호는 공격당한 게 없으니까 괜찮을 테지만, 현정우는 오리한테 공격을 당했었지?
약을 먹이기 위해 무심결에 현정우에게 고개를 돌린 나는 눈을 의심했다. 안경에 떠오른 현정우의 정보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체력: ?????? 마나: ??????? <상태: ????>]
현정우의 상태창은 박시우와 달리 전부 물음표로 표시됐다.
안경이 그새 고장 났나?
오류가 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안경을 벗어드는 순간, 이마에 부적을 붙인 현정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온순해 보이기만 하던 그의 연한 갈색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꿰뚫었다.
“찾았다, 온천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