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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24화 (24/190)
  • 24화

    왜 너는 나를 버려서

    “꽤애애액!”

    저게 다 오리 인형이라고?

    마빡이 시뻘개져서 화내는 게 너무 귀여워!

    죽을까 봐 무섭기도 한데, 귀여운 게 떼로 몰려오니까 오히려 더 귀여워!

    하지만 이렇게 넋 놓고 보고만 있다가는 오리들한테 깔려 죽거나 고막이 찢어져 죽거나 엔딩은 둘 중 하나였다.

    “젠장!”

    박시우가 밀려오는 오리 인형 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낮게 욕을 읊조렸다.

    “박지호, 가드 쳐! 내가 최대한 넓은 범위로 얼려볼 테니까.”

    “맡겨둬!”

    지호가 나를 가릴 수 있는 크기의 가드를 넓게 펼치자 박시우가 얼음으로 된 총을 꺼내 난사하기 시작했다.

    총알이 닿는 족족 오리 인형들이 얼어붙으며 산산조각 났다.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박시우도 지호도 버거운 상태.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내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서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이 없을까?

    순간 눈앞을 번뜩이며 떠오른 게 있었다.

    내가 위기에 닥칠 때면 장난스럽게 나타나서 단서를 던져주던 존재.

    ‘운수야!’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웬일로 먼저 찾냐”며 얼떨떨해합니다.]

    ‘네가 필요해!’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런 식으로 갑자기 훅 들어오면 곤란하다”며 부끄러워합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한결같이 개소리를 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것도 재주라 해야 하나?

    ‘헛소리 말고 운수나 좀 봐줘.’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뭐가 궁금하냐”며 의미심장하게 웃습니다.]

    역시 이해 빠른 거 하난 마음에 든다니까.

    ‘어떻게 하면 이 오리들한테 밟혀 죽지 않고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을까?’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힘으로 상대를 이길 수 없을 때는 그들이 바라는 걸 들어주고 회유하는 것도 좋은 공략법”이라고 말합니다.]

    ‘오리 인형들이 바라는 게 뭔데?’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운수를 봐주고 나니 몸이 뻐근하다”며 장난감 오리 인형을 챙겨 온천으로 들어갑니다.]

    ‘야! 갈 땐 가더라도 답은 알려주고 가라고!’

    다급하게 불러봤지만, 이미 온천으로 떠난 건지 운수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 자식은 꼭 내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만 온천 하러 가더라? 약 올리는 거야, 뭐야?’

    “형! 가드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느끼며 씩씩거리고 있는데 박시우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오리 인형들의 공격으로 지호의 가드에 금이 가고 있는 게 보였다.

    아까 운수가 회유책도 좋은 공략법이라고 했지?

    그래, 생각해보자. 오리 인형들이 바라는 게 뭘까?

    우선 우리가 이 필드에 들어올 때부터 오리 인형들은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전부터 오리 인형들이 불쾌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건데…….

    찬찬히 주변을 살피던 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이곳의 탕들, 전부 비어 있잖아.

    기억을 되짚어보니 필드 이름도 ‘메마른 목욕탕’이었다.

    오리 인형들이 화가 나 있던 이유는 어쩌면……!

    난 곧장 지호의 가드에서 벗어나 탕으로 달려갔다.

    “누나, 벗어나면 위험해!”

    등 뒤로 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만, 이를 무시한 채 나는 탕 안으로 냅다 뛰어들어가 벽면에 달린 커다란 수도꼭지를 힘껏 돌렸다.

    손이 빨개질 때까지 안간힘을 썼지만, 수도꼭지에서는 물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목욕탕 안으로 들어오는 물이 모두 말라버린 것 같아.

    내 직감이 ‘이것이 오리 인형들을 불쾌하게 만든 이유’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도 방법이 있지.

    ‘해령, 지금 당장 비어 있는 탕들에 온천수를 채워줘!’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벌써 갑질을 하는 거냐”고 궁시렁거리면서 온천수를 불러일으킵니다.]

    ‘한 가지만 더 부탁할게! 이왕이면 수도꼭지에서 온천수가 터져 나오듯 채워지면 좋겠어. 이유도 없이 온천수가 차오르면 괜한 의심을 살 수 있다는 말이야. 응?’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요구하는 것도 많다”며 툴툴댑니다.]

    해령의 말을 못 들은 척 넘긴 나는 수도꼭지에 손을 올렸다.

    ‘자, 레디, 액션! 지금이야!’

    나는 있는 힘껏 한 번 더 수도꼭지를 돌렸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수도꼭지에서 온천수가 콸콸 쏟아져 나와 순식간에 탕을 가득 채웠다.

    해령은 꼭 다 들어줄 거면서 투덜거린다는 말이야.

    “꽥?”

    “꽥꽥!”

    온천수가 탕 바깥으로 흘러넘치자 오리 인형들 사이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오빠, 공격을 멈춰!”

    오빠란 말에 놀란 박시우가 황급히 총을 거둬들였다.

    “꽥!”

    “꽥꽥꽥!”

    넘쳐흐른 온천수에 둥둥 떠오른 오리 인형들의 표정이 노곤하게 변했다.

    동시에 열이 올라 붉어져 있던 마빡도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오리 인형들아! 잠시 내 말 좀 들어줄래?”

    “꽥?”

    내 부름에 오리들이 하나둘 내 쪽을 돌아봤다.

    “저 바보가 또 뭘 하려고…….”

    박시우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나를 지켜봤다.

    “우리가 탕에 물을 채워줬으니까 이곳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게 해줄래? 그렇게만 해준다면 더는 너희들을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꽥꽥!”

    “꽤액꽥!”

    “뀨뀩!”

    내 제안에 오리 인형들은 마치 회의하듯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끌시끌한 회의가 끝나고 잠시 뒤, 결론이 난 건지 오리 인형 중 몇 마리가 내가 있는 탕 안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공격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만약을 대비해 박시우의 총을 든 손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뀩!”

    “꽥.”

    온천수에 몸을 담근 오리 인형들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얌전해졌다.

    “뀩뀩!”

    심지어 내게 볼을 비벼오는 오리 인형도 있었다.

    꼭 그게 탕에 물을 채워줘서 고맙다는 것처럼 들렸다.

    귀여워!

    역시 목욕탕 물이 다 말라버려서 오리 인형들의 심기가 불편했던 거였어.

    “간지러워!”

    나는 친근하게 오리 인형의 볼을 매만졌다.

    말랑말랑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이대로 한 마리만 집에 가져가고 싶다.

    평생 예뻐해줄 자신 있는데.

    [온천수에 몸을 담근 ‘심기가 뒤틀린 오리 인형(S)’이 ‘행복한 오리 인형(S)’ 모드로 전환되며 온순해집니다.]

    [마지막 필드로 가는 포털이 열립니다.]

    “진짜 이게 돼? 이걸로 해결된다고?”

    박시우가 탕에서 목욕을 즐기는 오리 인형들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난 이만 가볼게.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뀨욱! 뀩!”

    오리 인형이 헤어지기 아쉽다는 듯이 내 옷깃을 물며 울상을 지었다.

    “나도 더 같이 있고 싶지만, 여긴 던전이라 사람이 오래 살 수가 없어.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놀러 올게.”

    “뀨우욱…….”

    난 슬퍼하는 오리 인형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탕을 빠져나왔다.

    “탕이 비어 있길래 혹시나 해서 물을 채워봤을 뿐인데…… 어떻게 해결이 되어버렸네? 알고 보니까 순한 애들이었어.”

    혹시나 의심을 받을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연기하자 지호가 돌연 나를 덥석 품에 안았다.

    그 바람에 현정우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브러졌지만, 지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프겠다.

    “누나, 왜 이렇게 무모해? 혹시라도 오리 인형이 갑자기 덮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살아 있으면 됐지.”

    “진짜 누나는…….”

    꽤 걱정이 됐었는지 지호가 울먹거렸다.

    “아직 안심하긴 일러. 보스가 남았잖아.”

    나는 울먹이는 지호의 뒷머리를 쓸어 다독이며 마지막 필드로 가는 포털로 시선을 돌렸다.

    “아야……. 진짜 귀 나가는 줄 알았네.”

    때마침 현정우도 정신이 든 모양인지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귀가 멀쩡한지를 확인했다.

    “운이 좋네. 안 일어나면 버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시우 형, 진짜 그럴 거예요? 형이 하면 꼭 진담 같단 말이에요.”

    박시우의 타박에 현정우가 상상만으로 간담이 서늘해졌는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진담일걸요?”

    “진담인데?”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답하는 박시우와 내 모습에 현정우는 신기하단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 봤다.

    “두 분은 남매가 확실하네요. 이렇게 닮기도 힘들 텐데?”

    “농담이 심하시네요.”

    “개소리.”

    나와 박시우는 각자 진심으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포털로 다가갔다.

    “다 정신 차렸으면 출발하죠.”

    내 말에 박시우와 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요!”

    현정우도 종잇장 같은 몸을 다급히 움직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샌가 그들의 선두에 서서 포털을 타고 있었다.

    * * *

    [던전 속 최종 필드 ‘왜 너는 나를 버려서’에 진입합니다.]

    나를 시작으로 모두가 마지막 필드에 들어섰다.

    마지막 필드까지 목욕탕이라니.

    콘셉트 하난 확실한 던전이네.

    그런데 필드 이름이 왜 이래?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에 안내창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향한 버려진 자의 원망이 강하게 피어납니다. 필드에 음산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합니다.]

    그때, 필드 안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하나의 형체가 드러났다.

    “잠깐만, 저건…….”

    보스의 형체를 확인한, 박시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최종 보스 ‘버려져서 점 찍고 돌아온 사우나 통, 우나(SS)’가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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