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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19화 (19/190)
  • 19화

    도망쳐!

    “집에 있었네?”

    갑작스러운 지호와의 아이 콘택트에 잔뜩 당황했지만, 나는 태연함을 유지했다.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 거야?”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지호가 내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마스터키는 암호를 외치는 순간 집으로 이동한다는 것만 설정되어 있을 뿐, 어디에 떨어질지는 정해져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 지호 앞으로 떨어질 게 뭐야!

    어디서부터 본 거지?

    지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확실치 않아서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우기고 보는 거다!

    “어디서 나타나긴, 방에서 나왔지.”

    “문 열리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누나가 복도에 서 있었고.”

    다행히 지호도 내가 어떻게 복도에 있게 된 건지 확실하게 본 건 아닌 눈치였다.

    “그럼 내가 갑자기 허공에서 짠 하고 나타나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꼭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니까?”

    “너 잠 덜 깼냐?”

    이상하단 눈으로 몰아가자 지호가 혼란스러워했다.

    “방금 방에 들어갔을 때도 누나가 없었어! 그런데 어떻게 방에서 나와?”

    지호는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나를 찾았다.

    내내 혼자 있는 나를 신경 써주는 거라 여겨서 기특하게 생각했는데…….

    이 상황이 되고 보니 오늘만큼은 그 관심이 성가셨다.

    “난 계속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어. 그래서 네가 돌아온 것도 지금 알았고.”

    “내 생각에 박돈돈, 각성한 듯.”

    계속 발뺌을 하고 있는데 잠자코 소파에 앉아 있던 박시우가 입을 열었다.

    그걸…… 박시우가 어떻게 알았지?

    쑥 라테 빼고는 딱히 걸릴 만한 게 없었는데?

    박시우의 돌직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무신경해 보여도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박시우가 알아챌 만한 단서를 흘렸을지도 몰랐다.

    진짜 들킨 건가?

    “이불로.”

    숨죽인 채 가슴을 졸이고 있었는데, 괜한 짓이었다.

    “쟤 침대에 파묻히면 이불이랑 한 몸 되는 게 스킬인 듯. 진짜 있는 줄도 모른다니까?”

    자기가 말해놓고 박시우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저런 놈한테, 심장 떨릴 정도로 긴장하다니.

    박시우를 과대평가한 그 순간의 내 안목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런가? 하긴 나도 언뜻 본 거 같긴 한데. 아무튼 간 떨어질 뻔했네.”

    많이 놀란 듯 지호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생각하고 보니까 우리 누나 불쌍하네. 이제 바깥에 기자들도 없고 휴일인데 몇 주째 약속 하나 없이 이불 속에서만 지낸 거잖아.”

    이 자식이 갑자기 뼈를 때리네?

    예상하지도 못한 상대에게 얻어맞은 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거 보면 우리 누나는 만나는 남자 없겠다. 그렇지?”

    순간적으로 지호의 입가에 그려져 있던 장난스러운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늘 웃는 상인 그지만, 자신에게 있어서 진짜 중요한 문제를 물을 때면 웃음기가 사라지고는 했다.

    남의 연애사를 왜 이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어느새 소파에 앉아 있던 박시우도 반쯤 몸을 돌린 상태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보였다.

    “있겠냐?”

    고민도 없이 뱉은 한마디에 얼어붙어 있던 둘이 동시에 풀려났다.

    둘은 어딘지 모르게 안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야, 말 나온 김에 길드에 괜찮은 사람 없어?”

    난 완전히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길드원들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우리 길드 놈들은 안 돼!”

    한창희 때부터 느낀 거지만, 박시우는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날 단속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건 나도 동감!”

    지호가 손을 들어 올리며 박시우를 거들고 나섰다.

    이게 바로 남매간의 우애라는 건가?

    치고받고 싸워도 남한테는 아깝다는 거지.

    “길드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널 만나?”

    “내 말이. 지난번에 쑥 라테도 그렇고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절대 안 될 일이라며 고개를 젓는 박시우를 따라 지호가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뜻으로 말렸던 거냐?

    우애는 개뿔, 남도 이렇게까지 가차 없진 않을 거야!

    ……그래도 쑥 라테 사건은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됐다, 됐어. 그건 그렇고 둘 다 배 아픈 건 좀 괜찮아?”

    “빨리도 물어본다! 박지호랑 30분을 화장실만 들락거리다가 S급 힐러까지 출동해서 응급처치 받고 겨우 살아났다.”

    S급 힐러까지 출동해서 둘이 멀쩡할 수 있었던 거구나.

    해독제는 해령에게 준 게 전부였는데 듣던 중 다행이었다.

    “힐러 분이 고생이 많으셨네.”

    “진짜 그 정도면 똥손이 아니라 독약 수준이야. 경고문이라도 써 붙여야 하는 거 아니냐?”

    “아직 맛을 덜 본 것 같은데 한 잔 더 할래?”

    독설을 퍼붓던 박시우가 한 잔 더라는 말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거 효과가 좋은걸?

    앞으로도 종종 써먹어야겠어.

    박시우가 백기를 들 게 만든 것에 흡족해하고 있던 중,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다들 웬일로 이 시간에 집에 있어? 던전 돌거나 탑 뚫는다고 집에 없을 시간 아니야?”

    “던전이나 돌고 있을 정신이 아니었거든. 우리 길드가 누구한테 제대로 깨져서.”

    박시우가 길드 일정을 빼먹는다고?

    그건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박시우의 열정은 웬만큼 큰일이 아니고서야 그 무엇도 말리지 못했다.

    “집필이 누구한테 깨져? 설마 한창희네 길드가 개수작을 부린 거야?”

    집필에게 시비를 걸거나 루머를 퍼뜨려서 큰 문제를 만드는 건 언제나 열망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당연히 그런 줄로만 예상했다.

    하지만 박시우가 그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한창희가 우리 상대가 되냐?”

    “그럼 누군데?”

    “온천 사장.”

    나?

    전혀 상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내 이름이 나왔다.

    “그 괴물 같은 인간이 혼자 46층을 클리어 했어.”

    그걸 박시우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헌터들 시스템창에 대문짝만하게 띄운 걸 보면 관심을 받길 원하는 것 같은데 왜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거지?”

    그게 시스템창에 퍼졌어?

    당사자도 처음 안 사실이었다.

    아니, 시스템창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관심 받고 싶다니…… 절대. 난 오히려 그 반대라고!

    “그런 이유로 온천 사장 찾겠다는 사람은 더 늘어났고 심지어 오늘 팬 카페도 생겼어.”

    “팬 카페가 생겨?”

    “응. ‘온천 회원’이라고.”

    박시우와 지호가 동시에 자신들의 폰 화면을 보여줬다.

    ‘온천 회원 ― 온천 사장님의 회원이 되고 싶은 사람들’

    ‘방문 2,938,475 회원 수 5,002명’

    이게 운수가 말했던 황금빛 명예인가?

    그렇다면 다시 반납하고 싶다.

    근데 오늘 개설되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회원 수가 벌써 5,000명을 넘을 수가 있지?

    저 사람들이 다 나를 찾고 있다고 생각하면…….

    본능이 외쳤다.

    도망쳐!

    “그런데 말이야. 다른 사람은 그렇다 쳐도 두 사람은 왜 가입한 건데?”

    카페는 회원이 아니면 게시글 내용을 볼 수 없게 설정되어 있었는데, 두 사람의 화면에는 게시글이 전부 보였다.

    “그야 당연히 온천 사장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가입한 거지. 빨리 내 동료로 만들어야 하니까.”

    박시또 씨, 그럴 일은 없다니까요?

    “난 팬심으로 가입했어. ‘베카’를 혼자 클리어 하다니! 대단하잖아.”

    지호가 베카를 알고 있어?

    문득 46층에서 베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들 내 이름을 들으면 벌벌 떨기 바쁘던데.’

    “베카가 뭔데 그래?”

    나는 모르는 척 베카에 관해 물었다.

    “베카는 우리가 뚫는 마탑의 주인이자 최상층의 지배자야. 한마디로 최종 보스지.”

    베카가 탑의 주인으로 불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성좌들의 이름처럼 단순히 별명인 줄로만 알았다.

    게다가 46층에서 나왔으니까 최종 보스는 당연히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앙증맞은 꼬마가 탑의 괴수들을 움직이는 지배자라고?

    [‘탑의 주인’이 온천을 하고 나오니 개운하다며 짤막한 팔다리로 기지개를 켭니다.]

    의문을 가진 순간 베카의 창이 떠올랐다.

    지금도 저렇게 선량하고 귀여운데?

    말도 안 돼!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의 베카는 5000년의 기억을 잃은 베카라서 각성 전 상태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각성 후 화력엔 못 미치긴 할 거야. 그래도 SS급 보스였다고.”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지호가 설명을 덧붙였다.

    잠깐만, 5000년의 기억을 잃었다고?

    그 말은 베카가 5000년도 더 살았다는 거야?

    이제야 베카를 어린애 취급하던 내게 영계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게 됐다.

    겉모습은 누가 봐도 5000살이 아니라 다섯 살 같았는데.

    근데 46층에서 베카가 기억을 되찾고 각성한다는 문구를 본 것 같은데?

    잘못 읽었나?

    “그런데 그걸 온천 사장이 때려잡은 거야!”

    고민할 틈도 없이 지호는 제 일인 것처럼 온천 사장의 무용담을 풀어냈다.

    때려잡다니?

    꿀밤을 좀 때렸거니, 아직 잘살아 있다고.

    심지어 지금은 온천을 하며 힐링 중이다.

    잠시간 베카를 온천으로 데려온 게 잘한 일인가 걱정하기도 했지만, 설정대로라면 기억을 잃은 상태에다 각성 전이므로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우리 길드도 빨리 탑을 뚫어야 하는데. 46층 문지기 영감이 사우나 한다고 정신이 팔려서 올라가기만 하면 45층으로 쫓겨나니 답답하네.”

    한탄하듯 말하던 박시우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서 내가 46층에 있는 동안 아무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거구나.

    “박돈돈, 신기한 거 알려줄까? 문지기 영감 사우나 통이 우리 우나랑 똑같이 생겼더라?”

    46층에는 올라가보지도 못했다면서 박시우가 이건 또 어떻게 아는 거지?

    이것도 익명 헌터 게시판의 정보력인가?

    알면 알수록 두려워지는 곳이었다.

    “온천 사장이 문지기 영감한테 준 것 같은데, 나랑 취향 비슷한 거 보니까 잘 통할 것 같지 않아?”

    전혀. 25년을 같이 살아본 결과 맞는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박시우는 들뜬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내 생각에 이건 운명이야! 온천 사장은 집필에 들어오기 위해서 각성한 거야!”

    응, 아니야. 복권 당첨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다가 열쇠 한 번 잘못 잡아서 반강제로 각성한 거야.

    박시우는 기세로 보아 어떻게 해서든 나를 찾아낼 심산인 것 같았다.

    지금부터 탑 근처는 가지도 말아야지.

    “사우나 이야기를 하니까 나도 하고 싶네. 오랜만에 우나를 꺼내서 몸 좀 풀어볼까?”

    잠깐만, 박시우의 애착 사우나 통은 아직 영감한테 있는데?

    “저 형, 사우나 통 사랑 진짜 지독하다니까? 46층 못 올라가서 대기하는 내내 문지기 영감 사우나 통이 자기 우나 같다고 징징대는데 쪽팔려 죽는 줄 알았어.”

    불만 가득한 지호의 폭로에 나는 흠칫 놀랐다.

    박시우는 그게 우나란 걸 어떻게 알았지?

    그때 다용도실에서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박시우가 새파랗게 질린 채 달려 나왔다.

    “우리 우나가 사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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