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누……나?
“악! 어르신! 약초 더미에서 사람 손이…….”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광경에 질겁하며 약초 더미에서 물러났다.
그때 약초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더니 낯익은 꼬마의 보송한 얼굴이 드러났다.
“베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원래대로라면 베카는 탑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아프군.”
베카가 가방 안에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약 항아리(EX)’가 “대체 뭘 캐온 거냐”고 묻습니다.]
어르신, 그건 저도 궁금하거든요.
“어느 틈에 가방에 들어가 있었던 거야?”
“네가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했잖아, 함께.”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그렇지만 아직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데?
[가이드 ‘영계’가 “온천에 불길한 생명체가 들어왔다”며 경계합니다.]
설마, 그 불길한 생명체라는 게 베카는 아니겠지?
일단 마탑에서 데려오긴 했으니까.
나는 슬그머니 베카를 돌아봤다.
알사탕을 문 것처럼 통통한 볼을 가진 베카가 보석 같은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꼭 주인을 기다리는 새끼 고양이같이 나른해서 등 뒤로 검은 꼬리가 살랑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귀여움으로 세상을 지배한다면 모를까.
저렇게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불길한 존재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계야, 잠시 의논할 일이 있어서. 잠깐 약방으로 와줄래?’
[가이드 ‘영계’가 “그 김에 불길한 생명체도 쫓아내자”며 약방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왠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영계가 오기 전에 약부터 만들어두자.
“베카,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해.”
팔을 걷어붙이며 말하는 내게 베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탁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짤막한 손을 낑낑거리며 올라가는 뒤태가 귀여웠다.
정말 인형 같네, 우리 지호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나는 약 항아리 어르신을 돌아봤다.
“어르신, 조금 급해서 약초 정리는 나중에 하고 해독제부터 만들게요.”
[‘약 항아리(EX)’가 “해독제의 재료가 담긴 서랍장을 열어줄 테니 새살과 함께 넣어라“라고 말합니다.]
[‘약 항아리(EX)’의 힘으로 서랍장이 열립니다.]
난 서랍장에서 투명한 액체로 된 물약을 꺼내 들었다.
[요정의 이슬]
[요정의 숲에서 새벽마다 맺히는 맑은 이슬이다. 해독제의 재료로 쓰인다.]
[‘약 항아리(EX)’가 “요정의 이슬은 두 방울만 떨어뜨리면 된다”고 말합니다.]
“알겠어요!”
어르신이 시키는 대로 항아리에 새살을 넣고, 요정의 이슬을 두 방울 떨어뜨렸다.
[‘약 항아리(EX)’가 약초 ‘새살’을 삼킵니다.]
[‘약 항아리(EX)’가 ‘요정의 이슬’ 두 방울을 삼킵니다.]
[‘약 항아리(EX)’가 약을 제조합니다.]
약 항아리가 투명한 액체가 담긴 물약을 내뱉었다.
난 주섬주섬 물약을 챙겨 들었다.
[명약 ‘새살이 해독’을 획득합니다.]
[새살이 해독(S)]
[일시적이거나 확률적으로 걸린 부작용을 해독해서 무효화시킨다.]
“어르신, 새살이 솔솔도 두 병 더 필요한데 동시에 만드는 것도 가능해요?”
[‘약 항아리(EX)’가 “본인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약 제조를 무리해서 하면 피로가 쌓여서 쓰러질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경고합니다.]
[가이드 ‘영계’가 2층으로 올라옵니다.]
영계가 오고 있다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고작 물약 세 병으로 큰일이야 생기겠어?
딱히 피곤하지도 않은 상태고.
나는 어르신의 거듭된 경고를 가볍게 넘겼다.
“괜찮으니까 만들어주세요.”
[‘약 항아리(EX)’가 알겠다며 “지난번과 같은 재료를 두 배로 넣어라”라고 말합니다.]
새살이 솔솔의 재료라면 새살이랑 솔솔 가루였지?
나는 새살 두 개와 솔솔 가루 두 움큼을 집어 약 항아리에 넣었다.
[‘약 항아리(EX)’가 약초 ‘새살’을 삼킵니다. x2]
[‘약 항아리(EX)’가 ‘솔솔 가루’를 삼킵니다. x2]
[‘약 항아리(EX)’가 약을 제조합니다.]
약 항아리는 연속으로 두 개의 물약을 뱉어냈다.
가방을 꺼내 든 난 물약 두 병을 꼼꼼하게 챙겨 넣었다.
[명약 ‘새살이 솔솔’을 획득합니다. x2]
[부지런한 약 제조로 히든 아이템 ‘약 항아리의 물약 제조서(EX)’를 획득합니다.]
“우와! 어르신, 약 항아리의 물약 제조서를 획득했대요!”
난 손에 들린 책을 어르신에게 자랑하듯 내어 보였다.
[‘약 항아리(EX)’가 “그것만 있으면 S급 물약 제조사가 부럽지 않다”며 축하해줍니다.]
열심히 물약을 만든 보람이 있는걸?
“계약자! 대체 온천에 뭘 붙이고 들어온 거냐?”
약방을 울리는 영계의 고함에 난 제조서를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서둘러 가방에 쑤셔 넣었다.
베카를 본 영계가 입을 쩍 벌리며 경악을 금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냐니? 보다시피 순진한 어린아이지.”
“네게는 눈이 없는 거냐? 저게 어딜 봐서 순진한 얼굴이야? 광기가 번뜩이는 얼굴이지!”
[가이드 ‘영계’가 ‘탑의 주인’의 살기에 경기를 일으킵니다.]
시스템창에 뜬 문구를 읽고 나는 베카를 돌아봤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내 옷깃을 붙든 채 뒤로 몸을 숨겼다.
“저 병아리, 무서워.”
어딜 봐서 살기를 뿜고 있다는 거야?
잔뜩 겁에 질려서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데.
아무래도 시스템창에 오류가 생긴 것 같았다.
“병아리라니! 이 악의 근원이!”
“영계야, 악의 근원이라니! 어린애한테 말이 심하잖아. 베카, 괜찮아. 영계가 뭔가를 오해해서 그런 거지, 나쁜 병아리는 아니야.”
나는 영계를 다그침과 동시에 놀란 베카를 달랬다.
“이 몸은 병아리가 아니래도!”
[‘탑의 주인’이 “한입 거리도 안 되는 게 까불지 말라”며 눈을 번뜩입니다.]
“히익! 저것 보아라! 또 눈깔을 부라리고 날 겁박하지 않느냐?”
멀찍이 물러선 영계의 가녀린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베카를 돌아봤다.
“병아리는 내가 싫은가 봐.”
베카는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대체 이게 어딜 봐서 겁을 주는 거냐고!
겁을 먹는 건 오히려 베카잖아.
“영계야, 내가 말도 없이 외부인을 들여서 놀라게 한 건 미안해. 하지만 베카는 불길한 존재가 아니야. 그건 내가 장담할게. 물론 이 결정에 따른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거고.”
“장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그전에 내가 저 녀석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느냐?”
탑에서 폭주했던 베카를 생각하면 영계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베카, 영계는 백숙이 아니야. 먹으면 안 돼. 만약 그런다면 나 진짜 화낼 거야. 알았지?”
베카는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군.”
영계에게로 눈을 돌린 그가 나지막이 무언가를 속삭였다.
“응?”
“난 참 운이 좋은 것 같다고. 널 만났기 때문에 탑의 바깥으로 나올 생각을 하게 된 거잖아.”
수줍은지 슬쩍 눈을 피하는 베카는 내 심장을 저격하기에 충분했다.
이 천사 같은 아이가 마탑에 갇혀 있었다니.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아팠다.
보호자가 없으니까 나라도 잘 보살펴줘야지!
그러려면 베카를 온천에 들일 권한부터 얻어야 했다.
“영계야, 외부인을 온천에 머물게 할 방법은 없을까? 잠깐이라도 괜찮은데.”
[가이드 ‘영계’가 “온천 주인의 허락을 얻은 외부인이 온천 이용권을 사면 비용을 낸 만큼 머물 수 있지만 알려주지 않을 거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생각보다 간단하네?”
“이 망할 시스템창 녀석! 그걸 왜 네 멋대로 말하는 것이냐?”
시스템창의 갑질에 영계가 분노했다.
내가 온천 주인이니까 허락은 이미 받은 거나 다름없고, 온천 이용권만 사면 되는 건데.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를 여는 순간, 나는 제일 큰 난관에 부딪혔다.
온천 이용권 1회권이 300만 골드잖아!
일주일만 머물러도 2,100만 골드가 들었다.
꼬마한테 이렇게 큰돈이 있을 리가 없잖아.
“영계야, 온천 이용권에 어린이 할인 같은 건 없을까? 아무래도 어린애한테 1회에 300만 골드는 너무 큰 금액이잖아.”
“누가 어린애라는 거냐? 겉보기에는 저래도 속은……!”
[가이드 ‘영계’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1분간 침묵 상태가 됩니다.]
“영계야, 갑자기 왜 그래?”
알 수 없는 힘이란 건 또 뭐지?
영계는 시스템창조차 이용하지 못하는 건지 자포자기한 상태가 됐다.
어쩔 수 없지. 이용권 가격을 바꿀 권한은 내게 없고 지금 내가 가진 9,000만 골드는 30일을 이용한다는 조건에 선금으로 받은 거라 함부로 쓸 수 없으니까.
“베카, 미안한데 이용권이 너무 비싸서 다음에 내가 넉넉해지면 너를 초대하는 것으로 하면 안 될까?”
몇천만 골드를 덥석 내줄 정도로 형편이 좋지는 못한 터라 베카를 설득해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네 생각은 어떻지?”
“응?”
“넌 내가 온천에 들어오는 걸 허락해주는 건가?”
베카의 물음과 함께 내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탑의 주인’이 온천(EX)에 들어오길 원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주의 : 한 번 동의한 내용은 철회 불가능합니다.]
“난 당연히 동의지!”
[‘탑의 주인’이 ‘온천 사장’의 동의를 얻습니다.]
[‘탑의 주인’에게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가 개방됩니다.]
“베카, 너도 보다시피 이용권이 너무 비싸서…….”
[‘탑의 주인’이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에서 온천 30일 이용권을 구매했습니다. 이용권 비용 3,000만 골드를 획득합니다.]
[‘탑의 주인’이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에서 온천 30일 이용권을 구매했습니다. 이용권 비용 3,000만 골드를 획득합니다.]
[‘탑의 주인’이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에서 온천 30일 이용권을 구매했습니다. 이용권 비용 3,000만 골드를 획득합니다.]
응? 대체 몇 개를 사는 거야?
“베카, 너 이런 큰돈은 어디서 난 거야?”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
베카, 금수저였구나.
나 같은 소시민이 걱정할 게 아니었어.
“다행이다. 베카가 온천에서 지낼 수 있게 되어서.”
“어쩔 수 없군. 네가 결정한 일이니 온천에 피해가 되지 않도록 잘 단속해라, 계약자.”
침묵이 풀린 영계가 툴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맡겨만 둬! 그리고 이거 해독제인데 해령한테 전해줘.”
“오호. 약 할아범의 인정을 받은 건가? 제법이군. 이건 내가 잘 전달해주도록 하지.”
해독제를 받은 영계는 베카를 향해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뒤 약방을 나가버렸다.
“베카, 영계가 낯을 가려서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마.”
“한입…… 아니, 병아리의 생각이 어떤지는 상관없다.”
무신경한 얼굴인 걸 보니 베카는 영계에게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다행이고.”
“그보다 궁금한 게 있다.”
“뭔데?”
“시X이 무슨 뜻이지?”
갑자기 훅 들어온 험한 말에 나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온천으로 돌아올 때 외친 암호를 들은 것 같은데…….
“베카, 그러니까 시X은…….”
진땀을 빼며 수습하려는데.
[‘온천 마스터키(EX)’의 암호와 일치합니다.]
[히든 필드 ‘온천(EX)’을 벗어납니다.]
나이스!
이번에는 타이밍 좋게 마스터키가 발동하며 집으로 귀환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한테 시X의 찰진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
방문 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때, 거실에 있던 지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누……나?”
시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