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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17화 (17/190)

17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시X.”

욕쟁이 할머니가 떠오르는 정겨운 암호를 외치며 나는 온천으로 무사 귀환했다.

“돌아왔나?”

돌아오자마자 등 뒤에서 샤레니안의 무신경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핏줄이 선 단단하고 긴 팔을 자연스럽게 앞으로 뻗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샤레니안이 내게로 몸을 낮추자 코끝으로 달콤한 체리 향이 감돌았다.

나보다 머리가 한 개하고도 반이나 컸기 때문에 난 의도하지 않게 샤레니안의 널따란 품속에 갇히고 말았다.

“쯧, 살이 까졌잖아.”

샤레니안이 내 머리에 턱을 괸 채 족쇄가 남긴 상처를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난 고개를 들어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린 그의 얼굴을 심드렁하게 올려다봤다.

“누가 온천 한다고 바빠서 하마터면 손목이 날아갈 뻔…….”

내 가시 돋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샤레니안의 입술이 내 손목에 사뿐히 닿았다.

살며시 내려앉은 검고 긴 속눈썹이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는 내 담담한 어조가 재미있다는 듯이 샤레니안이 작게 웃었다.

“가호.”

[성좌 ‘불사의 살인귀’의 가호로 상처가 회복됩니다.]

샤레니안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의 상처가 깔끔히 나았다.

이렇게 편리하고 좋은 능력이 있었어?

“내가 늦어서 다친 거라면서? 그러면 응당 책임을 져야지. 넌 내 계약자니까.”

샤레니안은 별것 아니라는 얼굴이었지만, 난 속으로 내심 감탄했다.

S급 물약인 새살이 솔솔도 비등한 효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재료를 구하는 수고가 필요하니 샤레니안의 가호가 훨씬 효율이 좋았다.

오늘만 해도 새살을 구하러 갔다가 46층에서 떠도는 혼령이 될 뻔했잖아.

어쨌든 가호 한 번으로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 보면 샤레니안에게 불사라는 칭호가 괜히 붙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자, 그럼 이제 반대편도 마저 주실까요?”

샤레니안이 손을 달라는 듯 내게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반대편 쪽 손목에도 가호를 내려줄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선뜻 팔을 내어주지 못하고 슬금슬금 손을 몸 뒤로 숨겼다.

샤레니안은 단순히 팔이 까졌다고 표현했지만, 정확히는 살이 파인 수준이었다.

고작 입술이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짜릿해질 정도로 쓰라렸다.

46층에서는 일단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 난 개복치라 주삿바늘이 들어가는 것도 벌벌 떨 정도로 통증에 민감했다.

“왜 더 숨기는 건데?”

샤레니안이 의문스럽다는 듯이 제 품에 갇혀 있는 나를 돌아봤다.

“아파.”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면 떨어질 것 같지 않아서 짤막하게 답했다.

고작 잠깐 스치는 고통을 참지 못해서 겁을 먹냐며 미련 없이 놓아줄 줄 알았는데 샤레니안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나와 눈높이를 맞춰왔다.

“아프지 않게 조심하도록 할 테니까 날 믿어봐. 상처를 그대로 두면 더 오래 아프잖아.”

샤레니안은 주사 맞고 싶지 않다며 우는 아이를 달래듯이 차분한 어조로 나를 설득했다.

어르고 달랜다고 넘어갈 나이는 지난 터라 그에게 믿음이 생긴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마지막 말에 내 생각이 움직인 건 사실이었다.

이대로 있다가 다른 곳에 닿거나 스치기라도 하면 더 아프고 신경 쓰이긴 해.

그럴 바에는 잠깐 가호를 받고 끝내는 게 나았다.

“아프지 않게, 약속한 거다?”

다짐을 받아내려는 말에 샤레니안은 대답 대신 내게 시선을 둔 채로 긍정하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어차피 딱 한 번, 그것도 찰나의 순간이니까 속는 셈 치자.

뒤로 감췄던 팔을 내어주자 샤레니안은 전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손목의 상처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은 후에는 버릇처럼, 나와 눈을 맞췄다.

무심한 듯 강렬한 흑안이 내 얼굴을 훑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의 가호로 상처가 회복됩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손목에 있던 상처가 말끔히 지워졌다.

“아프지 않게, 처음 해보는 거라 잘됐는지는 모르겠네.”

무책임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신경을 써준 건지 전처럼 아프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제는 통증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과 동시에 샤레니안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이런 능력이 있었으면서 왜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고 그래?”

특히 피로 칠갑이 된 샤레니안과의 첫 만남은 너무 강렬해서 잊히지도 않는다.

“그날은 등을 다쳤으니까. 아무리 성좌라도 본인 등에 입을 맞추는 건 불가능하잖아.”

그건 또 그렇네.

“가호를 걸 때 입맞춤을 해야 한다는 건 대체 누가 정한 거야? 계약자가 남자면 어쩌려고?”

“계약자라고 해서 전부 가호를 걸진 않지. 그냥 놔둬도 상처는 나으니까.”

“그럼 내 상처도 알아서 나을 텐데 왜 가호를 건 거야?”

의식의 흐름대로 질문을 쏟아내는 내게 샤레니안은 어렵지 않게 답했다.

“단순한 변덕이다. 나를 포함한 성좌들은 그 순간의 감정대로 행동하니까.”

성좌는 편해서 좋겠네.

처음에는 부럽게만 생각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사정없이 샤레니안의 널찍한 등을 후려쳤다.

“악! 왜 때리는 거지?”

짧은 비명을 내지른 그가 손으로 등을 매만졌다.

“나도 능력 좋고 또라이 같은 성좌를 넷이나 얻었으니 미친 척하고 제멋대로 살아보려고. 그러니까 온천 문 닫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잘 모셔.”

“지금 그 말을 들으니까 생각나는 문장이 하나 있군.”

탐탁지 않은 샤레니안의 표정을 보니 좋은 말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 말이 뭔지 궁금해졌다.

“뭔데?”

“끼리끼리는 과학이다.”

샤레니안은 나도 그들 못지않은 ‘또라이’라는 소리를 참 정성스럽게 했다.

“오늘 내가 새로 배운 따끈따끈한 스킬이 있는데 한 번 볼래? ‘온천 사장표 사랑의 매’라고 전 거보다 화끈하고 매운맛인 게 있는데.”

스킬을 시전하기 위해 손을 가다듬고 주먹을 쥐는데 샤레니안의 오른쪽 뺨에 못 보던 상처가 나 있었다.

이미 어디서 두들겨 맞고 왔다고 생각하니 왠지 김이 빠졌다.

“얼굴에 상처는 뭐야? 불사의 살인귀라더니 매일 쥐어 터지고 다니는 거 보면 다 거품 아니야?”

“아, 이거 말인가?”

샤레니안이 제 뺨에 난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봤다.

“이건 네가 낸 상처잖아.”

내가 상처를 냈다고?

“난 아직 때리기 전인데?”

난 억울하다는 듯 주먹을 쥔 손을 들어 보였다.

“일단 그 손은 잠시 넣어두고 이야기 먼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일찍이 등으로 내 손맛을 본 샤레니안이 주먹에서 슬그머니 물러났다.

“좋아.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나 보자.”

사정을 들어보기로 한 나는 주먹을 거두고 고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불사검과 난 한 몸이나 마찬가지야.”

‘불사검’이란 건, 샤레니안이 오늘 나한테 던져줬던 무식하게 크고 무거운 검을 말하는 것 같았다.

“즉, 검이 다치면 나에게도 영향이 있는 거지.”

문득 탑에서 불사검을 내동댕이친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샤레니안이 검이 상하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거구나.

어쨌든 저 상처는 내가 낸 게 맞다는 거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양심이 찔렸다.

“지금 약 만들러 갈 생각인데, 약이 남으면 얼굴에 좀 발라보든가. 새살이 솔솔이라면 흉도 안 지고 금방 나을 거야.”

샤레니안이 가호로 내 상처를 낫게 해줬으니까 나도 보답은 해야지.

용건을 마친 난 샤레니안에게서 돌아섰다.

“기다린다.”

뒤에서 샤레니안의 대답이 들려왔다.

돌아서 있어서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기분 좋은 목소리인 걸 보니 다행히도 샤레니안은 상처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가방을 고쳐 멘 난 곧장 2층의 약방으로 올라갔다.

“어르신, 저 다녀왔어요!”

[‘약 항아리(EX)’가 “어서 와라”라며 나를 반깁니다.]

난 자랑스럽게 항아리를 향해 약초가 든 가방을 들어 보였다.

“저 오늘 가방이 가득 찰 정도로 새살을 잔뜩 캐왔어요!”

[‘약 항아리(EX)’가 “우리 손녀 장하다”며 손뼉을 칩니다.]

어르신의 푸근한 호응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어르신이 주신 가방이 A급이라 그런지 내용물이 많이 들어가더라고요. 처음에는 구멍이 난 줄 알아서 몇 번이고 살펴봤다니까요?”

[‘약 항아리(EX)’가 “내 손녀인데 A급 가방도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약 항아리(EX)’가 “그래도 A급 가방은 성인 남자 셋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라 약초를 넣기에는 무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어쩐지, 그래서 베카가 따준 약초의 양이 어마어마했는데도 가방에 전부 다 들어갈 수 있었던 거구나.

새삼 A급 가방의 위력을 실감했다.

“어르신, 부작용을 없애는 해독제부터 만들려고 하는데, 가능할까요?”

[‘약 항아리(EX)’가 “해독제를 만드는 건 금방이니 약초가 엉켜서 상하지 않도록 서랍장에 미리 정리해서 넣어둬”라고 말합니다.]

“그게 좋겠네요.”

어르신의 말에 수긍한 난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디 오늘 내가 한 노동의 수확을 확인해볼까?

난 가방을 거꾸로 들고 흔들어 안에 담긴 것들을 쏟아냈다.

순식간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새살이 작은 산을 이뤘다.

풍성한 수확에 흐뭇해하는 찰나, 약초 더미에서 사람의 손이 툭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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