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나야 나!☆
[‘탑의 수호자’가 잊었던 기억을 되찾으며 ‘탑의 주인’으로 각성합니다. 잠들어 있던 힘이 깨어납니다.]
잠깐, 탑의 수호자가 흰 수염 영감이 아니라 베카였어?
탑의 주인으로 각성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눈앞의 문구를 보면서도 난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자신이 온천을 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며 경악합니다.]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지금 네가 있는 곳은 탑 46층”이라고 좌표를 찍어줍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명부를 펼치며 “아래층에서 직업이 헌터인 망자들이 많이 나와서 저승사자들 단골 코스라 잘 알고 있다”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여기가 탑 46층이라고?’
문득 박시우와 지호가 탑 46층을 뚫으러 간다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어르신이 준 표에도 ‘46’이라고 쓰여 있었지.
생각해보면 박시우가 46층을 지키는 문지기가 애를 먹여서 몇 번을 시도했으나 문을 여는 것조차 실패했다고 말한 적 있었다.
문지기 영감이 드러누워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했어.
잠깐, 문지기 ‘영감’이라고?
설마 그 문지기 영감이 흰 수염 영감이었어?
랭킹 1위 길드가 몇 번이고 찾아가도 열 수 없던 문의 공략법이 고작 사우나였냐?
내가 랭커라도 허탈할 만한 이야기였다.
아 참, 지금 내가 다른 랭커들 걱정할 처지가 아니지.
중요한 건 내가 있는 곳이 그 악명 높은 탑의 46층이라는 것이었다.
‘염라야, 혹시 오늘 자 망자 명부에 내 이름도 있니?’
절박함에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성좌 ‘저승의 염라’가 “망자의 명부는 기밀이라 아무리 계약자라도 알려줄 수 없다”며 선을 긋습니다.]
염라는 꼭 진짜 내가 죽는 날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염라대왕인 줄 알겠어. 아주.
계약자가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는데 끝까지 염라대왕 코스프레를 하다니 지독한 컨셉충이었다.
헌터물 같은 거 보면 좀 또라이인 것 같아도 위기의 상황에는 알아서 척척 도움이 되는 성좌도 많던데.
내 성좌들은 왜 그냥 또라이냐?
츤데레에 살인귀에 컨셉충에…….
한탄하는 중에 끝판왕이 나타났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죽는 날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오늘의 운수는 봐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대왕 또라이기는 해도 운수의 점은 꽤 정확도가 높았다.
지난번에 재물과 죽을 운이 같이 들어온다고 했는데 9,000만 골드를 벌자마자 온천수에 휩쓸려서 꼼짝없이 죽을 뻔했으니까.
‘곧 죽을 수도 있으니까 빨리 봐줄래?’
[성좌 ‘운수’가 오늘의 운수를 보기 위해 엽전을 던집니다.]
[성좌 ‘운수’가 떨어진 엽전을 보며 “큰 고비가 오지만 그것만 넘기면 황금빛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풀이가 나왔다고 말합니다.]
황금빛 명예, 그런 건 다 필요 없고.
‘그래서 내가 그 고비를 넘겨?’
[성좌 ‘운수를 믿습니까?’가 “그건 네가 마음을 먹는 데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운수의 점괘를 듣고 있던 나는 강한 의문이 들었다.
그 말을 대체 누가 못해?
‘운수야, 나한테만 말해봐. 솔직히 너도 모르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결과를 미리 알게 되면 절박함이 사라져서 운명이 바뀔 수도 있으니 말을 아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온천이 오래 운영되길 바라기 때문에 네가 무사히 살아남길 바란다”며 응원 봉을 흔듭니다.]
운수가 신난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인가?
왠지 그라면 팝콘을 먹으면서 관람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점괘를 봤는데 얻은 게 없네.
안 보니만 못했겠어.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때로는 사사로운 감정이 강한 힘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는 말만 남기고 온천을 즐기러 떠납니다.]
‘넌 계약자가 죽을 위기에 놓였는데 속 편하게 온천이 하고 싶냐?’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자칫하면 오늘이 마지막 영업이 될지도 모르니 미리 즐겨야 한다”며 사라집니다.]
태평한 운수를 보며 확신했다.
이곳에서는 내 힘으로 살아 나가야 한다는 걸.
난 손과 발목을 묶은 족쇄를 풀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단단한 족쇄는 더 고통스럽게 살을 파고들 뿐이었다.
‘젠장, 족쇄가 너무 단단해서 내 힘으로 풀어내는 건 불가능해.’
“움직이지 않는 편이 덜 괴로울 거다. 그 족쇄는 반항하려고 할수록 몸을 옥죄니까.”
베카는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나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베카, 이러지 마.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대화를 하자.”
“긴 이야기는 필요 없다. 그냥 나와 영원히 함께 있겠다는 말 한마디면 돼.”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하려는 나의 노력은 집착에 눈이 먼 베카의 한마디에 수포로 돌아갔다.
묶인 채로 죽는 것도 싫지만, 영원히 46층에 갇혀서 살고 싶지도 않아!
내가 몬스터도 아니고 탑에 갇혀 살다니. 그건 죽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악! 시X!”
[‘온천 마스터키(EX)’의 암호와 일치합니다.]
맞아! 나한테는 치트키 ‘시X!’가 있었지!
드디어 이 지옥 같은 46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는데.
[히든 필드 ‘온천(EX)’으로 이동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왜 안 돼?
평소에는 가지 말래도 잘만 가더니!
이렇게 또 하나의 희망이 사라졌다.
베카의 경고대로 발악을 거듭할수록 족쇄가 손목을 끊을 듯이 조여왔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불사의 살기’로 족쇄의 고통을 무력화시킵니다.]
샤레니안의 등장과 동시에 족쇄가 느슨해지고 시큰거리던 손목의 통증이 가라앉았다.
‘왜 이제 왔어? 나 손목 나갈 뻔했잖아! 시X!’
[‘온천 마스터키(EX)’의 암호와 일치합니다.]
[히든 필드 ‘온천(EX)’으로 이동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알았다고! 내 마음대로 욕도 못하겠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알몸이어서 급하게 가운을 챙겨 입느라 늦었다”며 미안해합니다.]
‘이제 왔으니까 이 족쇄 좀 어떻게 해봐.’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탑의 규정상 족쇄를 끊을 수 있는 건 각성자 본인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성좌는 왜 있어? 장식품이야? 기껏 메말랐던 온천을 목숨 걸고 살려놨더니 이것밖에 못해?’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흥분을 가라앉혀”라며, “내 검을 던져줄 테니 받아”라고 말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내 검은 먼치킨이어서 족쇄쯤은 간단히 베어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걸 어떻게 받는데?’
물음과 동시에 환한 빛이 피어나며 내 손에 무언가 잡혔다.
그런데…… 이 촉감은 검이라기에는 뭔가 이상한데?
게다가 축구장 잔디가 절로 떠오르는 푸릇한 초록색은 무척 낯익었다.
[온천표 초록색 긴 때수건(EX)]
[때수건 장인이 한 땀 한 땀 엮어 만든 고급 초록색 기다란 때수건. 부드러운 재질이지만 때가 시원하게 밀린다. 탄력이 좋고 질겨서 끊기지 않는다.]
아니, 여기서 왜 갑자기 때수건을 주는 건데?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서두는 바람에 잘못 던졌다”고 민망해합니다.]
‘네 때수건 취향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빨리 진짜로 내놔!’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다며 검을 던집니다.]
다시 한 번, 손에서 신성한 빛이 일더니 드디어 내 몸만 한 검이 나왔다.
순식간에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내 몸도 앞으로 기울었다.
[살인귀의 불사검(EX)]
[????????명의 피를 묻힌 살인귀의 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의 목을 벤다는 전설이 있다. 무식하게 크고 개무겁다는 점이 특징이다.]
[공격력??????? 힘?????????]
‘어마어마하게 센 검이라는 건 알겠어. 그래도 이건 너무 무겁잖아!’
샤레니안의 검은 너무 크고 무거워서 힘20에 체력35가 전부인 나는 휘두르는 건 절대 무리였고, 간신히 손에서 놓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그걸 왜 제대로 못 드냐”며 황당해합니다.]
‘이걸 아무렇지 않게 드는 네가 비정상인 거거든?’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종일 시체처럼 드러누워 있는 게 아니면 한 번도 휘두르지 못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답답해합니다.]
‘너 나 보고 있었냐?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답이 없다”며 고개를 젓습니다.]
‘샤레니안, 너마저 날 포기하지 마. 희망을 가져!’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목욕 바가지라도 줄 테니 두들겨 패보겠냐”고 제안합니다.]
샤레니안은 이미 반쯤 나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에 목욕탕 바가지를 던져줄 생각을 하진 못하겠지.
“이해할 수 없군.”
낑낑거리며 검을 부여잡고 있는 나를 지켜보던 베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 한마디만 하면 다칠 일도 없을 텐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버티다니.”
베카는 내 손목에 난 상처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기만 할 뿐, 그 이상으로 날 공격하지 않았다.
이제 알겠어. 베카는 날 죽일 생각이 없는 거야.
운수가 온천에 들어가기 전에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그게 열쇠였다.
난 인정사정없이 샤레니안의 검을 내팽개쳤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검에 흠집이 나는 소리가 났다”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성을 지릅니다.]
“베카, 잠시만 이리 와볼래?”
“이제 포기할 생각이 든 건가?”
내가 무기를 내려놓자 베카는 의심 없이 내게 다가왔다.
이때다!
나는 두 손에 기다란 때수건을 펼쳐 들었다.
[히든 스킬 ‘온천의 세신사는 나야 나!☆’를 획득합니다.]
[스킬 ‘온천의 세신사는 나야 나!☆’ 효과로 때수건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베카를 향해 던졌다.
[세신사의 손기술과 ‘온천표 초록색 때수건(EX)’의 탄력에 의해 ‘탑의 주인’이 속절없이 끌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