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손녀가 되었다
내 이름을 알고 있어?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봐도 초면이었다.
날카로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잘 빚어진 도자기 같은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다면 절대로 기억해내지 못할 리 없다.
단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만큼 뇌리에 강렬하게 남을 얼굴이었다.
잠깐, 그런데 보통 사람이 바닥을 흥건히 적시도록 피를 흘리면서 20분도 더 되는 시간을 살아 있을 수 있나?
“떼끼!”
남자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이 들 무렵, 누군가 매화가 그려진 흰 부채를 접어 그의 머리를 딱 소리 나게 내리쳤다.
“우리 꼬꼬마 핏덩이한테 개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라!”
화려한 은구슬로 장식된 부채를 든 젊은 남자는 긴 백발에 금테와 금줄로 장식된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이 연륜이 느껴지는 익숙한 말투는…….
“어르신?”
“날 알아보는구나.”
진짜 어르신이었다고?
어르신은 진회색 눈동자로 나를 갸륵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약 항아리가 사람이 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어르신이라면서 왜 이렇게 젊은 거야?
언뜻 봐서는 쓰러져 있던 남자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약방 할아범,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원래 누굴 감싸고 도는 성격은 아니잖아?”
부채로 맞은 부위를 매만지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어르신을 돌아봤다.
“혹시 떠날 때가 된 건…….”
“아직 매가 부족한 모양이구나!”
발끈한 어르신이 부채를 들어 올리자 남자가 한 손으로 부채를 막아냈다.
“아니, 충분해. 나 다쳤으니까 좀 봐주라.”
“내가 약방의 주인으로 인정한 이상, 저 아이는 내 손녀나 다름없다. 그러니 행동거지를 조심해라.”
엄살을 부리는 남자에게 어르신이 진중한 목소리로 경고를 했다.
“손녀…….”
내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내심 할아버지, 할머니의 돌봄과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래서인지 어르신이 손녀라고 불러줬을 때 왠지 가슴이 뭉클하면서 포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르신.”
내 부름에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던 어르신이 날 돌아봤다.
“진짜 절 손녀로 생각해주시는 거예요?”
쑥스러워하며 물으니 어르신의 곁에 있던 남자가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았다.
“약방 할아범, 나 지금 심장이 이상해.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묵직하달까?”
“등에 칼이 꽂혔다가 빠졌으니 아플 수밖에!”
어김없이 약방 어르신의 부채가 남자의 등을 후려쳤다.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남자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어르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물론이다. 이제 넌 내 손녀야. 그러니 편히 대해도 좋다.”
왠지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내 편이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든든해졌다.
“피도 안 섞였는데 손녀는 무슨. 변태 영감.”
“쓸데없는 소리 하거들랑 가서 씻기나 하지 못할까!”
노골적인 남자의 혼잣말에 어르신이 목청을 높였다.
그러고 보니까 저 남자, 등에 칼을 맞았다고 했지?
게다가 온천에도 익숙해 보이고.
“너 샤레니안이지?”
“정답.”
옅게 웃으며 답하던 샤레니안의 시선이 내 아래로 향했다.
“약방 할아범, 잠시 이것 좀 빌리자.”
“그건 내가 탕약을 짤 때 쓰려고 아껴둔 천인데!”
샤레니안이 어르신의 목에 둘러져 있던 흰색 천을 뺏어 들더니 내 앞으로 몸을 낮춰 앉았다.
조심스럽게 내 발을 감싼 그가 천으로 발바닥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묻혀서 미안해.”
사과를 하는 샤레니안은 풀 죽은 늑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매서운 눈매가 온순해지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때쯤,
“은근슬쩍 내 손녀 발 만지작거리지 말고 빨리 탕 안으로 꺼져!”
어르신이 발로 샤레니안의 등을 확 밀어버렸다.
덕분에 그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칫, 성가신 할아범 같으니라고. 가면 되잖아, 가면.”
조금 전까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쌩쌩한 몸놀림으로 샤레니안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박수온, 약 고마워.”
샤레니안은 마지막으로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채 돌아섰다.
그런데 내가 샤레니안에게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던가?
하긴 나도 시스템창을 통해서 이름을 알았으니, 알려면 충분히 알 순 있겠지.
샤레니안이 자리를 떠나고 나니 피로 흥건히 물든 마루가 보였다.
온천 주인이 됐으니까 저걸 치우는 것도 내 일이 된 건가?
“어르신, 피로 물든 마루는 어떻게 청소하는 게 좋을까요? 제가 살림에는 통 재주가 없어서요.”
“보통 그런 건 모르는 게 맞지.”
어르신이라 그런지 옳은 말씀만 골라서 하셨다.
설득당한 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따로 청소할 필요가 없다. 이 온천은 해령의 힘으로 유지되는 공간이라 본인이 무탈하다면 청결도 유지되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긴 한데.
“그런데 저 핏자국은 왜 사라지질 않는 걸까요?”
“그건 좀 이상하긴 하구나. 해령의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작은 문제가 생기긴 했습니다.
설사병이라고…….
“혹시 차를 잘못 먹어서 생긴 부작용을 치료하는 약도 만들 수 있나요?”
“작정하고 독초를 넣은 거면 몰라도 웬만한 똥손이 아니고서야 차에 부작용이 생길 일은 없다. 걱정하지 마라.”
그렇다면 제가 아주 특별한 똥손인가 보군요.
“나한테 그 정도 해독제는 누워서 만들 수 있는 수준이기도 하고.”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만드는 김에 ‘새살이 솔솔’도 두 병 정도만 더.”
“문제는 없지만, 하나 조언을 하자면 너무 무리하게 약을 제조하지 않는 게 좋다. 약을 만드는 것도 상당한 체력을 요구하니까 말이다.”
이때다 싶어 힘차게 두 손가락을 펼치는 내게 어르신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대량도 아니고 고작 세 번 만드는 건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 그 흔한 감기조차도 앓지 않는 튼튼한 몸이거든요.”
“네가 괜찮다면야. 새살만 더 구해온다면 약을 제조해주지.”
“네?”
약초를 구해오라는 말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당혹스러웠다.
“네가 조금 전에 쓴 게 마지막이었거든.”
“새살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데요?”
“때마침 내가 새살이 많이 나는 곳을 알고 있지. 그곳의 문지기가 내 친우이긴 하다만 성격이 워낙 까탈스러워서 네가 감당할 수 있을지…….”
그래도 앞으로 약을 계속 만들려면 새살이 필요할 텐데.
어차피 한 번은 가야 한다면 지금 가는 게 나았다.
“만약 갈 생각이 있다면 이 표를 가지고 가거라. 이걸 들고 온천 문을 나가면 내가 말한 장소로 데려다줄 거다.”
마음을 정한 내게 어르신이 표를 건넸다.
표는 기차표처럼 생겼는데 ‘46’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들도 챙겨 가거라.”
[‘약 항아리(EX)’에게 ‘채집용 가방(A)’을 획득하였습니다.]
[‘약 항아리(EX)’에게 ‘약 항아리의 호미(S)’를 획득하였습니다.]
모두 약초를 캘 때 쓸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맨손으로 약초를 캐면 손이 상하지 않느냐.”
“고마워요. 어르신!”
나는 어르신이 준 가방과 호미를 챙겨 들었다.
“다녀올게요!”
표를 쥔 난 온천의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커다란 용이 조각된 문을 지키고 선 흰 수염 영감이 보였다.
그는 문에 기대어 졸고 있다가 내 인기척에 눈을 떴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않나? 피곤해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헛수고 말고 그냥 돌아가라고!”
찾아오는 게 나뿐만이 아닌지 영감은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다.
“새살을 얻어가고 싶어서요. 잠깐만 안에 들어가서 캐고 나오면 안 될까요?”
“그 표는……. 약방 할아범이 보낸 건가?”
내 손에 들린 표를 본 영감이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네, 맞아요.”
“아무리 약방 할아범 부탁이라도 안 돼! 저 문을 열 수 있는 건 나뿐이야. 하지만 지금 난 온몸이 뻐근해서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으니 썩 돌아가!”
어르신, 아무래도 흰 수염 영감님과의 우정이 깊지는 않으셨나 봅니다.
흰 수염 영감은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 피곤해 보였다.
온몸이 뻐근해서 못 움직이겠다면, 뻐근한 몸을 풀어주면 되잖아?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영감님, 잠깐만 귀를 막아주시겠어요?”
“이렇게?”
영감이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막았다.
“시X!”
[‘온천 마스터키(EX)’의 암호와 일치합니다.]
[히든 필드 ‘온천(EX)’으로 이동합니다.]
온천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온천의 문을 열어 집의 다용도실로 향했다.
어둑했던 하늘은 어느새 해가 떠올라 밝아져 있었다.
여기 있다!
난 1인용 사우나 통을 챙겼다.
샤워로는 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박시우의 애착 사우나 통이었다.
무심코 다용도실의 유리문으로 거실을 들여다보다가 눈을 뜨고 자는 박시우와 눈이 마주쳤다.
“악! 시X!”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온천 마스터키(EX)’의 암호와 일치합니다.]
[히든 필드 ‘온천(EX)’으로 이동합니다.]
온천으로 돌아온 나는 표를 들고 곧장 영감을 찾아갔다.
“성가신 꼬마군. 몇 번을 찾아와도 내 답은 같다.”
“제가 가져온 걸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걸요?”
콧방귀를 끼는 영감의 앞으로 박시우의 애착 사우나 통을 내려놨다.
‘해령, 힘든 상태라는 건 알지만…… 이 통에 온천수를 채워줄 수 있겠어?’
[성좌 ‘온천수의 지배자’가 “그런 건 숨쉬기 운동보다 쉽다”며 온천수를 움직입니다.]
츤데레 해령은 이번에도 아픈 티 하나 내지 않고 내 부탁을 들어줬다.
덕분에 통에는 금방 뜨끈한 온천수가 차올랐다.
“아니, 이건 약방 할아범네 온천수가 아닌가?”
온천수를 본 영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번 들어가보시겠어요?”
내 권유에 영감은 기다렸다는 듯이 통 안으로 쏙 들어갔다.
“어허허, 뜨끈하니 몸이 풀리는구나!”
영감이 흡족하게 웃자 큰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내 역할은 다했으니 뒷일은 알아서 책임져야 한다는 걸 명심해라.”
영감은 내가 약초를 모두 털어갈까 봐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조금만 캐고 돌아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부터 새살이 가득했다.
약초에 눈이 먼 나는 홀린 듯이 호미를 꺼내 몸을 낮췄다.
문이 열리는 순간, 전체 헌터 시스템창에 뜬 문구는 보지 못한 채.
[탑 46층의 문이 개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