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온천에 시체가 있다
분명 ‘온천표 쑥 라테’ 레시피를 보고 만들었는데 왜 ‘초록 괴물 라테’가 만들어진 거지?
나는 내 손을 슬쩍 내려다봤다.
수많은 흑역사를 쌓아온 내 똥손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근데 해령이 먹었을 때는 괜찮았잖아?
나는 불현듯 해령이 젖 먹던 힘을 다해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 걸 떠올렸다.
설마 그것도 이 정체불명의 라테 때문이었나?
하지만 분명히 맛있다고 했었는데…….
맛을 확인하기 위해 여분의 쑥 라테를 들이킨 나는 곧바로 싱크대로 달려가 입속의 모든 걸 뱉어냈다.
먹어보니까 슬라임으로 즙을 짠 것 같은 맛이 난다는 박시우의 감상평이 뼛속까지 와닿았다.
내가 만들긴 했지만…… 이거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거 맞나?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형, 아직 멀었어? 나 지금 급한데…….”
“큰방 화장실 써!”
“거기 얼마 전에 변기 고장 났단 말이야! 아직 수리받기 전이라 못 써! 그러니까 빨리……!”
그때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지호의 애절한 외침이 들렸다.
“보채지 말아봐! 나도 지금 죽을 것 ㄱ…….”
말을 끝맺지 못한 박시우의 신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소리가 화장실 밖으로 터져 나왔다.
일단 달아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난 조용히 방으로 몸을 피했다.
‘해령, 혹시 아직도 화장실에 있어?’
[가이드 ‘영계’가 “해령이 화장실에 들어간 뒤 나오지 않는다”며 “그곳에서 영면에 드신 게 아닌지”라고 걱정합니다.]
역시 내가 만든 쑥 라테 때문이겠지?
맛이 이상하면 뱉을 것이지, 그걸 왜 굳이 참아가면서 먹어?
미션이 완료되지 않은 걸 보면 해령이 마신 것도 초록 괴물 라테인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맛이 나쁘지 않다고 말한 거야?
그것 때문에 난 내가 제대로 만든 줄 알았잖아.
불현듯 해령의 호감 진행 현황이 떠올랐다.
설마…… 진짜 츤데레였어?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일단 숨은 붙어 있다”며 밖으로 기어 나옵니다.]
얼마나 쏟아냈으면 걷지도 못해!
‘라테가 이상하다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라테 때문이 아니니 신경 꺼라“라고 말합니다.]
이 사달이 났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두 발로 서지도 못해 기어가면서도 라테 때문이 아니라 말하는 해령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해령은 츤데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가 츤데레라는 것보다 내 똥손이 사고를 쳤다는 사실이었다.
‘영계야, 이 사태를 해결할 해독제 같은 건 없을까?’
[가이드 ‘영계’가 “해독제가 있긴 하지만, 그건 온천 주인만이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온천 주인이니까 가능하겠네!
듣던 중 다행인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가이드 ‘영계’가 “온천 약방에 있는 약 항아리로 해독제 제조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가이드 ‘영계’가 “하지만 그전에 약 항아리의 인정을 받아야 해서 당장은 불가능할 거다”라고 말합니다.]
온천의 약 항아리는 낯을 심하게 가리는 모양이었다.
그럼 어쨌든 당장은 해독제를 구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어?’
[가이드 ‘영계’가 “먹은 걸 전부 쏟아낼 때까지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내 똥손에 남정네 셋이 엉덩이를 부여잡고 화장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새삼 내 손의 위력이 놀랍다.
쑥 라테는 좀 더 신중히 연습하는 게 좋겠어.
이대로 팔았다가는 고소를 면하지 못하겠는데.
‘영계야, 하나 더 물어볼 게 있어.’
[가이드 ‘영계’가 뭐냐고 묻습니다.]
‘우리 온천에 다른 헌터들도 들어올 수 있어?’
[가이드 ‘영계’가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젓습니다.]
[가이드 ‘영계’가 “우리 온천은 네 성좌님과 온천 사장에게만 보인다”고 말합니다.]
뭐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러면 헌터들이 찾으러 다녀도 소용없는 거였잖아?
괜한 걱정을 했다며 안도하는데 영계가 말을 이어갔다.
[가이드 ‘영계’가 “드물긴 하지만 음기가 강한 날이면 일반인이 온천을 보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드문 일이라 했지만, 누군가 온천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에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는 어떻게 하는데?’
[가이드 ‘영계’가 “주인의 재량이지만, 볼 수 있는 건 그날 하루뿐이라 이제까지는 일반 온천처럼 손님으로 받아줬다”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EX급 온천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다들 온천과 나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고.
불안해진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익명 헌터 게시판에 접속했다.
실시간 정보를 전달해주는 데는 이곳만큼 빠른 곳이 없었다.
게시판을 훑어보던 내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온천 사장님 실물 영접>
누가 날 보기라도 한 건가?
나는 서둘러 게시글을 눌렀다.
<온천 사장님 실물 영접>
* * *
해보고 싶습니다. 보시면 연락 좀. xxx-xxxx-xxxx
* * *
└익명1 : 하겠냐?
└익명2 : 저 번호 테러당할 듯ㅋㅋㅋㅋ
└익명3 : 다들 예민한 주제인데 어그로성 글 자제 좀요.
└쓰니 : 네, 다음 진지충.
아, 심장 떨어질 뻔했네.
진짜 봤다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생각 없이 읽고 넘기던 어그로성 글이 전처럼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도 어그로성 글이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간 곳이 EX급 온천 같다니까? 거기서 차 한 잔 마셨는데 체력 5 상승.
* * *
└ 익명1 : 네, 다음 어그로.
└ 익명2 : 이 새X 상습범이네. 저번에도 온천에서 돈가스 먹었는데 실신 직전이었던 몸이 회복됐다고 함.
└익명2 : 근데 어이없는 건 다시 찾아가보니까 온천이 없었다는 거임. 소설가인 듯.
└익명3 : 쓰니가 들려주는 전래동화.
이건 진짜 같은데?
그러고 보니 전에도 온천에 관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돈가스와 차에 특별한 효과가 있다는 걸 아는 것도, 다시 가려고 했더니 그 자리에 온천이 없다는 것도 전부 맞아들어갔다.
이런 글이 벌써 떠돌아다니는 걸 보면 안전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영계야, 우리 온천 정확한 위치가 어디야?’
[가이드 ‘영계’가 “SSS급 던전과 EX급 던전 사이”라고 말합니다.]
영계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SSS급 헌터는 돼야 우연히라도 온천을 볼 수 있다는 건데?
아직 SSS급 헌터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있었다면 박시우가 랭킹 1위일 수가 없지.
아마도 던전을 헤매고 다니던 S급 헌터가 어딘지도 모르고 휩쓸려 들어온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밖을 돌아다니는 헌터들이 꽤 있을 텐데…….
그러다 온천을 보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불안해서 안 되겠어.
가서 불침번이라도 서야지.
정 안 되면 기절이라도 시켜서 온천 밖에 던져버리면 되잖아.
혼자는 힘들지 몰라도 성좌들의 힘을 빌리면 어떻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온천 마스터키를 꺼내 들었다.
영계가 온천에 돌아오려면 암호를 외쳐야 한다고 했지?
‘아직 암호가 없는데……. 온천에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하지?’
[‘온천 마스터키(EX)’가 ‘삐―’ 소리 이후에 암호(특수문자, 영어, 숫자 사용 불가) 2글자를 말해달라고 합니다.]
역시 똑똑하다니까.
마스터키는 내 말을 척척 알아들었다.
[‘온천 마스터키(EX)’가 한 번 설정한 암호는 변경할 수 없으니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암호는 바로 정해야 하는 건가?
뭘로 하지?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간단한 걸로 정하는 게 좋겠지?
적당한 암호를 떠올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며 다급한 표정의 박시우가 들어왔다.
“뚫어뻐어어엉!”
[‘온천 마스터키(EX)’ : 삐―]
“시X!”
사나운 몬스터처럼 문을 박차고 들어온 박시우에게 기겁한 나는 험한 말을 내뱉었다.
[‘온천 마스터키(EX)’의 암호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화가 치밀어 오른 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뚫어뻥을 왜 여기 와서 찾아!”
박시우를 향해 빽 하고 소리를 지르자, 그가 두 손으로 엉덩이를 부여잡으며 몸을 꽈배기처럼 꼬았다.
“변기가 막혔는데 어떡해! 진짜 급해 죽겠다고! 뚫어뻥! 빨리!!”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걸 보니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것 같았다.
“다용도실에 있으니까 저리 꺼져!”
나는 그대로 박시우의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냈다.
내게 걷어차인 그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지만, 개의치 않고 문을 걸어 잠갔다.
아, 진짜 큰일 났네.
열쇠 암호는 한 번 설정하면 못 바꾼다고 했는데.
“진짜 박시우, 저런 것도 오빠라고. 시X!”
울분을 토해내는 내 앞으로 또 하나의 창이 떠올랐다.
[‘온천 마스터키(EX)’의 암호와 일치합니다.]
젠장, 비번이 시X이었지.
습관처럼 나온 험한 말이 내 의사와 상관없이 마스터키를 발동시켰다.
[히든 필드 ‘온천(EX)’로 이동합니다.]
그대로 온천 안으로 이동한 나는 발밑을 축축하게 적시는 끈적한 액체에 슬그머니 아래를 내려다봤다.
“악!”
발밑에 흥건한 피 웅덩이에 놀란 나는 곧장 뒷걸음질을 쳤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흑발의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온몸이 새빨간 피로 흥건히 물든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