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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8화 (8/190)
  • 8화

    내가 그 사장인데! 으?

    급한 일이 볼일을 보러 가는 거였어?

    젖 먹던 힘을 다해서 가는 걸 보면 보통 급한 게 아니었나 보네.

    급똥 신호는 성좌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았다.

    해령이 레시피까지 가르쳐줬는데, 쑥스러울 수 있으니까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다시 온천으로 들어올 때는 온천 마스터키에 암호를 말하면 된다.”

    문고리를 잡은 내게 영계가 온천으로 돌아오는 법을 알려줬다.

    “내가 온천 마스터키를 어쨌더라?”

    “네 목에 있지 않으냐?”

    마스터키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이던 나는 내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크기가 작아진 황금 열쇠가 손에 잡혔다.

    ‘어느 틈에…….’

    “온천의 마스터키는 자신의 주인에게 알맞은 모양으로 변하지. 그편이 가지고 다니기도 좋으니까.”

    EX급이라고 마스터키도 똑똑한 모양이었다.

    “암호가 뭔데?”

    “그건 다시 들어올 때 네가 설정할 수 있다. 단, 한 번 정하면 변경할 수 없으니까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해라.”

    딱히 어려울 건 없네.

    “알겠어. 그러고 보니까 이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영계한테는 아무것도 못해줬네. 다음에 올 때는 꼭 쑥 라테 한 잔 만들어줄게!”

    “난 괜찮다!”

    영계에게 손 인사를 하고 내 방을 떠올리며 문손잡이를 돌렸다.

    “난 분명히 괜찮다고 말했다!”

    [가이드 ‘영계’가 나를 향해 절규합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마지막까지 큰 소리로 내 호의를 사양하는 영계의 목소리가 등 뒤를 울렸다.

    * * *

    문을 열고 나오자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방에 도착해 있었다.

    이거 완전 도라X몽의 ‘어디로든 문’ 급이잖아?

    나중에 이걸로 세계 여행까지 가능할지도?

    놀 생각에 한참 신이 난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제대로 허탕 쳤네. 문지기는 왜 시체처럼 누워서 꿈쩍도 안 하는 거야?”

    “형도 참, 그걸 알았으면 벌써 46층에 들어갔겠지.”

    거실에서 박시우와 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밖이 어둑해져 있는 걸 확인한 난 탁상에 놓인 시계를 들여다봤다.

    벌써 새벽 1시야?

    온천 안은 조명이 환하게 밝히고 있어서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 줄은 몰랐다.

    “아, 맞아. 옷!”

    뒤늦게 내가 온천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걸 보면 분명히 박시우랑 지호가 수상하게 여길 텐데.

    난 내가 각성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관심은 지금도 충분히 과하게 받고 있다고.

    이 이상의 관심은 사절이었다.

    창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자들이 보였다.

    지긋지긋한 기레기들, 끈질기기도 하지.

    “누나, 방에 있어?”

    아파트 입구에 버티고 선 기자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데 밖에서 지호가 나를 찾는 게 들렸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나는 입은 옷을 벗어 던지고 옷걸이로 손을 뻗어 잡히는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거실에 없는 거 보니까 방에 틀어박혀서 X플릭스나 보고 있겠지.”

    안 봐도 뻔하다는 듯이 말하는 박시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박시우, 저거 내 방에 CCTV라도 설치해둔 거 아니야?

    난 슬그머니 주변을 살폈다.

    예상치 못하게 각성하는 바람에 온천으로 끌려가지만 않았다면 한창 X플릭스를 보고 있을 시간이 맞았다.

    “누나, 나 들어간다?”

    방으로 다가오는 지호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바닥에 널브러진 온천 복장을 이불 속에 구겨 넣었다.

    “뭐야, 깨어 있었네? 그런데 왜 대답을 안 해? 누나가 기자들한테 납치라도 당한 줄 알았잖아.”

    내가 방에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지호는 안심했다는 듯 옅게 숨을 내쉬었다.

    “집 안에 S급 헌터가 둘이나 있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날 납치할 생각을 할까?”

    또라이 박시우와 나와 연관된 일이면 눈이 돌아버리는 지호가 있는 한, 목숨을 걸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미친X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긴 하지.”

    박시우랑 너를 포함해서.

    “그런데 어디 나가려던 중이었어? 아직 밖에 기자들 깔려 있던데.”

    하필 잡히는 대로 꺼내 입은 옷이 체육복에 패딩이었다.

    이 차림으로 말하자면 집순이의 표본인 나의 대표적인 외출복이기도 했다.

    “날도 춥고 뭐 좀 해 먹으려고 몰래 나가서 재료 좀 사 왔지.”

    “니가 뭘 해 먹는다고? 너 누구냐? 우리 집 박돈돈은 그런 이유로 곰돌이 문신을 버리지 않아."

    박시우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체육복 차림의 나를 바라봤다.

    그가 언급한 곰돌이 문신은 곰돌이 얼굴이 곳곳에 새겨진 내 애착 수면 잠옷을 말했다.

    난 집에 있는 동안에는 무조건 곰돌이 수면 잠옷 차림이었다.

    물론 온천으로 끌려가기 전까지도.

    그러니 달라진 차림에 지호와 박시우가 나를 신기하게 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눈치 빠른 형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화제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밖에 날씨가 꽤 춥던데 몸도 녹일 겸 내가 따뜻한 거라도 만들어줘?”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박시우와 지호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열은…….”

    “없는데.”

    이럴 때 보면 쌍둥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죽이 척척 잘 맞는다니까.

    “그래서 먹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그 전에 하나만 묻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내게 박시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먹을 수 있는 건 맞지?”

    진짜, 죽일까?

    “못 미더우면 먹지 말든가.”

    “안 먹는다고는 안 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 때는 언제고, 박시우는 재료가 든 보자기를 들고 나가는 내 뒤를 졸졸 따라 나왔다.

    “나는 먹을래! 누나.”

    지호는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란히 나와 발맞추어 부엌으로 들어왔다.

    “내가 도와줄 건 없어?”

    나에게 부엌을 맡기는 게 불안한지 지호가 내 곁을 떠나지 못했다.

    “너는 누나만 믿고 저기 가서 앉아 있어.”

    태어나 처음으로 먹는 것을 만들어서 나쁘지 않다는 평을 받은 나의 자신감은 밀물처럼 차올라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필요하면 불러줘. 알았지?”

    “그럴 일 없다니까. 연습도 해봤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앉아.”

    내게 못 이긴 지호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이미 자리를 잡고 앉은 박시우의 옆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메뉴가 뭔데?”

    “쑥 라테.”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웠대?”

    “너튜브.”

    내가 부엌에 서는 일이 흔하지 않으니 박시우는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았다.

    조금 정신 사납긴 했지만, 난 일단 우유를 주전자에 부어 인덕션에 올린 뒤 차근차근 보자기에 있는 재료를 꺼냈다.

    레시피가 어떻게 됐더라?

    레시피를 확인하기 귀찮았던 나는 해령에게 쑥 라테를 만들어줬던 기억을 되짚으며 눈대중으로 잔에 재료를 넣었다.

    이제 주전자가 끓는 대로 우유를 부어주기만 하면 됐다.

    한 번 해봤다고 몸이 쑥 라테 만드는 법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여러 경험을 해봐야 해.

    어쩌면 바리스타에 재능이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돈돈, 생각보다 빨리 기자들이 잠잠해질 것 같던데? 너도 이미 들었지?”

    “뭘 들어?”

    쑥 라테가 완성되길 기다리는 게 지루한지 손끝으로 식탁을 두드리던 박시우가 그새를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이걸 몰라? 허구한 날 X플릭스만 보니까 그런 거 아니야.”

    “듣고 별것 아니면 너는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모르고 살아가게 될 거야.”

    영면에 들게 해주겠다는 협박에 박시우가 조용히 꼬리를 내렸다.

    “오늘 EX급 히든 필드가 열렸어.”

    잔에 뜨거운 우유를 붓던 내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에이……. 아니겠지.

    나는 아무한테도 EX급 온천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는걸.

    무엇보다 둘은 내가 각성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게 확실하다.

    “처음에는 메마른 온천이었는데 온천수가 터지면서 EX급 온천이 되더라고.”

    그런데 저걸 대체 박시우가 어떻게 알아?

    박시우는 히든 필드가 EX급 온천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어떻게 모르겠냐? 하루 종일 시스템창에 실시간으로 쫙 깔렸는데. 그것 때문에 바깥에 기자들 수도 절반은 줄어들었잖아.”

    박시우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길드가 46층에 들어가기 위해 전전하고 있을 때, 헌터 시스템창에 전체 알림이 떴다고 했다.

    [각성자 ‘메마른 온천 사장’이 ‘메마른 온천의 마스터키’를 획득합니다.]

    [히든 필드 ‘메마른 온천(EX)’이 개방됩니다.]

    전체창으로 각성을 알리는 것도, 히든 필드가 열리는 것도, EX급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처음이라 채팅창이 종일 그 이야기로 떠들썩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정체불명의 EX급 각성자 때문에 다들 난리야.”

    잠깐만, 뭐?

    “지금 EX급 각성자라고 했어?”

    “그래! 누군지는 몰라도 괴물 같은 신입이라니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일 빨리 찾아내서 집필로 영입시키고 만다.”

    기대감에 들뜬 박시우를 보는 나의 얼굴이 황당함에 일그러졌다.

    내가 그 온천 사장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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