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달 목욕 성좌들이 나타났다
내가 도착한 곳은 진짜 온천이었다.
안개가 자욱해서 주변이 잘 보이진 않았는데, 아마도 인적이 드문 산속 같았다.
으스스한 감이 없진 않지만, 진짜 온천이 있긴 하잖아?
난 꽤 규모가 큰 건물의 낡은 팻말에 쓰인 ‘온천장’이라는 글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의심을 거둬들였다.
“온천 사장으로 각성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네.”
“당연하지! 이 몸은 결코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짹짹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래쪽에서 들리는 것 같은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낮추니 웬 은색 털을 가진 조그만 병아리가 푸른색 달걀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누가 병아리를 이런 외진 곳에 버려둔 거야? 매정하기도 하지. 이곳에 두면 산짐승들 밥이 되기 딱 좋을 텐데.”
가여운 마음에 털을 쓸어주려는 찰나, 병아리가 펄쩍 날뛰며 내 손을 철썩 소리 나게 쳐냈다.
“듣자 듣자 하니까 누가 병아리라는 거냐? 내가 한낱 미물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고 했거늘!”
다른 건 몰라도 성질 나쁜 병아리라는 건 알겠다. 근데…….
“병아리가 말을 하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은데.
“이 몸은 병아리가 아니라 위대한 영계 님이시라고!”
영계라면 내게 황금 열쇠를 줬던 용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병아리가 방금 물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하늘을 날아다니던 은빛 용이라고?
나는 자신이 용이라고 주장하는 병아리를 유심히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병아리 같은데…….
“그럼 손에 든 달걀은 뭔데? 아니다, 네 입장에서는 알이라고 하는 게 맞나?”
“무엄하다! 감히 내가 수천 년을 수련해서 얻은 여의주를 보고 달걀이라니!”
영롱한 빛깔을 보니 확실히 보통 달걀은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먹진 못하겠네.”
“당연하지!”
병아리가 아니, 병아리가 된 영계가 불만스럽게 짹짹거렸다.
먹지도 못하는 달걀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식었다.
“난 또 워낙 소중하게 들고 있길래 비상식량인 줄 알았지.”
여의주가 밥 먹여주는 건 아니잖아.
“샤레니안 성좌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머릿속에 온통 먹을 생각밖에 없는 이 녀석을 후계자로 꼽으신 거지?”
영계가 나를 의문스럽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뭔가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역시나 내 관심 밖이었다.
“배고파 죽겠네, 일단 안에 들어가서 뭐 좀 시켜 먹고 이야기하자.”
각성도 먹고살려고 하는 짓인데 이대로면 각성하기도 전에 배가 등가죽에 붙어 죽을 것 같았다.
“온천 문은 이 열쇠로 따면 되는 거지?”
난 미리 받았던 온천 마스터키를 꺼내 들었다.
“잠깐! 그전에 일단 설명을 좀…….”
한국인이라면 튜토리얼은 스킵 하는 게 진리지.
영계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나는 마스터키를 온천 문의 열쇠 구멍에 꽂아 넣었다.
[‘온천 마스터키’의 정보를 읽어 들입니다.]
[히든 필드 ‘메마른 온천(EX)’이 개방됩니다.]
철컥.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동시에 온천의 입구가 열렸다는 것을 알리는 창이 떠올랐다.
나는 손으로 두 눈을 비벼 재차 창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다시 봐도 온천은 EX급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진짜 온천이 EX급이라고?
순식간에 지나가서 잘못 본 게 아닌가 했는데…… 아니었잖아.
세계 1위 헌터도 S급인데 EX급이 있다는 건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었다.
게다가 난 S급도 아니고 F급 각성자라면서. 격차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영계야, 이거 아무리 봐도 밸런스를 다시 맞춰야 할 것 같은데. 온천 사장이 F급인데 온천이 어떻게 EX급이 될 수 있어?”
난 이참에 영계를 잘 설득해서 등급을 조금이라도 올려볼 생각이었다.
“그야 이 온천은 특별한 분들의 휴식 공간이니까 EX급 정도는 되어줘야지.”
“특별한 분들?”
내 의문이 채 다 풀리기도 전이었다.
[온천이 열렸다는 소식에 피로에 지친 성좌들이 열광하며 파도처럼 몰려옵니다.]
이건 또 뭐야?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온천이 열렸다는 소식에 “온천 할아범이 돌아온 거냐”며 반갑게 달려옵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명부를 펼치며 “온천 할아범은 일찍이 죽음의 강을 건넜다”고 말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럼 지금 온천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영계가 새로 영입한 후계자”라고 설명합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온천만 다시 열 수 있다면 사장은 누구든 상관없다”라고 말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오랫동안 온천욕을 못 했더니 삭신이 쑤신다”며 앓는 소리를 냅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후계자의 사주를 보며 “손재주가 나쁘니 먹는 것만 조심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합니다.]
성좌가 사주도 봐?
와중에도 정확한 사주 풀이에 나는 내심 놀랐다.
내가 유명한 똥손이긴 하지.
오죽하면 내가 끓인 라면을 먹은 사람들은 응급실을 면하지 못했을까.
박시우는 그날 이후로 내게 라면을 끓이라고 시키지 않았고, 지호는 내가 냄비를 들려고만 하면 먼저 나서서 라면을 끓이기를 자처했다.
나로서는 편하게 됐으니 좋은 일이지.
“그런데 성좌들이 왜 이렇게 많아? 보통 1인 1성좌가 국룰 아닌가?”
그들이 대화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 귀가 시끄러워지는 기분이 들어 눈살을 찌푸리자 영계가 설명을 이어갔다.
“네가 보고 있는 성좌님들이 바로 내가 말한 이 온천의 특별한 손님분들이다. 이 온천은 오로지 여기 네 성좌님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니까.”
성좌들만 이용하는 온천이라서 EX급이라는 건가?
히든 필드인 이유도 그거였어.
그 말은 손님도 넷이 전부라는 건데, 소수만 이용하는 온천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온천 사장이 꿈이었는데, 각성한 김에 잘 운영하면 내가 바라던 꽃길 힐링 라이프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땅값도 안 내도 되고, 멀쩡한 온천이 버젓이 내 손안에 떨어졌으니 복권 1등은 아니라도 꽤 괜찮은 수확이었다.
“그러니까 너랑 계약할 성좌님도 넷이라는 말이지.”
영계의 한마디에 홀로 조용히 온천에 앉아 노곤한 몸을 녹이는 행복한 상상이 와장창 깨졌다.
“이를 어쩌지. 난 성좌가 넷이나 필요 없는데.”
지금도 소란스러운데 넷이 종일 떠드는 걸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온천 후계자 투표를 실행합니다. 네 명의 성좌는 모두 눈을 감고 찬성/반대에 맞춰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아침이 밝았습니다. 찬성은 모두 고개를 들어주세요.]
[밤이 되었습니다. 반대는 모두 고개를 들어주세요.]
나,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내 의사와 상관없이 성좌들은 자기들끼리 투표를 진행했다.
[후계자 투표 결과 과반수의 찬성으로 ‘메마른 온천의 사장(F)’의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다들 미친 거 아니냐”며 발악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내 최초의 계약자는 반대를 찍었음이 틀림없었다.
날 무척 못마땅해하는 것 같은데 이걸 어쩌나?
이미 도장 쾅쾅 찍었으니 이 온천은 내 건데.
나는 투표 결과에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히든 스킬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가 열립니다.]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가 뭐야?
느낌표 아이콘을 누르니 흔히 목욕탕에서 판매하는 달 목욕 회원권 같은 것들이 기간별로 쭉 나왔다.
최대가 30일이네.
아무리 온천이 좋아도 누가 30일 내내 오겠어?
대충 목록을 훑어보고 흥미를 잃은 나는 얼마 안 가 창을 닫았다.
“다행히 대부분의 성좌님께서 네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넷씩이나 계약할 생각이 없다니…….”
흐뭇해하는 영계에게 달갑지 않다는 의사를 표현하려는 찰나였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에서 온천 30일 이용권을 구매했습니다. 이용권 비용 3,000만 골드를 획득합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에서 온천 30일 이용권을 구매했습니다. 이용권 비용 3,000만 골드를 획득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온천 이용권 판매 데스크’에서 온천 30일 이용권을 구매했습니다. 이용권 비용 3,000만 골드를 획득합니다.]
잠깐만, 30만 골드도 아니고 300만 골드도 아니고 3,000만 골드?
그것도 3,000만 골드가 세 번이니까 9,000만 골드.
1,000만 골드를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000만 원이니까 9,000만 골드면 9,000만 원?
돈 문제가 되니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개장하기도 전에 온천 이용권만으로 9,000만 원을 벌다니…….
온천수가 금으로 된 것도 아닐 텐데 덥석 천 단위 돈을 던져준다고?
이거 완전 큰손들이잖아?
곧바로 통장에 꽂히는 ‘0’의 개수를 손꼽아보던 나는 곧바로 온화하게 웃었다.
‘오늘도 저희 온천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들.’
[스킬 ‘자본주의 미소’를 획득하셨습니다. 보는 사람들의 소비 욕구가 증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