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X됐다
온천을 생각하며 잠들어서 그랬던 걸까?
그날 꿈에서는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온천이 나왔다.
와, 저기에 몸 담그고 땀 쭉 빼면 피로가 살살 녹을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서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른해지는 맑은 온천에 당장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허공에 떠올라 있는 내 몸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내 꿈속인데 여기서도 내 멋대로 못한다고?
그건 내가 못 참지!
꿈에서라도 온천욕을 즐기겠다는 의지에 불타오른 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바둥거렸다.
순간, 물로 된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며 보석처럼 빛나는 비늘을 가진 커다란 은빛 용이 나타났다.
“용이다…….”
진짜 용이 나타났어.
나는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이 스물셋에 처음으로 꾸는 용꿈이었다.
용꿈이면 완전 대박 꿈 아니야?
복권이라도 사야 하나?
얼떨떨해하던 나는 얼마 안 가 마음을 다잡았다.
고민할 일도 아니잖아.
무려 용꿈인데!
꿈에서 깨면 당장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X또를 사는 거야.
혼자 행복 회로를 돌리던 나는 후광이 비치는 은색 용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근데 진짜 길몽이 되려면 용이 내 품 안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나?
왜 날 쳐다만 보고 있는 거지?
아무래도 낯을 많이 가리는 용인 것 같았다.
“자, 이리 와 안기렴!”
난 수줍음 많은 용을 위해 먼저 나서서 두 팔을 힘껏 양옆으로 펼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용은 파도처럼 힘차게 몸을 움직여 내게로 다가왔다.
옳지! 착하다.
난 첫걸음마를 연습하는 아이를 달래듯이 용을 향해 손짓했다.
스스럼없이 거리를 좁혀오기에 그대로 곧장 내게 안길 줄 알았는데, 용이 바로 내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 나랑 밀당 하자는 건가?
남자 친구와도 해본 적 없는 밀당을 용과 하고 있다니.
살짝 현타가 오긴 했지만,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남자 친구보다 내게 일확천금을 안겨줄 용이 먼저였다.
어떻게 하면 용을 꼬셔서 안아볼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 찰나, 갑자기 용이 내게 말을 걸었다.
“자네, 우리 온천의 주인이 되어주지 않겠나?”
용이 말을 해?
용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는 바람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주인이 되고 싶다면 이 열쇠를 받아라!”
계속해서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용은 품속에서 황금 열쇠를 꺼내 들었다.
황금 열쇠라니! 이것도 못 참지!
황금 열쇠를 덥석 안겨주는 걸 보면 이건 분명 일등이다!
복권 일등 당첨되면 뭐부터 하지?
일단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는 내 집부터 마련하고…… 어디든 왕래할 수 있게 차도 한 대 뽑는 거야.
그다음에는 한적한 곳에 온천을 차리고 조용히 평온한 삶을 즐기는 거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처럼 기자들에게 쫓겨서 밥줄 끊기는 일도 사라지겠지.
……그래, 보고만 있을 때가 아니야.
일단 황금 열쇠를 잡는 게 먼저다.
꿈에서 깨기 전에 복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황금 열쇠를 덥석 손에 쥐는 그 순간.
황금 열쇠에서 환한 빛이 나더니 못 보던 창들이 연속으로 떠올랐다.
[가이드 ‘영계’에게서 ‘온천 마스터키’를 획득했습니다.]
[‘온천 마스터키’를 획득했으므로 자동으로 성좌 ‘온천의 지배자’와의 계약이 체결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화들짝 놀라며 ‘온천 마스터키’를 찾습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영계’를 백숙으로 만들어버리겠다며 분노합니다.]
이게 다 뭐야?
[‘메마른 온천의 사장(F)’으로 각성합니다.]
이거 복권 당첨되는 꿈 아니었어?
가이드에 성좌까지 나타나다니.
혹시 진짜 내가 각성이라도 한 거라면?
창을 바라보며 잠시 심각해졌지만, 이윽고 밀려오는 불안감을 손으로 내저어 쫓아내며 웃어넘겼다.
백번 양보해서 내가 진짜 각성했다고 쳐.
그런데 내가 F급인 것도 모자라서, 다른 것도 아니고 온천의 사장으로 각성한다고?
살면서 온천 사장이라는 직업을 가진 각성자는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즉, 이건 온천 사장이 돼서 편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은 내 간절함이 만들어낸 꿈이라는 거지.
근래에 기자들한테 여간 시달렸던 게 아니니 이런 꿈을 꾸는 것도 이해가 갔다.
“꿈이 꼭 현실처럼 실감이 나네. 시대가 바뀌니까 꿈도 같이 발전하나 봐. 그렇지? 용아.”
“난 그냥 용이 아니다.”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용이 심술궂은 얼굴을 했다.
“네가 용이 아니면 뭔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이름도 위대한 영계 님이시지.”
자신감에 찬 얼굴로 고개를 추켜세운 용이 당당하게 콧김을 뿜어냈다.
“영계? 영계백숙 할 때 그 영계?”
꿈인데도 백숙의 새하얗고 통통한 자태가 떠올라 입에 침이 고였다.
영계백숙 맛있지.
뽀얀 국물 위에 살점을 큼직하게 뜯어 숟가락에 올리고 한입에 넣으면…… 크!
먹을 걸 생각하니까 배가 급속도로 출출해지는 것 같았다.
슬슬 몸보신할 계절이긴 해?
돈가스는 자주 먹으니까 다음을 기약하고, 오늘 점심은 영계백숙 고?
꿈에서도 배가 고픈 게 느껴지는 걸 보니 빨리 잠에서 깨어나 점심을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용이 크게 화를 냈다.
“영계백숙이라니! 날 그런 한낱 미물과 비교하다니! 잘 들어라! 이 몸은 밝을 영(瑩), 빛날 계(暩)를 써서 밝게 빛난다는 뜻의 영계지. 어린 닭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예, 용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받은 건 다 받은 것 같으니까 전 이만 꿈에서 깨보겠습니다.”
용의 이름 따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손에 들린 황금 열쇠를 바라봤다.
영롱한 빛깔이 일렁이는 것이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꿈은 현실감 넘칠수록 길몽이라잖아.
큰돈을 거머쥘 생각에 나는 황금 열쇠를 움켜쥐고 숨죽여 웃었다.
이제 일어나자! 배고파서 더는 못 자겠어.
굶주림에 지친 나는 무작정 오른손을 들어 인정사정없이 뺨을 쳤다.
꿈이니 당연히 아프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는데.
“악! @#$%! 아파!”
젠장! 뺨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얼얼하게 아팠다.
미처 내뱉지 못한 갖가지 비속어들이 입안을 맴돌았다.
“꿈인데 왜 이렇게 아파?”
“왜 아프겠냐?”
부은 뺨을 감싼 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씩씩거리는 나를 영계가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왜 아픈데?”
“현실이니까 그렇지. 내가 너를 찾았을 때는 이미 잠들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꿈의 장면을 빌리긴 했지만.”
이게 내 꿈을 빌린 현실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진짜 각성이라도 했다는 말이야? 그것도 온천 사장으로?”
“그래. 맞다.”
꿈이라기에는 너무나 찰진 고통에 나는 지금까지 일련의 일들이 정말로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아니, 누구 마음대로 계약을 맺어? 성좌라고 막 강제로 계약 성사시키면서 갑질하고 그래도 되는 거야? 내가 언제 계약한다고 한 적 있어? 내 동의를 구하지 않았으니까 다 무효야! 무효!”
각성한다는 건 좋든 싫든 헌터의 길에 들어선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온천 사장이 직업이라니 허무맹랑하잖아.
생각해보니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성좌 중에서도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이들이 있다고.
내 꿈을 이용해 잘 구슬려서 계약을 맺은 뒤 나중에 딴소리할지도 모른다.
“이제 말을 바꿔도 소용없다. 분명 난 처음부터 네 의사를 물었다. 온천의 주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냐고 말이다.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온천의 마스터키를 받아든 건 네 의지였고.”
영계는 전혀 계약을 물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용이 뭐라고 말을 하긴 했었는데…….
다만, 내가 황금 열쇠와 일확천금의 꿈에 눈이 멀어서 전혀 듣지를 못했다.
“게다가 진짜 강제로 계약을 맺은 건 다른 쪽이고…….”
“뭐라고?”
혼잣말처럼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영계가 모르는 척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니다. 어쨌든 이미 맺은 계약을 되돌릴 수는 없다.”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제발 누가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해줘!
그저 악몽일 뿐이라고 말해달라고!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보여주도록 하지. 온천 사장이 되면 앞으로 눈코 뜰 새가 없이 바빠질 테니까.”
영계가 내가 쥔 황금 열쇠를 날카로운 손톱으로 툭 건드렸다.
[‘온천 마스터키’를 사용합니다.]
[잠시 뒤, ‘메마른 온천(EX)’으로 가는 포털로 강제 이동됩니다. 남은 시간: 5초]
“이렇게 갑자기 간다고? 이 상태로?”
잠을 자는 중이었던 나는 수면 잠옷 차림에, 몰골은 자연인이었다.
“난 먼저 가 있도록 하지.”
영계는 얄밉게도 기다란 꼬리를 살랑이며 포털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시간 : 4초]
취소 버튼, 취소 버튼을 찾자.
[남은 시간 : 3초]
아무리 그래도 창에 취소 버튼 하나쯤은 있겠지.
[남은 시간 : 2초]
빠르게 눈을 굴려봤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속절 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확인 버튼뿐이었다.
[남은 시간 : 1초]
[남은 시간 : 0초]
X됐다.
[히든 필드 ‘메마른 온천(EX)’으로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