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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111화 (111/112)

〈 111화 〉 폭풍을 부르는 영광의 요구르트 로드 (2)

* * *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팔짱을 꼈다. 루리 이 녀석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요구르트 한 병에 고작 백 원 하는 거 가지고 인색하게 굴고 싶지는 않은데, 미련 곰탱이처럼 쓰러질 정도로 퍼먹으면 어떡해?

안쓰럽게 쳐다보던 게 떠올라 마음이 약해지지만 그래도 굳게 다잡아야지.

“2팀장님, 집에 뭐 근심거리 있어요?”

운영팀장이 실실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멍한 정신으로 휘적휘적 걷더라니 어느새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그것도 2팀이 아닌 운영팀 사무실에.

내가 왜 여기로 왔지?

야밤에 루리 때문에 집안 식구들 전부 비상사태가 걸려서 잠을 못 잤다. 2시간밖에 못 잤더니 머리가 잘 돌아가질 않는다.

“어이구, 해 뜬지 한참인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시네. 탕비실 커피인데 이거라도 드세요. 팀장님이 매니저 하기 전에는 바리스타여서 마음에 들게 탔으려나 모르겠네.”

“커피가 다 같은 커피죠.”

운영팀장에게 커피를 받아 홀짝였다. 안 돌아가던 머리에 산소가 톡톡 뛰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아, 이제야 기억났다.

한유정이 들어갈 던전 알아보려고 찾아왔었다.

“던전 건 때문에 왔어요. 요즘 공략대 짜고 있는 투자사라도 있나 해서. 회사로 투자 제안서나 캐스팅 들어온 거 없어요?”

“한유정이죠?”

내가 맡은 헌터가 한유정 한 명뿐이라 운영팀장도 척하면 척이다.

“네, 없으면 프로필이라도 돌려야 하는 처지라.”

“아니, 뭐, 지금 몇 개 있긴 한데….”

그가 떨떠름히 말했다.

“2차 공략대는 어쩌시고요? 2팀장님 지금 그거 처리하고 있지 않았어요? 갑자기 대표님도 이젠 신경 쓰지 말라 하고, 무슨 일이 있었나?”

아직 협회 고문 건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이지아 놀라게 해주려고 한 건데 타이밍이 뭔가 자꾸 엇나간다.

내일 중으로는 말해줘야지.

어쨌든,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유정이 건부터…….”

말을 하려던 때였다.

문득 운영팀장 자리에 세워진 파티션쪽으로 눈길이 갔다. 사진이 하나 걸려있었다. 루리랑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다.

“아이 키우세요?”

운영팀장이 징그럽게 웃는다.

“7살입니다. 귀엽죠?”

귀엽긴 하다만.

뒤에 숨겨진 고생을 나는 이제 알 것만 같았다.

“저도 7살짜리 조카 잠깐 맡아서 키우고 있는데. 고생이 장난 아니더라고요. 어제 요구르트 먹다가 야밤에 응급실 갔다 왔어요.”

“네? 요구르트 때문에 응급실을요? 뭐 얼마나 먹었길래.”

말문을 트니까 운영팀장이 신나서 아예 자리에 눌러앉는다. 하긴, 카페 사장도 육아 얘기만 하면 신났었지. 딸이 이제 고등학생 올라가는 나이인데도.

집에서 애 키우는 남자들 공통점인가보다.

“요구르트 전문 분리 수거통을 하나 만들 정도로요. 유산균 너무 먹었다가 쓰러져서 오늘 나올 때 으름장 놨어요. 집에 가서 요구르트 개수 확인할 거니까 먹지 말라고.”

“아.”

운영팀장이 안타까운 얼굴을 한다.

“그, 하은이랑 동갑이랬죠?”

“하은이요?”

그게 누구지?

“우리 애 이름입니다. 2팀장님 조카도 일곱 살 맞죠?”

“네.”

“하이고. 팀장님, 미운 네 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 모르세요?”

“한국에 그런 살벌한 말도 있었어요?”

“이건 전 세계 공통이에요. 아장아장 걸으면 한대 쥐어박고 싶어지고, 머리 굴리기 시작하면 도저히 못 말리거든요. 애들 집념이 생각보다 엄청 강해요.”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을 아직 제대로 못 겪으셨네’, 탄식을 내뱉은 그가 혀를 쯧쯧 찬다.

“그거 말로 한다고 절대 안 들을 텐데.”

*

루리가 김현우에게 배운 게 하나 있었다.

‘포복 전진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땅바닥을 기는 거야.’

게이트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루리는 바닥을 기었다. 김현우가 어떻게 했더라. 몬스터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은엄폐를 철저히 했었다.

테이블 밑에 숨은 루리가 팔꿈치로 바닥을 쓸며 목적지로 향했다. 걸을 때는 금방이던 거리가 천릿길처럼 멀었다.

의자 다리와 팔꿈치를 부딪치고, 무릎을 싱크대에 박았지만, 루리는 묵묵히 고통을 참으며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격한 운동으로 아동복이 땀에 흠뻑 젖었을 때.

드디어 냉장고 앞에 도착했다.

루리가 조심조심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하얀 연기와 함께 찬 기운이 얼굴을 은은하게 밀려왔다.

루리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팔을 뻗었다. 요구르트가 저 위에 있었다.

손이 닿지 않았다.

“끙!”

루리가 제 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아슬아슬하게 요구르트에는 닿지 못했다.

“칫, 운이 없군.”

콩.

루리가 다시 폴짝 뛰었다.

손끝이 요구르트를 스쳤다.

콩.

루리가 폴짝 뛰었다.

손끝에 닿은 요구르트가 냉장고 벽에 튕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활짝 웃음을 지으며 주우려던 때였다.

붕 뜬 몸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루리가 고갤 돌렸다.

한유정이 루리의 옆구리를 잡은 채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루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갑자기 김치가 먹고 싶어져서….”

“아저씨가 말씀하셨잖아. 당분간은 요구르트 먹으면 안 돼.”

“으, 응.”

*

사각, 사각.

노트를 끄적이는 연필 소리.

받아쓰기 연습장이 시꺼먼 글자로 빼곡했다. 루리가 한 획, 한 획 정성 들여 쓰다가 힐끔 책상 위에 쌓인 노트를 바라봤다.

어린이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어휘 사전, 알파벳 깜지 노트, 덧셈 뺄셈 문제집, 받아쓰기 연습장 등.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한유정의 교육열이 높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어휘 사전과 받아쓰기는 김현우가 시킨 거고, 알파벳 깜지 노트와 덧셈 뺄셈은 이젠 거의 다 뗐다.

아직 곱셈과 나눗셈이 남았지만, 일단 현재는 김현우가 시킨 것만 붙잡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따로 교육을 받은 적이 전무해서 배울 게 많았다.

덧셈 뺄셈 문제집에서 80점을 넘기면 요구르트 하나가 나왔다. 받아쓰기나 어휘 사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젠 요구르트를 안 준단다.

명백히 계약 위반이었다.

“…!!!”

루리가 받아쓰기 연습을 하다가 연필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아잇, 할 맛이 전혀 안 나잖아! 80점 넘기면 뭐 해! 요구르트도 안 주는데!”

루리가 깍지낀 손을 뒤통수에 대며 벌러덩 바닥에 드러누웠다. 방안에는 한유정의 포근한 냄새가 났다. 실상 루리의 방은 비워둔 채로 한유정의 방에서 둘이 함께 생활했다.

그런데 한유정이 왜 안 보이냐면은, 그녀는 루리에게 공부를 시켜놓고 지하 훈련장에 내려가 있었다.

그렇다고 몰래 꺼내먹지도 못했다. 벌써 열 번도 넘게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오는 건지, 냉장고 근처에만 가면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서 루리를 막아섰다.

거기까지 생각에 미친 루리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레 한유정의 서랍을 뒤졌다.

삑삑!

핸드폰의 잠금을 푼 루리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김현우에게 통화를 걸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대꾸했다.

­유정아, 무슨 일이야?

“아빠, 나 루리인데.”

­루리? 네가 유정이 핸드폰은 왜….

“잠깐 엄마 몰래 통화하는 거야. 끊지 말고 들어야 해.”

김현우가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유정이 핸드폰을 몰래 만지면 안 되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루리가 작은 등을 연신 굽신거리며 부탁했다.

“엄마한테 나 요구르트 하나만 주라고 말해주면 안 돼? 몰래 먹으려고 해도 자꾸 칼같이 끊어. 엄마가 아빠 말은 잘 듣잖아.”

­유정이가?

“응, 하나쯤은 괜찮잖아. 제발.”

­유정이가 시킨 대로 잘하고 있네. 이상한 생각 말고 먹지 마. 나 일해야 하니까 끊는다.

뚝!

김현우가 전화를 끊었다. 루리가 다급히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줌마]

몇 번의 수신음과 함께 전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네가 웬일로 전화했어?

“지아야! 나 루리인데.”

­서루리? 언니라고 불러야지. 현우는 아빠라고 부르면서 나는 왜 맨날 이름으로 불러? 현우랑 나랑 동갑이야. 전에 언니라고 부르기로 했잖아.

루리가 작은 등을 연신 굽신거렸다.

“언니라고 부를 테니까 아빠한테 나 요구르트 하나만 주라고 말해주면 안 될까? 아빠가 언니 말은 잘 듣잖아.”

수화기 너머로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음, 언니라고 부르는 게 혹하기는 하는데.

“하는데?”

­어제 나랑 손잡고 응급실 들어갔던 거 기억 안 나? 나도 현우랑 똑같은 생각이야. 당분간은 안돼.

“야, 이지아!”

뚝.

루리의 다급한 목소리를 무시하고 전화가 끊겼다. 루리가 다시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여보세요?

“예림아, 나 루리인데.”

­현우랑 지아가 안 된대.

뚝.

루리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림일기를 펼쳤다. 크레파스로 쓱쓱 종이를 덧칠했다. 어린아이 특유의 삐뚤삐뚤한 선이 색채를 입혀갔다.

일련의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루리의 동공에서는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 힘든 여명이 싹텄다.

성직자가 봤다면 성령이 깃들었다고 했을 것이고, 무당이 봤다면 귀에 씌었다고 했을 것이며, 주술사가 봤다면 영이 보듬어준다고 표현했을 터.

동서를 막론하고 각국의 전설에는 초월자들의 공통된 기적이 존재했다.

부활, 그리고 예언.

반푼이 기적이 크레파스 끝을 따라 현현했다.

* * *

어느 순간부터인가 방안의 기척이 잠잠해졌다.

한유정이 슬쩍 방문을 열었다.

루리가 책상에 엎어져 있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보니 깊은 잠에 빠진듯했다. 그녀는 잠든 아이가 깨지 않도록 기척을 지우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펼쳐진 받아쓰기 노트를 보니까 괜히 미안해졌다. 한유정이 루리의 덥수룩한 머리카락들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겨줬다.

잠들어있던 루리가 기분 좋은 듯 찡그린 인상을 느슨하게 풀었다. 한유정이 루리의 귀에다가 소곤거렸다.

“점심 먹어야지.”

“으햑!”

깜짝 놀란 루리가 펄쩍 뛰어올랐다.

“저, 점심? 벌써 점심이야?”

“응.”

“요구르트는?”

“안돼. 아저씨가 주지 말라고 하셨잖아.”

“진짜?”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루리가 축 늘어져서 공책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문득 한유정의 눈길이 그림 일기장으로 향했다. 그림일기 감독은 오직 김현우뿐이었고, 되도록 한유정은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주고 싶었지만, 시야에 들어온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적혀있는 내용에 그녀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자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사라졌다! 혼자 자기 무서워서 아빠 방에 갔는데 엄마가 잠든 아빠를 쳐다보고 있었다! 비밀이라 했다!]

한참 뒤.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거덕거리던 한유정이 외마디 한숨을 내뱉었다.

“……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 * *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을 아직 제대로 못 겪으셨네.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운영팀장의 말이 떠오른다. 피식 웃으며 핸들을 천천히 돌렸다.

한유정이 얼마나 꼼꼼한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열여덟짜리 소녀한테 아이 맡기면서 잘난척할 처지는 아니지만, 한유정의 아이 돌보는 실력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루리 성격이 워낙 독특해도 성질 하나 안 낸다.

귀찮을 만도 한데 생판 남인 아이를 씻겨주고, 밥 먹이고, 놀아주고, 숙제 검사하고, 이게 어디 보통 정성이야?

루리도 한유정한테는 꼼짝도 못 한다.

차고에 주차하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휘파람을 불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유정과 이마를 퍽 부딪쳤다.

“아, 아저씨.”

“유정아, 왜 그래? 이마 안 아파?”

“죄송해요. 저도 그렇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

“뭐? 무슨 소리야?”

한유정이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으아아. 종이 인형처럼 나풀나풀 끌려갔다. 그리고 거실에서 마주친 광경에 이마를 짚었다.

“아빠 왔어?”

밝은 인사에 도저히 마주 안아줄 수 없었다.

루리가 입에 물고 있던 요구르트를 휙 던졌다. 바닥에는 다 마신 병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 두 개, 세 개….

눈대중으로만 열 개가 넘는다.

이걸 혼자 다 마신 거야?

“유정아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한유정이 시선을 피한다.

“마, 말씀 못 드려요.”

“아니, 그래도 뭔 상황인지 말을 해줘야 내가…..”

“아저씨한테 말씀드릴 바에는 차라리 혀 깨물고 죽을래요. 정말 죄송해요.”

한유정이 바닥으로 푹 꺼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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