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폭풍을 부르는 영광의 요구르트 로드 (1)
* * *
박 변호사, 이재혁과의 회동이 끝났다.
집에 돌아온 나는 옷도 벗지 않고 곧바로 소파에 다이빙했다. 누운 채로 주섬주섬 코트랑 정장 자켓을 벗었다. 옷이 구겨졌지만 지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칙칙한 피로감이 확 밀려들어 왔다.
이번 일 끝나면 쉰다.
무조건 쉴 거다. 요즘 게임을 켠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영화나 드라마는 또 어떻고?
월정액 플랫폼만 두어 개는 결제해놓고 한 편을 못 봤다.
하다못해 로드 매니저라도 하나 더 뽑든가 해야지. 이러다가는 제 명에 못 살겠다. 그런데 누굴 뽑지? 로드로 웬 이상한 자식이 들어오면 유정이도 불편할 텐데. 예쁘다고 수작질 부리면 다리몽둥이를 그냥 확….
그래도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카페 알바 박지영이 떠올랐다.
한 번 전화해볼까. 걔도 슬슬 취업해야 하지 않나? 카페 알바만 지금 2년째인 거로 기억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땅이 쿵쿵 울렸다.
멀리서 루리가 팔을 활짝 벌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녀석이 발 구름을 뛰며 마구 재촉했다.
“아빠, 나 받아쓰기 80점 넘었으니까 요구르트! 빨리! 엄마가 먹어도 된대!”
“유정이가? 허락받은 거 맞아?”
루리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코앞에 확 내밀었다.
85점 맞았다.
늘어지게 누워있던 내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루리가 소파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재촉한다.
넘쳐나는 저 체력을 나한테 조금만 나눠주면 안 되나.
“기운도 참 넘친다.”
“일곱 살 애잖아!”
달려오던 루리의 머리가 내 손에 가로막혀 제자리에 멈췄다. 지친 안색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나 지금 너무 피곤한데. 조금 이따가 꺼내주면 안 되냐?”
루리가 버럭 소리쳤다.
“아잇, 그런 게 어딨어! 지금 먹을래!”
루리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는 이유는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다. 배워두면 루리한테도 좋긴 하다만, 미래 예시가 한 획 차이로 완전히 다른 뜻으로 변하지 않을까를 우려했다.
그러니까, 그에 따른 보상을 챙겨줄 의무가 당연히 있었다.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마시고 싶다는데 마시게 해줘야지. 한 병에 얼마나 한다고.
“그으래, 85점 받았으면 하나 마셔야지. 가자.”
루리에게 끌려가다시피 한 내가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꺼내줬다. 루리가 조심조심 껍질을 벗기더니 한 모금을 홀짝였다. 감동한 얼굴로 다시 두 모금을 홀짝.
그리고 크으, 시원한 탄성을 내뱉는다.
왜, 소주 CF에서 모델들이 술 한 잔 마시고 세상 청량한 얼굴로 해주는 그거.
“이 맛이지. 하루의 고단함이 싹 쓸려나가잖아. 여기에 고기 한 점만 있으면 딱인데.”
가래 끓는 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바이브가 느껴진다.
“너 그런 거 어디서 배웠…….”
“드라마에서 하던데.”
“이래서 TV가 사람 버린다니까. 다 마시면 깨끗하게 씻어서 분리 수거통에 넣어놔.”
“응!”
짧게 혀를 차며 소파로 돌아갈 때였다. 갑자기 루리가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녀석이 몸을 덜덜 떨며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끅…!”
“이번엔 전쟁 영화냐? 라이언 일병이라도 봤어?”
“끄윽, 아빠…!”
실실웃던 나는 무언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재빨리 루리를 품에 안아 들고서 안색부터 살폈다.
“서루리!”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루리의 뺨을 짝짝 가볍게 때렸다.
“루리야! 갑자기 왜 그래?”
“아, 아빠, 배가 너무 아파…!”
“잠깐만 있어 봐!”
젠장, 이럴 때는 어떡해야 하지?
당황한 내가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어디 애를 키워본 것도 아니고, 이게 지금 체한 건지 무슨 병이 도진 건지 모르겠다.
찬장을 열어 병들을 싹 다 꺼냈다.
이건 후시딘이고, 이건 고춧가루, 이건 설사약이고, 아니, 루리가 지금 어디 아픈 건지가 먼저 아닌가?
“끄윽…!”
루리의 떨림이 점점 심해진다. 약병을 찾던 내가 포기하고 119에 신고했다.
5분 뒤, 루리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
*
“간호사님, 루리 괜찮은 거죠?”
다급한 내 물음에 간호사가 고갤 끄덕였다.
“네, 주사 놨더니 이젠 멀쩡해졌어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조금 날씨가 쌀쌀한 게 느껴졌다. 루리 안아 들고 구급차에 태운다고 코트도 못 챙겨입었다. 그 와중에 얼굴 숨기겠다고 선글라스 끼고 있는 꼴을 보면, 정체가 퍽 의심스러워 보일 거다.
차가워진 팔뚝을 주무르며 물었다.
“대체 어디가 아픈 거예요?”
응급차에 실려 가면서도 식은땀을 질질 흘렸다. 바로 괜찮아졌다는 걸 보니까 맹장은 아닌 거 같고.
간헐적 증세를 보이는 병인가?
간호사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대답한다.
“유산균 과다 복용이요.”
“네?”
“혹시 집에 프로바이오틱스 드시는 분 계신가요?”
“아뇨, 다들 건강해서 굳이 챙겨 먹지는 않는데….”
한유정이나 이지아나.
비타민 같은 걸 굳이 챙겨 먹어야 하는 입장은 아니지.
나도 나름 각성자라 몸은 건강한 편이고.
“그럼 비타민 몰래 주워 먹은 건 아니고, 요구르트나 요플레 같은 유산균 제품을 너무 많이 챙겨주신 게 아닌가 싶네요.”
아.
요구르트. 유산균 과다 복용.
깨달은듯한 표정을 짓자 간호사가 참지 못하고 푸흑, 웃음을 터트린다.
“애가 검사받으면서도 요구르트를 달라고 칭얼거리더라고요. 심각한 건 아니니까 집에서 푹 쉬면 금방 나을 거예요. 당분간 요구르트는 자제해주세요. 그래도 상태 안 좋으면 병원 데려와서 다시 검사받아보시고요.”
“어, 네.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아뇨, 당직이라 졸렸었는데 저도 애 돌보느라 재밌었어요. 아기들 처음 키우면 복통 호소할 때 많이 헷갈리긴 해요.”
간호사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웃으며 지나갔다.
젠장.
귀가 뜨뜻미지근해졌다.
아닌 호들갑은 다 떨었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이지아의 손을 잡고 응급실에서 나온 루리가 날 보고 헤 웃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안심되면서도 기가 찬다. 허탈하게 마주 웃다가 정색했다. 루리가 불안한지 이지아의 뒤로 쏙 숨는다.
“현우야?”
“잠깐 나와봐.”
이지아가 냉큼 비켜선다. 성벽을 잃은 루리가 절망한 얼굴을 한다. 녀석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으갹!”
“야! 요구르트를 무슨 쓰러질 때까지 먹고 있어!!”
* * *
다음날.
식탁에 앉은 루리가 밥을 물에 말았다.
김현우와 한유정은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 시끄러웠다.
김현우나 한유정이나,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다.
발끝을 꼼지락거리던 한유정이 김현우의 옷차림을 살폈다.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를 입었다. 목에는 덜 묶인 넥타이가 걸려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토요일인데 오늘도 출근하세요?”
“응, 요즘 주말이 없네. 2차 공략대 건으로 너무 바빠서.”
협회에서 2차 공략대로 이지아를 지명했다. 우울증을 가진 이지아에게는 죽으라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던전에도 들어가지 못하는데 정상적인 공략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한유정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불편한 감정은 애써 묻어두며 물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김현우가 웃었다.
“야, 어른들끼리 싸우는 데 네가 뭘 도와. 훈련이나 열심히 하고 있어. 맡은 일 끝나면 던전 들어갈 준비해야 하니까. 내가 꼭 돈 많이 벌게 해줄게. 아, 밥 먹고 뒷정리만 해줘.”
“네.”
삐빅!
김현우의 핸드폰이 알람으로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거울을 찾으며 넥타이와 씨름했다.
“젠장, 예림이네 아줌마가 보내준 거라 쓰긴 하는데, 아저씨가 쓰던 걸 주셔서… 액막이를 뭘 이런 거로 쓴데?”
한유정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줌마는요?”
“예림이랑 먼저 회사 출근했지. 나도 바쁜데 걔네는 어지간하려고.”
“아저씨, 넥타이──”
“어우, 겨우 됐네.”
김현우가 시계를 착용하며 루리와 눈을 마주쳤다. 딱딱한 시선을 느낀 루리가 숟가락을 입에 넣던 자세 그대로 굳어서 가만히 멈춰 섰다.
“요즘 요구르트 너무 많이 마시더라. 어제 배탈 나서 야밤에 응급실 갔었지?”
“…….”
“유정이한테 오늘은 주지 말라고 말해놨으니까 당분간은 마시지 마. 달라고 떼쓰지도 말고.”
“!”
루리가 충격받은 얼굴로 김현우를 바라봤다.
“지, 진짜…?”
“당연하지. 나 농담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우리가 거래할 때는 분명 요구르트 마음껏 먹게 해 준다고 했잖아. 아빠네 집에 가면 요구르트 배터지게 먹게 해준다면서!”
“그거야 유산균 과다 복용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가기 전의 일이고. 갔다 와서 요구르트 숫자 확인해볼 거야. 몰래 먹을 생각 마.”
김현우가 외투를 걸치며 나갔다.
잠시 뒤.
끼익!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물에 밥을 말아 먹던 루리가 숟가락을 내려놨다. 후식으로 요구르트를 못 먹는데 지금 먹는 밥이 무슨 소용일까.
비 맞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린 루리가 한유정을 쳐다봤다.
어린아이란 본능적으로 먹이사슬을 알아보는 법이다.
김현우가 유독 한유정에게 약한걸 루리는 알고 있었다.
희망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엄마, 나 요구르트….”
한유정이 단호히 대답했다.
“안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