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나의 아저씨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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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유정과 만났을 때부터 유독 눈길이 많이 갔다. 내 모가지 노리고 찾아온 암살자에게 무슨 정을 붙이겠냐마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붙었다.
백화점 데려가서 옷 사주고, 달라지도 않은 용돈 챙겨주고, 생각날 때마다 디저트 가게에서 케이크 사다 주고.
남들이 보면 뭐, 봉 하나 잡힌 수준이었을 거다.
나나 한예림이나 어린애들한테는 좀 약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나 그 나이대 애들한테는.
10년 전 열여섯, 하반기가 끝나가고 겨울 방학을 앞둔 중3.
그러니까 딱 첫 만남의 한유정과 비슷한 나이대였다.
수업 중간에 레드 게이트가 열렸다.
스물여섯이 된 지금도 다섯 살 정도만 더 먹었으면 하고 투덜거린다.
나이가 어리단 게 천추의 한처럼 남아 있었다. 사회에서는 30대가 돼서야 이제 갓 기저귀를 벗은 성인 취급이고, 그 절반밖에 안 되는 열여섯 애새끼는 말할 가치도 없었다.
나였어도 중학생이 게이트 열렸다고 말하면 장난인 줄 알고 넘어갔을 거다. 나이에는 무게가 따른다. 그렇기에 중학생의 말은 한없이 가볍다.
한국은 던전 관리가 철두철미한 나라다.
그냥 모든 조건이 좋았다.
좁은 땅덩어리에 인구는 5천만 명이 구겨 넣어져 있었고,
이웃 국가가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이라는 미쳐버린 현실 덕분에 워슈트 개발에 매년 천문학적인 투자를 유지했다.
치안이 좋아 각성자들이 범죄에 빠지지 않는 것도 큰 몫 했다.
각성자가 능력을 활용하여 돈을 합법적으로 버는 방법은 헌터뿐이었고, 자연스레 헌터들의 숫자와 길드들의 경쟁이 늘어났다.
그런 만큼 던전 관리는 수월했다.
던전 하나 뜨면 견적 짜고 투자자 모아서 공략대 규모 키운다. 마석 분배는 대부분 투자자에게 돌아가지만 헌터들 수중에 떨어지는 돈도 만만치 않았다.
자본에 대한 사람들의 욕심이 던전을 경쟁적으로 처리하게 만들었다. 게이트란 대부분 해결하지 못한 던전 브레이크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러니까, 원래는 레드 게이트가 열리면 안 됐다.
그런데 열렸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애새끼의 대피 명령은 짓궂은 장난으로 치부됐다. 그리고 그 결과야 뻔했다.
씨발,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었다.
괴물들이 이빨에서 침을 뚝뚝 흘리며 학교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1층에서 막 도망쳐온 1학년들은 피투성이지, 학교는 비명으로 꺅꺅 시끄럽지, 700명이 뛰는 발걸음에 바닥은 지진 난 거처럼 울리지.
아비규환이란 말이 이럴 때를 위해 만들어진 말이구나, 싶었다.
사람이란 게 치사한 구석이 있다. 남들 하는 거 따라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잘못됐을 때 먼저 나선 사람 탓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서 좀처럼 앞에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용감한 누군가가 뒤에서 쫓아오는 괴물을 피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 뒤를 700명이 쫓아갔다.
막연하게 남들 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며 다 옥상으로 뛰어간 거다. 자기 목숨줄 걸린 상황에서.
그나마 먼저 상황을 인지하고 한차례 흥분이 가신 건지, 어릴 때부터 떡잎이 남다른 건지는 모르겠다.
나와 한예림을 지나쳐 옥상으로 뛰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었다.
아, 저거 분명 다 죽을 텐데.
한예림의 손을 잡고 강당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걔도 조금 만만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빠르게 결정을 내린 우리는 창문을 열었다.
한예림이 먼저 벽을 타고 강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도 뒤따라 창문을 넘으려는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몇 명 정도는 데리고 갈 수 있지 않을까?
경훈이 그 새끼 학교 끝나면 나랑 맨날 피시방 가서 1:1 헌터 떴었는데. 아현이한테 빌린 베르세르크, 아직 못 돌려줬다.
그런데 저기서 언제 찾고 있지? 걔네 데리고 가다가 다른 사람들이 쫓아오면 굳이 강당으로 가는 의미가,
어쩌고저쩌고.
마음속으로 저울질하다가 창문을 닫아버렸다.
생존자는 두 명뿐이었다.
그래서 나랑 한예림은 그 나이대 애들한테 조금 약하다.
“……입맛 없니?”
“네? 아, 아뇨. 맛있어요.”
회전 초밥을 먹는데 웬일로 한유정의 젓가락질이 시원찮다. 맨날 돈 없이 굶고 다녀서 뭘 사주든 간에 맛있게 먹는 애였다.
그런데 지금은 살짝 거북한 표정으로 꾸역꾸역 넣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얼굴도 하얗게 뜬 거 같고. 초밥으로 향하는 젓가락도 느릿느릿하고. 10분이 지났는데 접시는 다섯 개밖에 안 쌓였다.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
“아뇨, 저 진짜 배고팠어요.”
퍽이나.
“얼굴부터 보고 말해라. 너 지금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야. 그만 일어나, 계산하게.”
이렇게 깨작깨작 먹는 건 처음 봐서 여러모로 신선했다. 점심때 오뎅꼬치 하나만 딸랑 먹고 있길래 오랜만에 데리고 나온 건데, 내가 실수했나 보다. 이건 그냥 식고문이랑 다름없다.
코트를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18시 17분.
겨울이라 그런지 벌써 어두컴컴했다.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이 빠른 발걸음으로 지하철에 들어간다. 퇴근하나 보다.
그걸 멍하니 쳐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내가 지금 회사에서 해야 할게 뭐 남았었지?
일 끝났다고 한예림한테 말해야 하고, 한유정한테 위임장 받아서 후견인 변경 신청해야 한다.
전화로 해결하면 되고, 법원 문 닫았고.
당장 안 해도 되거나 지금은 못 하는 일들이다.
전화로만 일 끝났다고 설명하고 나머지는 내일 하자.
“유정아, 회사에 뭐 놓고 온 물건 있어?”
곰곰이 생각하던 한유정이 답했다.
“없어요.”
“그래? 그럼 바로 집에 돌아가자.”
“괜찮으세요?”
“뭐가.”
“퇴근을 저희 마음대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팀장인데 뭐 어때? 어차피 퇴근 시간 지났어. 가자.”
우린 깍두기다.
회사의 주력은 송 팀장의 1팀. 아직 헌터는 없었지만 계획 자체가 그랬다. 빨리 유정이가 쑥쑥 자라서 나 먹여 살려야 한다. 그래야 깍두기 신세도 벗어나고 하지.
먼저 앞서 걸어가는데 한유정이 냉큼 옆에 착 달라붙었다. 어느 정도로 가깝냐면, 팔짱을 끼고 걷는 수준이었다. 번뜩이는 주위의 시선이 순식간에 쏠린다.
헛기침하며 주위를 살폈다.
한 발자국을 옆으로 크게 내디뎠다. 그러자 한유정이 두 발자국을 움직여서 사삭 따라붙는다. 두 발자국 내딛자 이번엔 네 걸음을 사삭. 세 발자국 내딛자 여섯 걸음을.
결국 내 오른쪽 어깨가 벽하고 부딪히며 헛짓거리가 멈췄다.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얘가 그제야 슬쩍 떨어진다.
한유정이 작게 변명했다.
“추워서….”
그 말에 한유정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살폈다. 트레이닝하다가 바로 나와서 그런지 옷이 얇았다. 땀 때문에 머리카락 끝도 젖어있었다.
“야, 나올 때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럼.”
코트를 벗어 한유정의 어깨에 걸쳐줬다. 안에 입은 게 겨울 정장이라 그렇게 춥진 않았다. 머플러까지 벗어서 목에 빙빙 감아주는데 문득 빨간색 눈과 마주쳤다.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다가 들끓는 한숨을 내뱉었다.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길게 뿜어져 나온다.
찬 공기에 정신이 확 든다.
정신 차리자.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한유정의 인생은 참, 기구했다.
나도 나름 한 사연 하는 인간인데, 나보다 더했다.
천살성 때문에 원치 않는 살인을 해야 했고, 유일하게 남은 친척이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했고, 알고 보니까 아빠는 삼촌이 죽였다더라.
어째 만나는 어른마다 그 모양 그 꼴이었다.
나중에 커서 좋은 사람 만나려고 액땜 하는 건지, 기구한 팔자라도 꼬인 건지.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삼촌 문제는 내가 해결해놨어.”
“네?”
“너희 삼촌한테 후견인 포기 각서 받으러 갔었거든. 깔끔하게 처리했어. 내일 법원가서 끝내면 돼.”
그리고 품속을 뒤지며 물건을 찾았다.
이게 어디 갔지?
아, 외투에 넣어놨었다. 잠깐 한유정의 어깨를 붙잡고 외투를 헤집었다.
폼 안 나게, 씨.
통장과 인감을 꺼내서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 너희 삼촌이 부당 수금하던 건데, 아직 돈 꽤 많이 남아있더라. 집 명의도 그대로야.”
삼촌이 너희 아빠를 죽였다, 같은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삼촌한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 나는 모른다.
돈 해 처먹고 가족 찔러 죽인 망나니 새끼가 좋은 모습을 보여줬을 거 같지는 않지만, 어쩌면 진짜 친척처럼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냥, 추악한 진실은 나만 알고 바다 깊숙한 곳에 묻어버렸다.
“그러니까 이젠 좀 점심때처럼 굶고 다니지 마. 너 수십억대 자산가야.”
사는 동네부터 범상치 않더라니 삼촌이 도박으로 흥청망청 썼는데도 남은 게 이만큼이나 있었다.
사망 보험금도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열일곱… 이제 해 넘어가니까 곧 열여덟이지만.
어린 나이에 저 정도 돈이면 이제 굶을 일은 없겠지. 마음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용돈을 아무리 올려줘도 먹는 게 통 시원찮아서. 좀 걱정됐었거든.
그런데 얘가 이상하다.
멍하니 허공만 바라본다.
휙휙, 한유정의 코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정신 못 차리네.
조심스레 떠봤다.
“그, 헌터 하기 싫으면 그만둬도 되는데….”
이젠 돈 많으니까.
솔직히 한유정 입장에서는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데 안 하면 내가 좀 곤란해진다. 지금 담당하는 게 한유정 한 명뿐이라 회사에서 내 위치가 붕 뜬다.
물론, 먼저 이런 말을 먼저 꺼낸 만큼 그녀의 입장을 우선시하고 싶지만 둘의 뜻이 같다면 그것보다 좋은 게 없다.
속으로 작게 기도했다.
유정아, 제발.
한유정이 발그레 익은 뺨으로 작게 웃는다.
“아뇨, 저 헌터 해야 돼요.”
“어, 응? 괜찮겠어? 생활비 충분할 텐데.”
“생활비요?”
“아까 말했잖아. 너 이제 수십억 있다니까. 솔직히 인제 와서는 돈 버는 의미가 없어.”
집 있고, 통장에 현금으로 수억이 꽂혀 있고. 일평생을 풍족하게는 아니어도 부족함 없이 살 거다.
돈과 행복을 목적으로 보자면, 한유정은 벌써 인생의 결승점에 도달한 거다. 통장과 인감을 꾸깃 쥔 한유정이 날 빤히 올려다본다.
“저 이제 돈 없는데.”
“뭐?”
“돈 없어요.”
“뭔 소리야? 방금 통장이랑 인감 넘겨줬는데. 봐봐.”
한유정의 주먹에 쏙 들어간 통장을 가리키는데 맑은 목소리가 대꾸한다.
“아뇨, 이제 없어요. 어차피 전부 나갈 돈들이에요.”
“뭐어? 전부 나갈 돈이란 게 무슨 의미야?”
“그 말 그대론데.”
“야, 뭘 하길래 수십억이 한 번에 날아가!”
안 되겠다.
한유정이 평소 어딘가에 돈을 쓰는 건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알면서도 그냥 넘어갔다.
용돈 주는 입장에서 사사건건 참견하면 선의를 잘못 해석할 수도 있고, 자존감에도 안 좋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진짜 부모가 아닌 만큼 내 나름 지키던 선이었고, 한유정이란 인간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이건 스케일이 너무 달랐다.
집이야 바로 환전 불가능하다지만 현금으로만 수억이다. 17살짜리가 그걸 하룻밤 사이에 써야 하는 목적이 뭔지, 여러 가지로 상상해봐도 안 좋은 것들밖에 나오지 않았다.
“뭐 숨기고 있는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봐.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 테니까.”
“재촉해도 안 알려드릴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 다 돼도 아저씨는 안 돼요.”
“왜?”
한유정의 눈이 초승달처럼 휜다.
“눈치 엄청 빠르시잖아요. 제가 알려드리면 분명 금방 눈치채실 거에요.”
“아니, 당연히 돈 어디다 쓰는 건지 알아두려는 건데…….”
이제 곧 후견인 되는 입장에서 그런 것도 모르면 어떡해? 섭섭함을 토로하자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안 돼요.”
한유정이 작게 소곤거렸다.
“아직은, 알고 계시면 안 돼요.”
나의 아저씨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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