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86화 (86/112)

〈 86화 〉 How I Met Your Mother (2)

* * *

한예림은 어느새 손익 계산을 마쳤는지, 조금 전과 다르게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밖에는 지금 게이트 터진 거 수습한다고 난리 났고, 기적적으로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연일 보도 때리고 있어.”

게이트가 열린 지 고작 사흘.

관심이 식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랐다.

천 명이 넘게 죽었고, 이천 명이 넘게 살아 돌아왔다.

사람들은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한예림이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이거, 제작 소식만 알려져도 사람들이 엄청 관심 가질 거야. 이 정도 규모로 끝내기에는 너무 아까워.”

“그럼 어떻게 하려고? 독립 영화라도 만들 생각이야?”

소재가 괜찮았다.

한예림과 내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시간과 예산을 더 들여서 독립 영화를 만들어도 나쁘지 않을 거다.

물론 제작사에 외주 맡겨서.

하지만 우리가 이 영상을 사용하려는 목적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이지아와 회사를 위한 ‘홍보용’이었다.

제작사였다면 필모를 위해서 자체 제작하는 것도 괜찮겠지.

그런데, 어디까지나 우리는 헌터 매니지먼트, 길드였다.

엔터 팀은 만들지도 않았다.

독립 영화로 제작하면 못해도 수개월은 걸릴 거다.

제작하고, 영화관 몇 군데에 영업 뛰어서 걸어놓고, 홍보도 필요했다.

그거 전부 끝나고 개봉 시기 다가오면 게이트 건은 잠잠해져 있을 때다. 인터넷에서나 잠깐 화제가 될 거고, 사람들은 불편한 기억을 굳이 뒤지려고 하지 않을 거다.

즉, 독립 영화는 목적에도, 결과로도 썩 마땅찮았다.

“아무리 그래도 다큐인데 방송국이 제일 낫지. 대신에 제작비 좀 더 키우고, 제대로 특집 편성해서 내보내는 게 낫겠어. 걱정 말고 있어 봐, 송 팀장한테 시켜서 방송국…….”

한예림이 말을 하다 말고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턱을 괴더니 검지로 입술을 두들긴다.

그녀가 물었다.

“너 지금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이제 1년 정도 됐지.”

슬슬 한 살 더 먹을 때 됐다.

“팀장 달고 여태까지 제대로 일해 본적 없지?”

“어? 응.”

“이지아 이제 방송 끝났으니까 관리하는 사람 한유정 한 명뿐이고.”

“그치?”

“김 팀장이 가져온 건인데, 송 팀장한테 냅다 실적 넘겨주는 것도 그림이 조금 그렇고…….”

한예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거, 네가 한 번 맡아서 진행해봐. 기획안부터 차근차근.”

* * *

시간이 흐르고 토요일 저녁.

드디어 혼자 살아남기의 방영 날이 되었다.

거실은 조금 부산스러웠다.

한예림은 내가 TV에 나오니까 신나서 집까지 찾아왔다. 요즘 일 바쁘지 않냐고 물으니까 이게 더 중요하단다. 지금은 주방에서 팝콘 튀기며 간식거리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 너는 이걸 꼭 여기까지 와서 같이 봐야 해?”

“당연하지.”

“왜?”

“그래야 쪽팔린 거 나오면 너 얼굴 보고 나도 웃잖아.”

진짜 성격 나쁘다.

음료를 들고 거실로 가져갔다.

한유정과 루리가 나란히 앉아서 뭔가 소곤소곤 거리고 있었다.

요즘 맨날 붙어 다니던데 뭐 하는 건지 대체 모르겠다.

물론, 보기 좋았다.

한유정이 날 부모 대신으로 생각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루리를 데리고 올 때 가장 걱정한 게 한유정이었다.

첫째가 둘째한테 질투하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한유정이 유독 나한테 의존하고 집착하는 걸 떠올려보면, 솔직히 받아들이는 과정이 썩 매끄럽지 않을 거 같았다.

더군다나 루리는 나한테 아빠라 부르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한유정과 의견이 충돌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전부 걱정에 불과했다.

한유정은 루리하고 착 달라붙어서 친하게 지냈다. 꼬마애, 그것도 성격 독특한 루리하고 같이 놀아주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전부 맞춰주고 있었다.

첫날부터 함께 자고, 씻기는 것도 맡아서 했고, 일 끝나고 돌아오면 방에 데려가서 공부까지 가르치는 중이었다.

이제는 루리가 한유정을 많이 따르는 게 눈에 보였다.

한유정과 루리가 서로의 귀에 무언가를 작게 속삭이고, 마주 보며 옅게 웃는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진짜 보기 좋네.

그, 왜, 사이좋은 가족을 멀리서 바라보면 자기도 모르게 흐뭇하고 심장이 간질거리는, 그거.

그게 막 목구멍 밑에서부터 치솟아 올라온다.

흐뭇하게 구경하며 걸어가는데, 한유정의 고개가 돌연 홱 돌아간다.

그리고 화들짝 놀란 눈이 크게 뜨인다.

한유정이 갑자기 어색하게 웃는다.

뭐지?

“아저씨, 언제 오셨어요?”

“방금. 둘이 뭔 이야기를 그렇게 나누고 있었어?”

“아… 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진짜?”

“네, 진짜요!”

한유정이 갑자기 말을 돌린다.

“루리야, 아저씨한테 춤 한 번 보여줄래?”

“응!”

루리가 밝게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괴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게라게라포!”

저 노래 때문에 귀에 딱지 얹겠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이지아 옆에 앉았다.

뭘 그렇게 집중하고 있나 했더니.

핸드폰을 손에 쥐고 기도하고 있었다.

“…뭐해?”

“으응? 기도하고 있었어.”

“기도를 왜, 아, 방송 잘 나오게 해달라고?”

이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긴장됐다. 예능이란 게 그랬다.

편집하는 사람 마음에 따라 비호감으로 나오기도, 세상 다시 없을 천사로 나오기도 한다.

방송국에서 미친 게 아니라면 지금 한창 주가 올리는 이지아를 가지고 개수작 부리진 않겠지만, 그건 정말 끝날 때까지 모르는 일이었다.

우측 상단에 로고가 뜨고, 광고가 시작된다. 마른 입술을 핥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예능 관련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아주 난리도 난리가 아니었다. 새로 고침을 할 때마다 페이지가 바뀌었다.

[와ㅋㅋㅋ 이지아 진짜 나오는거임?]

[이지아 게이트 안에 갇혔었다면서? 그럼 방송에서 썰 좀 푸나?]

[ㄴ예고편에 그런거 전혀 없던데. 썰 풀었으면 방송사 쪽에서 예고편으로 무조건 넣었을걸]

[ㄴ피디 병신임?ㅋㅋㅋ 바짓가랑이 잡아서라도 인터뷰 넣었어야지. 초짜인가? 감이 없네]

박 피디가 내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리긴 했었다.

그런데 단칼에 거절했다.

다큐멘터리 제작할 때 내용 겹칠 거 같아서 외부 인터뷰는 싹 다 쳐내고 있었다.

우리가 엔터 회사였다면 방송국이나 피디 눈치 좀 보고 떡밥 거리는 던져줬을 거다. 그런데 우리는 길드다.

전혀 거리낄 게 없었다.

추천을 많이 받은 글이 상단에 떠올랐다.

들어가서 확인해봤다.

[제목: 내가 오늘 혼자 살아남기 내용 예상해봄]

일단 이지아 따사로운 볕과 함께 일어나서 브런치부터 조짐. 가벼운 요가 후에 아침 산책. 마주친 이웃들과 가볍게 인사 나누고, 어딘가로 전화 걸음.

동료 헌터 or 연예인들 나와서 뭔가, 뭔가 하기 시작함. 서핑도 즐기고, 자전거도 타고, 카페도 가고, 아무튼 뭔가 함.

밤늦으면 친구들 불러서 조촐한 파티 같은 거할거임. 술도 마시고 진솔한 이야기(친하다면서 눈 잘 못 마주침) 하다가 하루 마무리하면서 끝난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만약 그게 가능했으면 우리가 강원도 철원군까지 갔다가 게이트에 휘말리진 않았을 거다.

댓글 반응이나 추천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하게 생각하나 보다.

그동안 이지아라는 인물이 워낙 입지전적이었다.

16살부터 유명해져서 어비스 던전, 그리고 이번 게이트 사태까지.

전국민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었다.

“지아야, 방송 시작한다.”

이지아가 기도하던 걸 멈추고 눈을 떴다.

스튜디오에 등장한 이지아를 두고 출연진들이 호들갑 떨었다.

간단한 신변잡기가 있은뒤, 이지아의 관찰 예능이 시작됐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5분 뒤,

[님들 지금 화면 멈춤?]

[…?]

[ㅋㅋ; 머징? 당황스럽네;;]

[이지아 왜 안움직임?]

[달팽이도 저거보단 더 많이 움직이겠네.]

[지금 뭐하고 있는야?]

[계속 핸드폰만 만지는 거 같은데…? 맞다 아님?]

[우리 집 TV가 이상한 거 아니지? 이지아 지금 계속 소파에 박혀있는 거지?]

댓글창이 불타올랐다.

*

변명부터 말하자면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다.

혼자 살아남기의 촬영은 엄청 촉박하게 진행됐다.

당시 촬영 기간이 고작 이틀이 잡혀있었는데, 영상 넘어가는 대로 편집하고 그 주에 방영할 예정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촬영해야 할 시간 동안 게이트에 갇혀 있었다는 거다.

5시간의 생존극, 그리고 구출됐을 때는 반나절 넘게 다들 뻗어있었다.

사실상 하루는 통짜로 날려 먹은 셈이다. 남는 시간에 방송 분량을 채워 넣으려면 부랴부랴 캠핑 장면이라도 찍어야만 했다.

기절하기 직전이던 내가 촬영을 강행한 이유다.

솔직히 나도 거기서 뭔 정신으로 촬영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찍었다. 바비큐 굽고, 삼겹살 먹고, 편집으로 알아서 해주겠지, 하고.

그런데 피디가 편집하려니까 이게 웬걸.

VJ들이 완전히 정신을 놔버렸던 건지 카메라고 오디오고 쓸만한 물건이 아니었단다.

이번 주에 방송 나간다고 예고는 때려놨지, 스튜디오 촬영은 당장 다음날로 잡혔지, 사람들의 기대감은 계속 차오르지,

박 피디가 내 바짓가랑이 잡고 애걸복걸했었다.

­현우 씨, 아니, 매니저님! 제발 인터뷰라도 넣어줘요. 예?

당연히 안된다고 했다.

눈깔 돌아간 박 피디가 결국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뒷부분 싹 다 날려버리고 처음에 구두로 오간 회사 홍보 분량까지만 챙겨줬다.

그거 보면서 나도 뭐라고 못 하겠는 게, 박 피디 입장에서도 요리할 건덕지가 전혀 없었을 거다.

대략적인 촬영 진행 상황은 이랬다.

이지아가 하루종일 소파에서 핸드폰 보며 뒹굴거렸다 ­> 위기감을 느낀 제작진들이 날 투입했다 ­> 회사 홍보 분량을 찍은 뒤 ­> 캠핑하려는 순간 게이트가 터졌다.

즉, 혼자 살아남기 제작진 쪽에 남은 영상이라고는 고작 해봐야…….

[??????]

[이지아 대체 언제까지 뒹굴거리는 거임? 이거 영상 잘못 나간 거 아니야?]

[출연진들이랑 말하는 거 보면… 맞는 거 같긴 한데….]

[이거 관찰 예능이 아니라 토크쇼였음? MC 진땀 흘리는 거 봐. 방송 빡세게 하네. 출연료 더 챙겨줘라.]

[지금 이지아 소파에 누운 지 몇 시간 지났음?]

[시계 바뀐 거 보니까 두 시간 지난 듯 ㅋㅋ]

[씨발 미치겠네ㅋㅋㅋㅋ]

[이지아 본인 맞긴 함?]

[아니, S급 헌터 어디 갔냐고ㅋㅋㅋㅋ]

남는 영상이라고는 고작 해봐야, 이지아가 소파에서 누워있던 것뿐이었다.

물론, 회사 홍보 분량도 남아있었다. 그거라도 넣으면 조금 구성이 생길 거다.

그런데 문제가, 이게 편성이 이 주짜리로 잡혀 있었다.

합쳐서 두 시간을 송출해야 한다.

박 피디의 썩어있는 얼굴을 보면 분명 한주에 내용 꽉꽉 채워 넣어서… 채울 내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 주에 끝내고 싶어했겠지만 그것도 안 되는 게 광고 문제 때문이었다.

이지아 집 갈아치웠던 협찬사 물건들. 프로그램에 광고 싹 다 붙어있어서 이미 2주 치 내보내기로 잡혀있었단다.

[어? 방금 이지아 움직였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그거 생각나네. 파브르 곤충 일기.]

[아니 좀 움직여보라고. 뭐 하는 건데?]

솔직히 나도, 이지아도 잘 몰랐었다.

이게 사람들한테 긍정적으로 비췄을지, 아니면 재미없다고 욕먹었을지.

방송 나가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내게 최 작가가 조언해줬다.

십수년간 예능을 만드는 사람들도 이게 대박 날지, 쪽박찰지 전혀 모른단다.

현장에서는 기똥차게 재밌던 게 편집을 걸치고 나면 웬 불연소 쓰레기가 돼 있을 때도 있고,

편집까지 재밌게 끝나서 이거 대박이다, 분명 성공한다 싶던 게 싸늘한 반응이 돌아올 때도 많다고.

결국 방영 당일날이 될 때까지 모르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형식적인 격려.

[생각하던 이미지하고 다르네. 되게 거만할 줄 알았는데.]

[뭔데 핸드폰만 하루종일 보고 있냐. 미쳤음, 진짜?]

[오, 웃는다ㅋㅋㅋ]

[근데 저거 지금 뭐 보는 거냐? 궁금해 죽겠네.]

그런데 그게, 실제로 벌어졌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이미지 바꾸려고 노력했었는데,

그거 다 안 통해서 맨날 삽질만 했었는데.

시발.

대박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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