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내일은 슈퍼 스타 (5)
* * *
차량에서 했던 고민은 모두 쓸데없었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오자 먼저 도착한 최 작가가 대본을 넘겨줬다.
큐 카드처럼 본격적인 건 아니고, 그냥 종이 뭉치에 볼펜으로 끄적인 즉석 대본이었다.
“이게 뭡니까?”
“다른 건 아니고 간단한 대본 준비해봤어요. 분량 뽑기용으로…….”
당황한 티를 감추며 얇은 쭉 훑었다.
“원래 관찰 예능에도 대본이 있어요?”
요즘은 리얼이 대세 아닌가?
거기에 관찰 예능이라면 더더욱이.
최 작가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웃는다.
“아무래도 예능은 처음이니까 많이 헤매실 거 같아서… 상황만 드리는 거예요. 상황만. 나머지는 팀장님하고 이지아 씨가 알아서 하시면 돼요.”
어이구, 그렇지.
초짜 두 명한테 맡기기는 미치도록 불안하지 않겠어? 다행히 제작진들이 이동하는 동안 준비했나보다.
허허벌판에서 이정표를 찾은 기분이다. 대본을 소중하게 받아들고 이지아와 함께 나눠 읽었다.
회사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최 작가가 옆으로 따라붙어서 열심히 설명했다.
“일단 컨셉은 캠핑으로 잡았어요. 아무래도 요리나 텐트 치는 등 방송 미션 비슷하게 잡기 편해서 상황 뽑기도 좋고, 다른 예능에서도──”
주절거리는데 뒤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네.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니까 최 작가가 눈을 깜빡인다.
“최 작가님. 아무리 제가 매니저여도 그렇지, 남녀 둘이 캠핑가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이지아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유명인이 이성 끼고 돌아다니면 흠 잡히기 딱 좋다.
“아아,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서울 근교로 당일치기면 충분하고… 나중에 스튜디오 녹화 때 팀장님 평소 취미생활이 캠핑인 거로 연출할 거예요. 이지아 씨가 업무시간에 선심 것 같이 가준다고 하면 오히려 이미지 좋아지거든요. 아니면 스케줄 때문에 지방에 들린 김에 이지아 씨가…….”
온갖 설정들이 청산유수처럼 쏟아진다.
“와.”
“왜 그러세요?”
왜긴? 방송이란 게 믿을 거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지.
“작가님이 일 잘하시는 거 같아서요.”
“아하하.”
쑥스럽게 뒤통수를 긁적이는 최 작가와 흐뭇하게 웃는 VJ가 갑자기 사기꾼처럼 보인다.
TV에서 틀어주는 예능들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었구나.
그래, 대진 신문사 기자도 그랬었지.
기사 조작해서 내보내려고 하고….
짧게 혀를 찼다.
아무튼 카메라 드는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최 작가가 주의를 준다.
“팀장님, 이제부터 스태프는 그냥 없다 생각하시고 평소대로 행동해 주세요.”
“네?”
“스태프들하고 출연자가 대화 나누면 관찰 예능 특유의 느낌이 사라지거든요. 다큐처럼 변해버릴 수도 있어서….”
그러고 보니 혼자 살아남기 최신화에서 스태프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없던 거 같다.
끽 해봐야 카메라 동선이 겹쳐서 잠깐잠깐 찍히는 경우?
그거야 VJ가 한두 명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인터뷰할 때나 진짜 특별한 경우 아니면 저희가 말하는 부분들은 어차피 다 편집될 거예요. 저희 절대 의식하지 마세요!”
최 작가는 그 말만 남기고 VJ 등 뒤에 섰다.
의식하지 말라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VJ가 들고 있는 카메라와 뻘쭘하게 눈을 마주치다가 옆에 있는 이지아에게 말했다.
“자, 그럼 일하러 들어갈까요?”
“현우 씨, 지금 되게 어색해요.”
“그, 그래요?”
내가 카메라 앞에 서봤어야지?
그나마 이지아는 상황이 나아 보였다. 예능은 아니더라도 뉴스에 많이 나오더니, 나름 카메라에 익숙한가 보다.
헛기침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회사에서의 촬영은 한예림이 주도했다. 그녀가 이지아를 대동하고 회사 구석구석을 탐방했다.
한 시간 뒤에는 공채 면접이 있다. 일부러 촬영 시간에 잡아놓은 거다.
방송용 연출이 끝나면 스튜디오로 가서 프로필 사진을 찍고, 혼자 살아남기 촬영 때문에 캠핑을 가야 한다.
한유정 맡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이지아를 담당하니까 장난 아니구나. 왜 매니저들이 갈려 나간다고 표현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다른 매니저들은 여기에 공략대 캐스팅까지 관리해야 하니까. 본업은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스케줄이 살벌하다.
최 작가가 한예림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빠져나와 내게 다가온다.
“팀장님, 저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지하 훈련장이요.”
최 작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네? 신생 회사면서 훈련장도 있어요?”
“원래 빌딩 사용하던 회사도 길드였는데, 투자 실패하고 망했거든요. 임대할 때 그대로 넘겨받았어요.”
이건 방송에 어필할만한 장점이었다.
서울에서는 헌터들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훈련장이 모자랐다. 땅값 비싸고 사방천지에 빌딩이 올라가 있는데 당연하다.
결국 이지아네 집에 설치된 훈련장처럼, 공간 왜곡이 딸린 사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게 없다면 옛날에 내가 하던 거처럼 공용 훈련장을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차이가 날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도 훈련장을 설치하는 비용이 비용이다 보니까, 어지간한 곳이 아니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게 현실이고.
이지아 출연 조건으로 이미 입이 맞춰져서 홍보도 제일 길게 나갈 거다.
그래서 저렇게 연출도 하는 거지.
타닥, 타닥!
트레이닝복을 입은 한유정이 진흙 골렘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당히 비효율적이고, 화려한 검술로.
3차 헌터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한유정의 개인 트레이닝을 옆에서 봐왔다.
그동안 내가 한유정에게 받아들인 이미지는 상상으로나 존재하던 암살자의 ‘일격필살’ 그 자체였는데 지금은 무슨 영화 속 검사처럼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와아….”
VJ가 한 편의 전투 쇼에 가까운 장면을 놓칠세라, 허겁지겁 카메라를 전방으로 향했다.
옆에 있던 이지아에게 작게 속삭였다.
“대놓고 수작질이죠?”
“현우 씨, 마이크.”
“……감독님, 이건 꼭 좀 편집 부탁드립니다.”
마이크에 대고 작게 말했다. 오디오 감독이 알아서 해주겠지.
진흙 골렘들이 전부 무너지자 한유정이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유정이가 실력 많이 늘었네요.”
“그쵸? 이번에 3차 시험에서도…….”
이지아와 한예림이 한유정을 가리키며 설명투로 소개한다. 관찰 예능이라 카메라에 대고 한유정은 어떻고가 안된단다.
복잡하기도 하지.
바닥에 뻗어있는 한유정에게 걸어가 수건을 건넸다.
숨을 몰아쉬던 한유정은 어떻게 기운을 차렸는지, 나를 발견하고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저… 팀장님 오셨어요?”
목소리에서 반가움이 방방 널뛴다.
“인사 전에 일단 얼굴부터 닦자. 조금 이따가 인터뷰 따야 해.”
“인터뷰요?”
“응, 그냥 간단히 몇 마디하고 끝낼 거야. 관찰 예능 볼 때 중간에 삽입되는 자기소개 있잖아? 그거.”
“아.”
“물 줄까?”
한유정이 냉큼 대답했다.
“마실래요.”
병뚜껑을 딴 물병을 건넸다. 한유정이 물을 마시는 동안 땀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주는데, 문득 옆구리에 시선이 꽂힌다.
고개를 돌렸다.
미간을 찌푸리던 이지아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팀장님.”
“응?”
다시 고개를 내리니 한유정이 홀딱 젖은 머리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병에 물이 비어있다. 얘가 자기 머리에다가 낼름 뿌린 모양이다.
“야! 방금 닦아줬는데 물 뿌리면 어떡해? 다시 닦아야 하잖아.”
“땀 때문에 너무 찝찝해서요. 죄송해요.”
“잠깐만 있어 봐.”
마른 수건 하나를 더 꺼내 머리를 털어줬다.
눈을 감은 채 기분 좋은 표정을 짓던 한유정이, 조금 늦게 묻는다.
“팀장님, 방송 촬영 언제 끝나요?”
“모레쯤? 관찰 예능이다 보니까 그때까지는 꽉꽉 차 있을 거 같아.”
“이 뒤로는 아줌… 지아 언니하고 저랑 스케줄 겹치는 일 없어요?”
“아마? 회사 홍보는 오늘 찍은 거로 끝날 테고, 다음은 전부 방송 스케줄만 있어서. 왜?”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한유정이 고개를 기우뚱, 뒤로 젖힌다.
마주친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냥요.”
“김 팀장.”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
송 팀장이 언짢은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이지아가 찾아서. 방송해야 하는데 한유정은 나한테 맡기고 가봐. 조금 이따가 이지아하고 캠핑도 가고, 방송 출연한다면서?”
“어떻게 알았어요?”
“대표님하고 최 작가 말하는 거 들었어. 가봐.”
“잠시만요. 유정아, 방송 나가니까 화장 간단하게만 하고 와.”
굳어있는 볼을 꼬집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 팀장이 집게손가락에 건 수건을 부들부들 떨며 한유정에게 던지듯 건넨다.
무슨 맹수한테 먹이를 건네는 것도 아니고.
이지아에게 돌아가니 가벼운 핀잔이 돌아왔다.
“현우 씨, 굳이 안 나서도 돼요.”
“네?”
“유정이한테는 지금 송 팀장님이 붙어있잖아요. 이번 방송은 저희 둘한테 집중한다니까… 아셨죠?”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며 웃었다.
“죄송해요. 유정이 돌보는 게 습관 돼서.”
“그리고 아까 최 작가님한테 들었는데, 강원도 쪽 캠핑장에 촬영 협조 받으셨다더라구요.”
시간이 되려나?
오후 다 돼서 도착할 거 같은데.
“진짜 촬영만 하고 가겠네요.”
그래도 장 보고 식사 준비만 해도 분량은 충분할 거 같다.
저녁에 바비큐를 먹을지, 삼겹살을 먹을지, 라면은 또 어떻게 할지 신나서 이야기하는데 문득 기시감이 느껴진다.
또다.
또 옆구리에 강렬한 시선이 꽂힌다.
이번엔 누구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유정과 눈을 마주쳤다.
화르륵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나와 이지아를 담고 있었다.
*
한유정이 힘없이 일어난다. 그리고 비척이며 걸어온다. 젖은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로, 터벅터벅.
옆에 있던 이지아가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애 봐라….”
반년간에 처음 들어보는, 싸늘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매니저에게 혼났다고 시무룩해 하고, SNS 친구와 메신저를 나누며 혼자 행복해하던.
그런 푼수 같은 인상이 날아가고 언젠가 봤던 사나운 기세가 들끓는다.
언제였더라?
아, 분명 그때였다.
계약서 아직 안 썼다고 내가 떠날 거처럼 말했을 때.
이지아가 날 무력으로 압박하려던 적이 있었다.
그때와 똑같았다.
이지아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 틈엔가 한유정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작게 씨근덕거리며 숨을 고르다가, 작은 입술을 뗀다.
“지아 언니.”
한유정과 이지아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저 잠깐 훈련 좀 봐주세요.”
*
최 작가가 미리 이지아의 마이크를 회수했다. 대결 중에 버티지 못하고 부서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한예림, 송 팀장, VJ 등 관중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돌아온 최 작가는, 일단 김현우부터 찾았다.
“팀장님, 팀장님!”
최 작가가 호들갑을 떨며 김현우를 불렀다. 그는 어딘가 복잡한 얼굴로 이지아와 한유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작가님. 무슨 일이세요?”
“진짜 촬영 안 돼요? 대표님이 팀장님을 많이 아끼시는 거 같던데, 혹시 귀띔 한 번만 해주시면…….”
“죄송해요. 일반적인 훈련이면 상관없는데, 이런 결투는 전력 유출이 뻔해서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말투에, 최 작가는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송 팀장이 VJ와 최 작가의 핸드폰까지 꼼꼼히 살피더니 외쳤다.
“녹화 없습니다! 시작하세요!”
신호와 함께 한유정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한유정이 다시 관객들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의 주먹이 이지아의 복부에 꽂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