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내일은 슈퍼 스타 (4)
* * *
박 피디와 긴 대화를 나누고 저택으로 향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까 듣던 대로 역시나, 소파에 웬 슬라임 한 명이 빈대떡처럼 누워있었다. 세상 행복한 얼굴로.
처음에 박 피디한테 들을 때는 설마설마했다. 집에서 꼼짝하지 않는다길래 직접 확인해보니까 웬걸.
있는 평소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했을 줄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당연히 방송 분량 뽑으려고 무리하지 말라는 의미잖아. 굳이 어색하게 자기 포장하지 말고 드러내라는 건데, 진짜 핸드폰만 하고 있으면 어떡해?
팔짱을 끼고 가만히 기다렸다. 언제까지 늘어져 있나 보려고.
이지아가 집중하며 핸드폰을 꾹꾹 누른다. 그러다가 시야 한구석에 드디어 내가 들어왔는지, 고개를 돌렸다.
“현우 씨, 웬일이에요? 지금 촬영 중이라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
슬쩍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카메라. 그래, 카메라.
아까 방송 작가가 마이크도 달아줬다. 전부 들릴 거다.
말실수는 하지 말자.
작게 심호흡을 했다.
*
최 작가가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
“혜진 씨 그만 돌아오라고 할까요? 학원 알아볼 필요 없으니까…….”
“놔둬.”
“네? 방금 매니저가 말해본다고 갔잖아요.”
박 피디가 머리를 긁적였다.
“팀장이긴 한데. 그래도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야. 딱 봐도 이지아하고 또래처럼 보이는구만, 컨트롤이 될 거 같아?”
그렇기에는 이지아의 이름값이 너무 높았다. 잠깐 봤던 김현우라는 매니저의 성격도 그다지 세 보이지 않았고.
매니저보다는, 유치원에서 애들 돌보고 있을 거 같은 인상이었다.
“말해보기는 개뿔. 밖에 좀 나가 달라고 사정사정하고 있겠지. 하는 거 보다가 내가 이지아하고 얘기해볼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박 피디가 외투를 걸치며 말할 때였다.
오디오 감독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현우 씨, 웬일이에요? 지금 촬영 중이라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
촬영 개시 여섯 시간 만에 드디어 이지아가 입을 열었다. 박 피디가 카메라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이지아 쪽 화면 봐보세요.”
오디오 감독이 헤드폰을 건네며 말했다.
“피디님이 들으실래요?”
“예, 줘보세요.”
그가 헤드폰을 머리에 꼈다. 김현우와 이지아의 대화가 들린다.
제가 평소대로 하라고 하긴 했었죠. 분명했었는데, 그렇다고 집에서 핸드폰만 보고 있으면 어떡해요?
아뇨, 그게, 현우 씨가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보여주라니까, 평소 제 모습을…….
김현우가 어이없다는 듯 허리에 한 손을 걸치고 다다다 말했다.
제 말뜻은 당연히 평소 지아 씨의 성격을 보여주라는 거였죠. 밖에 나가서 산책하든, 영화를 보든, 친구를 만나든 간에요!
방송 나오는 사람들은 뭐 평소에 할 거 많아서 땅강아지처럼 뽈뽈 돌아다니는 줄 알아요? 당장 옷 입고 외출 준비해요.
오늘 회사 메인에 걸 단체 사진 찍기로 했잖아요! 방송 분량이라도 뽑게 미리 현장 나가 있어요.
김현우가 이지아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이지아가 힘없이 질질 끌려갔다.
“카메라 따라가 봐요. 드레스룸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김현우가 이지아의 옷을 골라주고 있었다. 그가 옷걸이째로 이지아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창고 방에 카메라 없으니까뭉그적거리지 말고 빨리갈아입고 나와요. 제작진분들 지금 지아 씨 때문에 공황 상태 빠져있어요.
박 피디가 헤드폰을 벗었다. 그가 팔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툭툭, 검지로 팔뚝을 치던 박 피디가 불쑥 최 작가에게 물었다.
“이지아 첫인상 어땠어?”
“네? 첫인상이요?”
최 작가가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있는 이지아를 쳐다봤다.
“좀 쉽게 다가가기 힘들게 보였죠…?”
“시청자들도 마찬가지겠지?”
“그쵸. 솔직히 첫인상은 저희나 시청자들이나 별 차이 없잖아요. 어디 얼굴 비추는 사람도 아닌데.”
이지아에 대한 평판은 대부분 그랬다. 뉴스 외에 얼굴을 비춘 적이 한 번도 없어 인상대로 평가했다.
살짝 냉소적으로 보이는 인상. 꼭꼭 숨긴 사생활. 여러 가지로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스타였다.
그리고 예능에 이지아가 나오는 걸 기대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10년 만에 드러나는 이지아의 진짜 모습을 기대하는 중일 터다.
김현우의 눈치를 살피며 창고로 들어가는, 지금의 모습처럼.
“아까 늘어지게 누워있던 모습도 인간미는 느껴지긴 하는데, 방송에 쓸만한 내용은 아니고.”
박 피디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매니저가 들어가니까 그림이 확 사네. 매니저한테 혼나는 S급 헌터. 일단 신선하잖아. 그치?”
“방금 매니저한테 혼나고 있던 거예요? 이지아가?”
오디오를 듣지 못한 감독들과 최 작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반대의 구도라면 손발 달린 인간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매니저한테 혼나는 장면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김현우 이 사람, 팀장이라고 했지?”
“네.”
“사람이 보기보다 강단이 있네. 얼굴도 뭐, 막 잘생긴 건 아니어도 호감형이고. 이지아한테 꼬박꼬박할 말 하는 거 보면, 방송에 나왔을 때 비호감 이미지는 안 쌓일 거 같은데.”
벌써 10년 동안 같이 프로그램을 했는데, 척하면 척이다. 박 피디의 혼잣말에 최 작가가 문제점을 짚었다.
“피디님, 연예인하고 매니저 케미로 가는 거는 주말 예능 중에 똑같은 포맷 있잖아요.”
같은 관찰 예능에서 대표적인 경쟁 라인인데, 컨셉을 가져다 쓰면 따라 하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박 피디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 새끼들 어차피 우리 거 베낀 거잖아.”
“그, 그쵸?”
“필요할 때는 나눠 써야지. 걔네만 베끼게 놔둘 거야?”
“그래도, 일반인이 등장하는 거는 조금 위험요소가 있잖아요. 사전 인터뷰한 것도 아니라 방송 거리가 있는지도 모르고.”
“위험요소는 있지. 그런데 지금 이대로 방송 나가면 그대로 방송국에 핵폭탄 떨어지는 거야. 차라리 감수하는 게 나아.”
최 작가는 결국 입을 닫았다. 박 피디의 말에 어느 하나 틀린 게 없었다. 그가 파릇파릇 돋아난 턱수염을 긁적이며 선언했다.
“최 작가, 매니저한테 혹시 방송에 출연할 의사 있는지 물어봐.”
*
이지아가 옷 갈아입고 나오는 걸 기다리는데 계단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최 작가였다.
“그, 팀장님.”
우물쭈물 부르는 목소리에 다급히 변명하듯 이야기를 꺼냈다.
“아, 작가님. 방금 지아 씨하고 대화 나눴어요. 알아듣게 설명했으니까 걱정 마세요. 아무래도 저희가 예능이 처음이라… 정말 죄송합니다.”
최 작가가 손사래를 친다.
“아뇨, 아뇨, 그거 때문에 온 건 아니고요. 팀장님한테 말씀드릴 거 있어서요.”
“저한테요?”
제작진 쪽에서 나한테 부탁할 게 뭐 있나?
“혹시 팀장님, 방송에 관심 많으세요…?”
“네, 관심은 있는 편이죠.”
드라마나 영화 빼면 거의 안 보지만.
방송 작가 앞에서 관심 없다 말하기는 아무래도 좀 그렇지. 최 작가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진다.
“그럼요, 혹시 저희 방송에 출연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어디에 뭘요? 출연이요?”
“네, 혼자 살아남기에요!”
눈에서 레이저 나가겠네.
간절한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며 애먼 곳을 바라봤다.
“방송 출연은 제가 좀 쑥스러워서…….”
“팀장님, 제발요! 방송 이대로 나가면 저희 망해요!”
“보시면 알겠지만, 저 별로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재밌다, 재밌다 하는 사람들도 예능 나와서 어버버 거리다가 죽 쑤는데, 나보고 거길 출연해달라고?
그것도 평균 시청률 8프로짜리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
무조건 흑역사 예약이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니까 최 작가가 읍소하며 매달린다.
“일반인인 거 감안하고 절대 짓궂게 안 내보낼게요! 저희 편집팀이 일을 기똥차게 잘해요. 이지아 씨하고 투톱으로 나오면 주변에서 알아보는 사람들도 늘어날 거고요.”
그게 싫은 거라고.
얼굴 팔리는 거야 유명인들이나 원하는 거지 일반인은 꺼림직할 뿐이다.
설득하는 말이 전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아니, 지아 씨 이제 옷 갈아입고 나오면 외출하기로 했어요. 조금 상황 보시다가…….”
“팀장님하고 엮이면 지아 씨 이미지도 180도 변할 거예요.”
“어, 네?”
“그리고 회사 홍보 분량도 더 늘려드릴게요! 어차피 분량 뽑기 힘들 거 같으니까 팍팍…….”
“아뇨, 그건 됐고요.”
최 작가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지아 씨 이미지가 변할 거라고요? 어떻게요?”
*
결국 출연이 결정 났다.
그놈의 친근한 이미지가 뭔지.
관심을 보이자 눈을 번쩍 뜬 최 작가가 치덕치덕한 사탕발림으로 날 홀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지아와 함께 업무용 밴에 올라탄 상태였다. 차량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가 굉장히 낯설다.
일단 한예림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
심드렁한 한예림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대표님, 지금 혼자 살아남기 방송 촬영 중인데요. 카메라 돌고 있어요. 통화 가능하세요?”
아, 네. 현우 씨. 무슨 일이에요?
방송이라니까 목소리 나긋나긋해지는 거봐라. 소름이 다 돋네. 더 무서운 건,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 굉장히 안정적이고 부드럽다는 거다. 밖에서는 이렇고 다니는 건가.
뒷좌석에 앉아있던 이지아도 질색하며 팔뚝을 문지른다.
“다른 게 아니라, 작가님이 저한테 방송 출연을 요청하셔서요. 회사 홍보 분량 추가하는 거로 말 맞춰놨는데 알고 계시라고요.”
얼마 나요?
“일단 지금 회사로 가는 중인데, 분량 뽑히는 거 한 번 보겠대요. 몇 컷 정도는 더 딸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사실 제작진 쪽도 오히려 그걸 바라는 눈치였다.
집에만 처박혀있는 것보다는 일이라도 하면 뭔가 나오겠지 하는, 그런 생각인 거 같다.
한예림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방송 열심히 하라는 응원을 보냈다. 홍보 분량이 늘어난 게 어지간히도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잿밥에만 관심 많다니까.
연락을 끊고 한숨을 내쉬는데 백미러로 이지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이지아가 내 굳은 얼굴을 보고 묻는다.
“지금 무슨 생각 하세요?”
“무슨 생각 하냐고요?”
“네.”
“갑자기 그건 왜요?”
“그래도 저희가 같이 일한 지 이제 반년도 넘었잖아요.”
이지아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시간 빠르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현우 씨가 이렇게 질려있는 건 처음 봐서요. 체했어요?”
“체한 게 아니라, 미래가 보여서 그래요.”
이지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미래요?”
“네, 이번 방송이 쫄딱 망하는 미래요.”
일반인… 이지아가 일반인은 아니지만 예능에 처음 나왔으니까, 아무튼.
일반인 두 명을 앉혀놓고 인기 예능 프로그램을 알아서 진행하란다.
속이 안 얹히겠어?
이지아에게 꺼드럭대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라고 말했지만, 막상 카메라가 시야에 들어오니까 그녀의 심정이 백번 이해 갔다.
아몬드를 까득까득 씹으며 속으로 한탄했다.
……진짜, 방송 분량 어떡하냐.
어쩌다 보니까 나오기는 했는데.
설마 나 때문에 망하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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