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역대급 유망주 (9)
* * *
대표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있던 한예림이 일어나며 반겼다. 그녀가 양팔을 옆으로 쫙 뻗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다.
“어때? 출세했지? 스물여섯에 회사 대표가 됐는데.”
“아직 구멍가게인데, 뭐. 그리고 지아 씨가 돈 다 댄 거잖아.”
“그건 투자야. 이지아가 바보인 줄 알아? 옆에서 내가 일하는 거 봤으니까 이만큼 내놓은 거지.”
꼭 자화자찬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게 확실히 수완이 좋았다. 협회에서 방해하던 게 사라지자 벌써 사옥까지 준비했다.
사람만 부족하지 길드로서 출발할 준비는 끝마친 거다.
여태까지는 회사에 속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는데, 이제야 조금 구색이 갖춰진 느낌이었다.
“회사에는 왜 불렀어?”
“직장인을 회사로 부르는 게 뭐 어때서?”
할 말 없네. 그동안 사무실이랄 것도 없어서 이지아의 집에 눌어붙어 있었지만 직장으로 출근하는 게 정상이지.
한예림이 소파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았다. 푹신푹신하다.
전에 쓰던 길드가 남기고 간 소파인데, 대표가 쓰던 물건 아니랄까 봐 좋은 거로 맞췄었나보다.
맞은편에 앉은 한예림이 다리를 꼬며 말한다.
“얼추 사무실 정리도 끝나서 직접 회사 소개해주려고. 겸사겸사 이야기할 것도 있고.”
소개는 개뿔, 이야기 쪽이 본론이구만.
구경하던 걸 멈추고 한예림을 쳐다봤다.
“다른 건 아니고 한유정에 관한 건데.”
“유정이?”
“이번에 17등 했잖아. 유망주 한 명하고 싸웠다가.”
한예림이 소파 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긴다.
“처음에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해? 유정이 헌터 시켜야 하는 이유.”
“…어, 기억나지.”
이지아는 S급 헌터지만 던전에 들어가지 못한다. 지난 보복 행정 건으로 회사 이름도 많이 알려졌지만, 헌터들이 우리 회사에 매력을 느끼냐는 별개였다.
거기서 나온 게 한유정이다.
천살성이라는 S급 각성자. 차세대를 이끌 S급 후보.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3차 시험에서 뒤집고 1등 해야 해. 개인이 아닌 회사 차원의 문제야. 헌터 멘탈 관리도 매니저 일이다. 알지?”
송 팀장이 매니저로서 커리어를 걱정했다면 한예림은 회사의 미래를 말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한유정이 고득점으로 헌터 자격증을 받아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알겠어, 내가 잘 얘기 해볼게.”
“너 성격에 윽박지르진 못할 거 같고, 잘 타일러 봐.”
*
집에 들어가기 전, 근처 공터 벤치에 앉아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형, 지금 통화돼요?”
당연히 가능하지. 오후 3시라 손님 한 명도 없어. 무슨 일인데?
카페 사장이 기꺼워하며 반겼다. 본인 가게인데 손님 없다는 말을 그렇게 기쁘게 해도 되나?
“그, 유정이 때문인데요. 형이 저번에 언제든지 상담하라고 말했잖아요?”
올 게 왔구만.
달그락, 달그닥.
식기 씻는 소리가 멈춘다. 그리고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 사장이 아까보다 큰 목소리로 묻는다.
이번엔 어떤 일이야? 둘이 싸웠어?
“아뇨, 유정이하고 제가 왜 싸워요. 그게 아니라, 이번에 헌터 시험에서 유정이가 성적을…….”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회사 사정하고 사내 정치까지 꺼내려니까 되게 복잡해진다. 잠깐 고민하다가 쉽게 설명했다.
“형네 딸이 평소에 전교 1등을 했다고 쳐요.”
서윤이가? 걔 나 닮아서 공부 못해. 이번에도 반에서 20등인가…….
“아니, 만약이요. 만약. 예시를 든 거지 아직 유정이 얘기 중이에요.
아.
“아무튼, 계속 1등 하다가 이번에 17등을 했어요. 그런데 이게, 집안 사정으로 얘가 어떻게든 이번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해야 해요.”
사장이 기가 찬다는 듯 묻는다.
뭔 사정이 그따구냐? 어떻게 하긴, 인마! 그냥 네가 욕 처먹고 끝내! 성적 낮다고 죽냐?
“그렇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저 하나만 욕먹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회사의 방향성이 걸린 일이다.
한예림은 미국 대형길드 팀장직도 버리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지아는 돈을 끌어모아 회사에 투자했다.
한유정이 1등 하지 못한다고 망하는 건 아니지만, 당초 계획에 브레이크 걸리는 건 분명했다.
“사정이 조금 복잡해요. 그런데 저도 이런 거로 유정이를 압박하기 싫더라고요. 형 같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
나? 나였으면…….
골똘히 고민하던 사장이 말했다.
상 줬을 거 같은데?
“상이요?”
어, 상. 혼내가 싫다며? 그럼 의욕 끓어 올리는데 상 만한 게 없지.
상이라.
하긴, 대부분의 훈육이란 게 그렇지.
벌 아니면 상.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반색했다.
“그거 괜찮은데요?”
그치? 내가 인마! 이래 봬도 17살짜리 애 아빠야!
“형, 그러면요.”
어.
“상을 뭐로 주죠?”
사장이 곤란한 듯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린다.
어… 그런 건 선물이지, 선물… 비싼 거, 어? 그런 거 있잖아. 전교 1등 하면 주는 조건으로, 인마.
“비싼 거, 뭐요?”
비싼 거 있잖아.
“그니까 그게 뭔데요.”
그걸 인마, 니 애 선물을 왜 나한테 묻고 있어!
잘 말하다가 갑자기 성질이야?
“제가 애들한테 선물 사줄 일이 어디 있겠어요? 형은 딸 있으니까 많이 사줬을 거 아니에요.”
어… 인마, 그건….
“설마 서윤이한테 선물 사준 적 없어요?”
내가 의아스레 물으니 사장이 마구 헛기침을 한다. 딸 나이도 모르더니, 여러모로 대단한 양반이다.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형, 됐어요. 끊어요.”
야야, 잠깐만, 선물이라고 꼭 뭔가를 줘야 하냐? 동기부여만 해주면 되는 거잖아.
맞다. 2차 시험이 끝나고부터 한유정은 이미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거기에 조금 더 동기부여가 될만한 목적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2차 시험 때처럼 한눈을 팔지 않도록.
“좋은 생각 있어요?”
방금 났어. 굳이 선물할 필요 없겠더라고. 선물 같은 거 주면 걔 마음에 쏙 드는 거로 고를 자신 있냐?
게임이 있긴 한데.
동기 부여로는 아무래도 약하지?
“없… 죠.”
그래서 말인데. 그냥 공수표로 줘.
“공수표요?”
어, 공수표.
사장이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시험에서 1등 하면 소원 하나 들어주는 게 어때?
“소원이라….”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소원. 마법의 단어였다.
굳이 내가 고민할 필요 없이, 한유정이 원하는 거로 줄 수 있잖아?
그만큼 동기부여도 될 거 같고.
진짜 잔머리하고는.
감탄하며 대답했다.
“형, 그거 진짜 좋은데요?”
그치?
*
사장과의 통화를 끝내고 카페에 들려 디저트를 포장했다.
덜컹!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한유정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마중 나온다.
“오셨어요?”
후끈후끈한 열기도 느껴지고, 머리카락에 물기가 살짝 남은 걸 보니까 훈련 중이었나 보다.
“나 때문에 중간에 올라온 건 아니지? 훈련 끝났어?”
“네. 방금 끝났어요.”
“어이구, 그래. 샤워부터 하고 와.”
한유정이 돌연 어깨를 움찔 굳힌다.
“……저 냄새 나요?”
“냄새?”
“땀 냄새요.”
그 말에 코를 들이밀려는데 한유정이 냉큼 물러난다. 뭐야? 당황해서 쳐다보니까 도둑처럼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내가 말실수를 했나 보다.
“야야,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야. 땀 냄새 하나도 안나. 밥 먹기 전에 씻고 오라는 거지.”
“진짜요?”
“진짜. 향수 뿌린 줄 알았어.”
그제야 안심하고 슬그머니 다가온다. 포장 봉지를 발견한 한유정이 묻는다.
“아저씨, 뭐예요?”
“식후에 먹을 디저트. 요즘 관리한다고 설탕 끊고 살았잖아.”
“아.”
한유정이 슬픈 눈을 한다.
“관리 중이라 먹으면 안 되는데.”
힐끔 한유정의 배와 팔뚝을 살폈다.
이래 봬도 나름 눈썰미가 있다고 자신하는데, 최근 일주일 동안 한유정의 체중을 비교하면 솔직히 차이를 모르겠다.
일주일간 얼마나 빠졌겠냐마는, 딱히 관리 안 할 때도 부한 느낌은 없었는데.
“그동안 식단 조절했었잖아. 이거 무설탕이야. 아몬드 대신에 지방 먹는다 생각하면 괜찮지?”
한유정의 눈동자가 잘게 떨린다.
흔들린다, 흔들려.
매니저 입장에서, 그리고 일주일 뒤에 시험이 있는 한유정의 입장에서 이러면 안 되는 건 아는데…….
벌써 2주째다. 최근 냉장고 속 과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마 그대로 놔두면 더 크게 터질지도 모른다. 이거라도 한 번 먹여야지.
차라리 통제될 때 조금 풀어주는 게 낫겠지 싶다.
한유정이 미련이 뚝뚝 남는 목소리로 애써 부정한다.
“진짜 안 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맨날 닭가슴살, 샐러드, 오트밀만 먹고 있잖아.”
한유정의 손목을 잡았다. 한 손에 전부 들어오다 못해 남는다.
“솔직히 네가 관리할 데가 어딨냐? 오히려 체중 늘려야지.”
“그게 아니고 밸런스가 문제라….”
“두 개 사 와서 혼자 먹기는 너무 많은데. 같이 먹자, 응?”
갈대가 결국 쓰러진다. 한유정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오늘 한 번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씻고 나와. 준비는 내가 해놓을 테니까.”
“…네.”
한유정이 욕실로 들어간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냉장고를 열었다.
상 위에 뚝딱뚝딱 조촐한 식단이 올라간다.
오트밀, 닭가슴살 샐러드, 제로 콜라, 아몬드는 치즈 케이크 먹으니까 뺐다.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오랜만이어도 코가 기억하나 보다.
“아저씨, 다 씻었어요.”
씻고 나온 한유정이 잠옷 차림으로 식탁에 앉는다. 그리고 억지로 먹는 티를 팍팍 내며 샐러드를 비우고는 나를 쳐다본다.
들뜬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가득 차올라 있다.
“자, 여기.”
치즈 케이크를 건네자 한유정이 포크로 조심스레 끄트머리를 자른다.
조각상을 깎는 예술가의 얼굴이 저럴까?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며 턱을 괴고 쳐다봤다.
“유정아.”
“네?”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게임이요.”
그럴 줄 알았다.
지금 감수하는 고통과 비교하면 과연 맞는 보상인가 싶다.
동기부여로는 턱도 없지.
“그런 거 말고. 좀 더 본격적인 거 없어?”
“어, 그럼 기계식 키보드….”
역시 안 되겠다. 혹시 몰라 물었는데 나오는 게 이런 것들뿐이다.
“다른 게 아니라 이번 3차 시험에서 네가 성적을 좋게 내야 하거든.”
“알고 있어요.”
“뭐?”
“제가 1등 못하면 아저씨가 곤란해지잖아요.”
그걸 애가 어떻게 알지?
“내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잘해주고 있긴 한데, 조금 동기부여가 됐으면 해서. 회사 입장에서 네가 1등을 놓치면…….”
말하려다가 멈췄다.
회사 사정을 말해봐야 부담만 생기겠지.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네.”
“3차 시험에서 1등 하면 아무 부탁이나 하나 들어줄까 하는데.”
케이크를 입에 넣으려던 한유정이 동작을 멈추고 눈을 깜빡인다.
“네?”
“뭔가 걸어보려고 해도 생각이 도저히 안 나더라고. 그래서 그냥 내가 골라주는 것보다는 네가 고르는 게 낫겠다 싶어서.”
조금 유치하고 성의 없어 보이나?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봐도 안 떠오르고, 사장하고 종잇장 맞대서 나온 건 이거뿐이다.
“뭐든지 들어주시는 거예요?”
“뭐든 이라고는 조금 그렇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상관없지.”
그래도 어지간한 거는 내가 다 해결해줄 수 있을 거다. 뭐가 됐든 돈이 문제인 건데, 내가 돈이 부족할 일은 없으니까.
한유정이 시선을 내려 케이크를 쳐다봤다. 눈동자에 담긴 미련이 물러나고 굳은 결심이 서린다.
“아저씨, 저 먼저 일어날게요.”
“응? 케이크는?”
“안 먹을래요.”
깜짝 놀라 물었다.
“갑자기 왜 안 먹어?”
한유정이 약 오른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본다.
“……시험에 집중하려구요.”
“과자 먹고 싶어서 힘들어했잖아? 일부러 너 생각해서 저칼로리 디저트로 사 온 건데 이거만 먹어. 진짜 100칼로리도 안돼.”
나중에 식욕 폭발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살살 구슬리는 내 말에 결국 눈을 질끈 감고 고갤 돌려버린다.
“그만 유혹하세요. 아저씨가 그렇게 말씀하셔도 당분간은 절대 안 돼요.”
“진짜 안 먹을 거야? 솔직히 말하면 너 요즘 불안해 보여서 먹이려는 거야. 그냥 먹고 깔끔하게 일주일 더 참아.”
“아뇨.”
한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절대 안 먹을 거에요. 절대!”
그러면서 부엌을 떠난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치즈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전화기를 꺼냈다.
힐끔 보니 계단 앞에서 망설이던 한유정이 지하실 쪽으로 내려간다.
또 훈련하려는 모양인가 보네.
여보세요? 이야기 꺼내 봤어?
전화를 받은 사장이 다짜고짜 묻는다. 냉큼 고갤 끄덕이며 대답했다.
“효과 엄청 좋은데요? 형, 사실은 육아에 재능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가?
사장이 킬킬 웃었다.
*
문제는 일요일에 생겼다.
같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는데 옆자리의 한유정이 자꾸만 꼼지락거린다.
“아저씨, 부탁 하나만 드려도 돼요?”
“부탁?”
웬일이래? 부탁을 다 하고?
“뭔데?”
“다음 주 금요일에 3차 시험 있잖아요.”
“응.”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훈련하고 싶어서요. 같이 내려가 주실 수 있어요?”
여기서 귀찮다며 안된다고 하면 난 인간쓰레기지.
한유정은 열심히 하라고 혀로 살살 굴려놓고, 막상 훈련하게 도와달라니까 뒤로 빠질 수야 있나.
바로 소파에서 일어나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훈련할 수 있겠어?”
우리는 혹시라도 떨어질까 봐 어깨를 찹쌀떡처럼 착 붙이고 있었다. 운동하는데 많은 제약이 될 게 분명했다.
“아저씨, 예전에 헌터 준비하셨었잖아요.”
“그치.”
“그럼 운동 보조하는 것도 익숙하시죠?”
직접 해본 적은 없어도 보기는 많이 봤다. PT 트레이너가 항상 옆에서…….
“어, 유정아.”
“네?”
“설마 운동 보조해달라고?”
“네.”
당당한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 진심인가?
“그, 일단 네가 운동하는 무게를 내가 맞출 수가 없잖아.”
“무게 낮추면 괜찮아요. 오늘은 몸만 풀 거예요.”
“나는 어깨에 손만 데고 뒤에 서 있으면…….”
“운동하는 데 방해되잖아요.”
내 말을 가위처럼 뚝뚝 자른다.
한유정이 혼자서 척척 운동할 준비를 했다. 늘어진 엿가락처럼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들어온 건 파워렉이었다.
시발, 하필 스쿼트다.
정말 꼼짝없이 상상 속의 상황을 맞이할 거 같아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유정아, 그만하자.”
“네?”
“그, 운동 보조하면 좀 민망한 자세나 상황이 많이 나오거든. 특히 스쿼트는…….”
뒤에서 껴안아야 한다. 정말 남사스러운 포즈로. 가슴에 손도 닿는다.
동성일 때야 문제없지만.
이걸 애하고 어떻게 해?
“뭐가요?”
“으응?”
“스쿼트 보조해 주는 건데 민망할 이유가 없잖아요. 훈련하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저는 17살인데.”
한유정과 시선을 마주쳤다.
모르겠다.
평소 무뚝뚝하던 한유정의 표정에서 나름 어떤 감정 상태인지 잘 읽어낼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저 붉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지금은 도저히 모르겠다.
한유정이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혹시, 신경 쓰이는 이유가 있으세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혹시, 네가 불편할까 봐 그런 거지. 지켜야 하는 선이 있잖아.”
한유정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그녀도 아마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함께한 진짜 가족이 아니었다.
17살과 26살이 돼서 뒤늦게 만난 남이었고, 이럴 때 변명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녀 사이인데.”
굳어있던 한유정의 입가가 사르르 녹아내린다.
고혹적으로 느껴지는 묘한 웃음이다.
“괜찮아요, 아저씨.”
한유정이 부드럽게 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스멀스멀 기어오른 시선이 내 얼굴을 천천히 훑는다.
“저 진짜 하나도 신경 안 써요. 허리 잡아주세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