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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57화 (57/112)

〈 57화 〉 역대급 유망주 (2)

* * *

나예정의 말에 유망주가 맞장구쳤다.

“그러니까요. 이지아가 대단한 거지 지가 대단한 거에요?”

그녀도 계약 이야기가 오갔었다.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설마 김현우가 계약을 엎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머리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계약서를 생각하면 열이 뻗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유망주라는 건 말은 화려하지만 결국 반쪽짜리였다.

한유정처럼 도드라지는 경우가 아니면 기성 헌터들한테 투자하는 게 보통이었다.

대형 회사 소속임에도 유망주인 그녀들이 여태껏 홍보된 거라고는 신문사에 반면 분량도 안되는 인터뷰 기사 몇 줄뿐.

하지만 협회는 달랐다.

계약은 체결되기 바로 직전에 무기한 보류가 됐지만, 방송사와 연줄이 닿아있는 협회에서 때마침 특집 편성 중이던 방송에 태산 길드 유망주들을 꽂아 넣었다.

시청률 1%는 될까 싶은 심야 시간대의 1시간짜리 방송. 헌터를 한다니까 반신반의하던 지인들한테서 연락이 폭주했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사연에 인터넷 기사들도 몇 개 올라갔고.

자연히 길드에서도 대우가 달라졌다.

협회의 지원으로 성장 가능성을 더 높게 본 건지, 훈련지로 유명한 온천에까지 보내줬다.

꿈같은 나날이었다.

이지아와 김현우가 협회 턱에 주먹을 날리기 전까지는.

나예정이 손톱을 까득 깨물며 말했다.

“지금 자기 때문에 피해 본 사람이 몇 명인데, 그걸 조금 따졌다고 고갤 뻣뻣하게 세우고 있어. 짜증 나게.”

유망주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음침하게 녹음이나 하고. 대화 내용 들었어요?”

“SNS에 올라온 거?”

“네, 목소리 살벌하게 꼭 한 대 칠 거처럼 말하는데. 얼굴은 사근사근하게 생겨서 하는 짓은 완전 쌈닭이에요, 쌈닭.”

나예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저놈을 어떻게 엿먹이지?”

유망주가 눈을 크게 뜨며 옷자락을 와락 잡았다.

“언니! 사람 때리면 큰일 나요!”

“아이씨, 너는 말을 해도… 내가 깡패도 아니고 누가 사람을 때리겠데? 만날 때마다 얼굴 보기 불편하니까 골탕 좀 먹이고 싶다는 거지.”

세면대를 집은 나예정이 입가를 비뚜름히 올렸다.

“이지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게… 같은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한 번을 안 마주 칠 거 같아?”

김현우는 한유정의 매니저였다. 동 세대에 데뷔한 헌터인 만큼, 일하다 보면 마주칠 일이 많을 거다.

대형 길드의 유망주와 이제 막 출범한 길드의 유망주.

헌터의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게 길드였다. 태산 길드 매니저가 항상 하는 말이었다. 여기저기 연줄이 있는 대형 길드는 유망주들을 던전 공략대에 꽂아 넣기도 쉽기 때문이다.

“나중에 마주치면 뒤졌어. 헌터 시험장에서나 동등한 위치지. 업계 나가서까지 우리하고 지들하고 똑같은 줄 알아?”

“어떻게 하시려고요?”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

나예정이 이상함을 의식하지 못하고 대답했다.

“어떻게 하긴? 헌터가 매니저 괴롭히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데. 일할 때 온갖 쿠사리를 넣어도 길드 작으면… 응?”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웬 소녀 한 명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입술에 칠한 삐뚤삐뚤한 립스틱 때문에 헷갈렸지만 나예정은 결국 소녀를 알아봤다. 익숙한 얼굴이다. 유망주 신분으로 모를 수가 없다.

“한유정?”

김현우가 담당하는 헌터였다. 한유정의 어깨너머를 보니까 방금까지 닫혀있던 칸막이의 문이 열려있었다.

“김현우가 왜 여자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나 했더니… 다 들었겠네?”

나예정의 반말에 한유정이 나예정과 유망주 사이로 어깨를 들이밀었다. 유망주가 어어 하며 뒤로 밀려났다.

“그쪽이 말 하는 거처럼 치마폭에 숨는 어른 아니에요. 아저씨가 저희를 도와줬으면 도와줬죠.”

쏴아아─!

한유정이 수도꼭지를 돌리며 차분히 말했다.

“협회가 줬던 계약서 제대로 읽어보셨어요?”

“뭐?”

“모르고 사인할뻔한 거면 아저씨한테 고마워하세요. 제 매니저 함부로 욕하지 마시고요. 화장실에서 다른 사람 뒷담화 하는 거, 찌질하지 않아요?”

나예정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녈 쳐다봤다. 담담히 시선을 받아내던 한유정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떠났다.

“…….”

한 발자국 물러나서 지켜보던 유망주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언니, 괜찮…….”

나예정이 발등으로 타일 바닥을 쿵쿵 찍으며 외쳤다.

“짜증 나, 진짜! 쟤네는 뭔데 쌍으로 지랄들이야?”

*

시계를 확인했다. 얘가 왜 이렇게 늦지? 화장실 앞에서 버티고 서있으니까 꼭 장승이라도 된 거 같다.

“아저씨, 많이 기다리셨죠?”

맑은 목소리. 어느새 옆에 선 한유정이 미안한 듯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까하고 달라진 생김새에 머리가 얼떨떨해진다.

“…유정아.”

“네?”

“너 화장했어?”

“티 나요?”

티 나냐고?

당연히 티 나지!

“립스틱이 이게 뭐야? 엉망진창이잖아! 출발하기 전에 지아 씨한테 부탁하지, 왜?”

화장실 간다는 게 화장하려고 간 거였구나.

왜 이렇게 늦게 나오나 했네.

한유정이 더듬더듬 변명한다.

“아침에 늦은 거 같아서 말씀 못 드렸어요. 시간 나면 제가 하려고요.”

아침에 좀처럼 일어나지 않아서 서두르라고 재촉했는데 그게 문제였나보다.

입술의 1.5배 면적으로 칠해진 립스틱을 보고 있으니까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화장을 직접 하는 건 아마 처음일 거다.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문질러줬다. 한유정이 잠자코 서 있었다.

“방송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화장을 왜 했어?”

“화장한 게 더 이쁘잖아요.”

“뭐? 야, 넌 화장 안 해도 충분히 다른 사람들 못생기게 만들고 있으니까 안 해도 돼!”

터벅터벅, 여자 화장실에서 때마침 나예정이 나온다. 시선을 마주친 그녀가 혀를 차며 지나갔다.

나예정에게 들리지 않도록 한유정의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기 봐봐, 대왕오징어 걸어가잖아. 원래는 평범한 오징어였는데 너 얼굴 보고 봐서 그래.”

미처 웃음을 참지 못한 한유정이 설핏 미소 짓는다.

드디어 웃네.

화장실에서 나올 때부터 표정이 워낙 안 좋아서 걱정됐는데. 찡그려진 눈썹이 펴진 걸 보니까 이제 안심된다.

“아저씨, 있잖아요.”

응?

한유정이 입가에 번진 립스틱을 손등으로 훔친다.

“어디서 들었는데. 신입 헌터가 담당인 매니저는 많이 무시 받는데요.”

“그래?”

“네, 담당하는 헌터 따라 매니저 처우도 많이 달라지나 봐요.”

태산 길드 매니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똑같은 말이었다. 한유정이 아니라 이지아를 담당했으면, 나예정이 그렇게 고압적으로 못 나왔을 거라고.

실제로도 이지아가 등장하자 딸꾹질을 하며 도망쳤었지.

매니저를 보며 설마 그 정도까지 겁을 먹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태도는 달랐을 거다.

한유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저씨 무시 받지 않게 해드릴게요. 꼭.”

*

2차 시험은 협회가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원래부터 업계에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불법 로비 건이 폭로되면서 민낯이 샅샅이 드러났다.

팀 선정에 대한 신뢰성을 상실한 것이다. 앞으로 정말 랜덤으로 설정한다 쳐도 이야기는 꾸준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번 시험이 끝나면 2차 테스트는 종목이 완전히 달라질 거다. 다만, 이번 회차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보복 행정으로 갑질 논란이 불거지며 협회가 안팎으로 얻어터지고 있었다.

사건 뒷수습한다고 일 벌여놓은 것들도 다 멈춘 상태였다. 당장에 새로운 시험 기준을 준비해야하는데 그게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국, 욕 처먹고 의심받을 걸 알면서도 2차 시험을 그대로 강행해야 했다.

시스템 직원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모니터 속 이름을 쳐다봤다.

[한유정]

한유정.

1차 시험에서 두각을 드러낸 유망주.

서류에는 길드가 없다 나와 있지만 바스타드 길드에 속해있는 게 분명하다.

협회 녹취 파일을 냅다 공개해버린 김현우가 한유정의 매니저로 활동 중이었으니까.

마우스를 들고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가 한숨을 푹 쉬며 기지개를 켰다.

“뭐해?”

감독관이 커피를 마시며 다가왔다. 직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이번에 팀 짜인 거 보고 있었어요.”

“리스트 이미 입력돼서 내려온 거 아니었어?”

“내려왔는데. 자꾸 눈이 가서요.”

“왜?”

“혹시 팀 조작한다 뭐다 말 나올까 봐요. 한유정은 특히 주목받고 있으니까, 한 번 더 보고 있었어요. 팀원 어색하게 짜이지 않았나.”

감독관이 직원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걱정도 팔자다. 이 짓거리 한두 번 하냐? 괜히 건들지 말고 그대로 내보내.”

불법 로비 건으로 협회가 잠깐 움츠러들었지만 달라진 건 전혀 없었다.

원래는 대형 길드의 입맛대로 움직이던 팀이 이번엔 협회 사정에 맞게 짜였다.

불법 로비야 사진으로 찍혀서 빼도 박도 못하게 걸린 거지만 주최 측 농간은 외부에서 어떻게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칼자루를 쥔 건 여전히 협회였다.

“이번에 협회하고 계약할 헌터들한테 지원 빠방하게 한다더니.”

리스트를 쭉 훑어본 감독관이 헛웃음을 지었다.

“성적 좋게 나올 거 같은 상위권들하고는 싹 다 짝지어줬네. 다들 데뷔 화려하게 하겠어.”

“협회 쪽 헌터가 누구누군데요?”

“너 일도 아닌데 알아서 뭐 하게?”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죠.”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해, 인마. 가서 발표 준비 다시 확인해보고.”

직원이 머쓱하게 자리를 떠났다. 감독관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휠을 드륵, 드르륵 내리는데 문득 한유정의 이름에 시선이 갔다.

전처럼 수상쩍을 정도로 한유정에게 안 좋은 팀원들을 미뤄주지 못한다.

고의로 떨어트리려던 정황 때문에 시선이 가장 쏠려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스타드 길드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협회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생각했다.

어차피 못 건들 거, 한유정을 재활용해서 발판으로 만들자고.

보복 행정으로 협회의 활동이 전부 멈추면서, 엎어진 계약이 있었다.

일부 헌터들을 지원해주겠다는 계약.

유망주들이 헌터 시험을 통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스타트 라인이 달랐으니까. 길드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는데 떨어지는 거부터 말이 안 됐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건 몇 등으로 데뷔하냐이다. 향후 얼마만큼 성장할지 가늠하는 척도였으니까. 회사에서는 성적대로 지원해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협회는 지원 중인 유망주들을 한유정에게 기생시키는 식으로 팀을 짰다.

감독관이 모니터 속 리스트를 확인했다.

4팀 2조

[한유정]

[나예정]

[박지훈]

[나은정]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나예정이라고 했나.”

기억난다.

1차 시험에서 상위권을 기록했지만 그뿐이었다. 한유정처럼 화제를 몰고 온 유망주는 아니었다. 능력도 2차 시험하고 맞지 않았다. 그대로 시험을 진행했다면 아마 기존 성적도 유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협회에서는 나예정을 한유정에게 붙여줬다.

높은 성적을 기록하도록.

“한유정하고 팀 되고… 얘는 완전 땡잡았네.”

감독관이 후룩, 커피를 마시며 작게 중얼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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