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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56화 (56/112)

〈 56화 〉 역대급 유망주 (1)

* * *

소파에 앉아 한유정과 게임을 했다.

“유정아, 힐팩 남는 거 있어?”

“네, 이거 아저씨 드세요.”

한유정이 힐팩을 바닥에 떨군다.

그걸 줍다가 문득 그녀의 캐릭터가 눈에 들어왔다.

정수리에서 피를 질질 흐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뭐야?

고갤 돌려 한유정이 쓰는 모니터를 확인했다. 시야가 시뻘겋게 점멸하고 있었다. 사실상 즉사 직전이라는 의미다.

내 피 통은 그래도 주황색인데, 이걸 뺏어 먹긴 좀 염치없지.

“야, 너 물리면 바로 죽겠다. 너 써. 이걸 왜 날 줘?”

“저는 힐팩 없어도 살아남을 수 있어요. 아저씨 드세요.”

“됐고 너 쓰라니까?”

힐팩을 가방으로 옮겨주려니까 한유정의 캐릭터가 냅다 도망간다. 그러다가 구석에서 튀어나온 좀비한테 물려 죽었다.

[DEAD]

한유정이 충격받은 얼굴로 사망 화면을 바라본다. 일련의 과정이 웃겨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아, 아저씨, 머리 망가지는데….”

외출할 일도 없는데 머리 망가지는 게 뭐? 무시하고 쓰다듬었다. 말처럼 싫지만은 않은지 한유정도 마주 웃으면서 가만히 있었다.

“얼씨구?”

한예림이 소파에 털썩 몸을 파묻혔다. 그녀가 거뭇거뭇한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동생처럼 생각하는 건 알겠는데, 밖에서 그러면 안 좋은 소문난다.”

“무슨 소문?”

“남녀 둘이서 날 만한 게 뭐 있겠어?”

“갑자기 이상한 말은….”

쓰다듬던 손 민망해지게 이상한 말을 하고 있어? 한유정도 어깨를 바싹 굳히고 있잖아.

뻘쭘하게 팔을 내리는데 한예림이 코웃음 친다.

“나나 이지아야 그럴 리 없다는 거 잘 알지. 그런데 자극적인 소문이 어디 사정 봐가면서 퍼져? 이성이 담당이면 원래 매니저가 더 조심해야 해.”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웬일인지 새침한 얼굴로 앉아있는 한유정을 보니까 손이 근질근질해진다.

한마디 또 들을라.

갑자기 한예림이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한유정을 쳐다본다.

“유정아, 요즘 힘든 일 없어? 현우가 억지로 강행군을 한다던가, 스케줄 안 풀린다고 윽박지르거나. 뭐든 말해봐.”

목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친절했다. 한유정이 대번에 경계하는 기색을 띠며 내 등 뒤로 숨는다.

“…없는데요.”

“현우가 잘해주는구나? 그치?”

한유정이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네, 엄청요.”

뭐지? 이 흐뭇한 감정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처럼 가슴이 간질간질거린다.

“그래서 말인데, 길드도 만들어졌고 이제는 우리도 계약서를 슬슬 작성할 때가 됐거든.”

답지 않게 목에 기름칠을 좔좔 바르더니 그런 이유였구만?

테이블에 앉아 계약서를 확인했다. 전에 이지아가 작성했던 계약서하고 양식이 달라 보이진 않았다.

“계약서는 나중에 유정이가 가져가서 제대로 확인해보고.”

한예림이 테이블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괬다.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유정아, 미성년자가 계약하려면 보호자가 필요해.”

“네…? 보호자요?”

“응, 보호자 동의 없이 계약하면 나중에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거든.”

한유정의 안색을 살폈다. 어린 마음에 반발심이라도 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다만, 무언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거 같았다.

“현우하고 너 사이도 알고 있으니까 이것저것 따지기는 싫은데, 이런 건 나중에 말 나오지 않게 처음부터 확실히 하고 싶어서.”

“아저씨가 제 보호자예요.”

“음.”

한예림이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다.

“법정 대리인이 필요한 거라 현우는 안돼. 친척은 혹시…….”

“연락 안 돼요.”

한유정이 단호히 말을 끊었다. 망설이던 그녀가 되물었다.

“아저씨로는 안될까요?”

“전에 서류 떼온 거 확인해봤는데, 후견인이 친척 이름으로 등록돼있더라고.”

“…….”

“그러니까──”

말하는 와중에 내가 끼어들었다.

“보호자 문제는 내가 처리해놓을게. 나중에 다시 말하자.”

“뭐?”

먹구름 낀 한유정의 얼굴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한예림이 입을 벙긋 거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은 인정으로 하는 거 아니다. 덕분에 도움받았던 것도 많아서 내가 이런 말 하긴 뭐한데, 그거 고쳐야 해.”

“그럼. 나도 알아.”

“……말을 말자. 계약서는 최고 대우로 해놨으니까, 어떻게든 동의만 받아와. 그것도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던가.”

한예림이 외투를 어깨에 걸치며 일어났다.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걸며 떠나던 그녀가 다시 돌아와 문틈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아, 그리고.”

“응?”

“2차 시험 관련해서 협회 공문 내려왔어. 확인해봐. 나머진 믿고 맡긴다.”

불법 로비와 SNS 폭로 이후.

한예림은 깍두기처럼 보던 내게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교우 관계와는 다른, 일적인 믿음 말이다.

여태까지는 친구라 데려가려 했었다면 지금은 유능한 직원처럼 보는 느낌이다.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능력을 증명해야 계속 한유정을 담당할 수 있는 거지. 나중에 들어올 매니저들도 납득하고 물러날 테고.

이 자리를 빼앗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켰다.

*

일주일 뒤, 2차 시험 당일날.

협회 근처 포장마차에서 한유정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하고 있었다.

메시지가 도착했다.

[말씀하신 장비 사업체 주식 전량 매수했습니다.]

투자회사가 보유한 게 몇 주고, 지분율이 얼마고, 이후 수익률 전망이 어떻고, 배당금이 얼마인지 등 여러 지표가 이메일로 도착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꺼버렸다. 수익은 중요하지 않았다. 닭꼬치를 우물거리던 한유정이 묻는다.

“아저씨, 뭐 하세요?”

“칼날 가는 중.”

“네?”

“그런 게 있어.”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확인했다. 집합 시간까지는 아직 꽤 남았다. 시간이나 때울 겸 시험장 근처를 걸었다.

우리보다 일찍 도착한 헌터와 매니저들이 바글바글했다. 인파 사이를 지나가며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는데, 문득 내 이름이 들렸다.

“저거 바스타드의 한유정 아니야? 옆에는 김현우인가?”

“김현우? 누군데요?”

“협회에 들이박은 매니저. 웬 꼴통인가 했더니, 신입 매니저가 운도 좋지. 한유정이 담당이야? 부럽네.”

적당히 흘려 넘기며 콜라를 꺼냈다. 옆에 서 있던 한유정에게 건네니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받는다.

“잘 마시겠습니다.”

캔 뚜껑을 까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마주쳤다. 한유정이 고개를 갸웃한다.

“왜 그러세요?”

“그냥, 의문이 들어서.”

“어떤 의문이요? 말씀하세요. 알려드릴게요.”

“용돈 어디다 썼나 하는 의문.”

음료 하나도 소중하게 마시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내 말을 들은 한유정이 고개를 돌리고 꿀꺽꿀꺽, 콜라만 넘긴다.

진짜 언젠가 꼭 알아내고 만다.

한유정과 함께 강당으로 걸어갔다. 벌써 세 번째 오는 곳이라 이제는 제법 눈에 익었다. 화장실 앞을 지나가는데 발걸음 소리가 멈춘다.

돌아보니 볼을 붉힌 한유정이 쭈뼛대며 서 있었다.

“아저씨….”

“응?”

“저 잠깐 화장실 좀 들렀다 갈게요.”

“어, 그래? 앞에 있을게. 천천히 나와.”

포장마차에서 오뎅 국물을 그렇게 마시고, 방금 콜라까지 원샷했으니.

화장실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가만히 한유정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저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무리와 시선을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들이다. 온천에서 마주쳤던 유망주들이었다.

“에이씨, 뭐야?”

가장 앞에선 나예정이 짜증스레 말을 걸어온다.

“여자 화장실 앞에서 뭐 해요? 변태예요?”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내면에서부터 귀찮은 티를 팍팍 끌어 올리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네.”

“재수 없어.”

나예정이 인상을 찌푸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미친년. 구석에서 눈치 보던 다른 유망주도 그녀를 따라갔다.

*

화장실에 들어온 나예정이 거울을 바라봤다.

이지아와 협회가 부딪힌 걸 아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사건을 주도적으로 이끈 게 김현우라는 건 잘 몰랐다.

나예정이 그런 김현우의 이름을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협회에서 제안했던 계약을 보류되게 만들었으니까. 원인이 뭔지 찾던 도중 나온 이름이 김현우였다.

짜증 났다.

계약만 하면 탄탄대로가 앞에 쫙 깔려 있었다.

헌터를 꿈꾸는 유망주들에게는 꿈같은 지원이었다. 그게 엎어졌다. 그래서 첫 만남부터 좋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언니, 괜찮아요?”

나예정의 표정이 좋지 않자 유망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그냥 기분 나빠서 그래.”

“왜요?”

“화장실 앞에 있던 멀대 때문에.”

“아.”

지금이라도 나가서 속 시원하게 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강하게 박힌 이지아의 말이 그녀를 말렸다.

­내 눈에 띄지 마라.

같은 길드라서 감싸주는 거 같지는 않았다. 그거보다는 좀 더, ‘내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나이는 같지만, S급 헌터와 유망주.

업계에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나마 화장실에서 뒷담화나 까는 게 전부였다.

“김현우 걔 있잖아.”

“김현우요?”

“온천에서 시비 걸리니까 이지아 뒤로 숨었잖아.”

나예정이 빈정거렸다.

“여자 뒤에 숨어서는 자기가 잘난 줄 아는 거, 좀 찌질하지 않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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