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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54화 (54/112)

〈 54화 〉 호텔에서 생긴 일 (3)

* * *

“야, 그 손 안 놔? 미쳤어?”

이지아의 서늘한 목소리에 나예정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신경질적으로 모래 해변을 발로 쿡쿡 찌르며 소리 질렀다.

“당신은 또 뭔데? 이 멀대하고 동행이야?”

뭐? 멀대?

이지아가 팔짱을 낀 채 내 앞을 척, 가로막는다.

갑자기 마음이 든든해진다.

방금까지는 하이에나들한테 몰린 거처럼 위협적이었는데.

지금은 셋째 돼지가 지은 벽돌집에서 담요를 덮고 모닥불을 쬐는 느낌이다.

“동행 맞는데, 현우 씨가 그쪽한테 뭐 실수라도 했어요?”

이지아가 차분히 물었다. 무슨 말을 하나 기다리던 나예정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당연히 했죠!”

“뭔데요?”

“저 사람이 협회하고 싸웠잖아요! 몰라요?”

미친년.

설명하는 수준을 보니까 크게 될 사람은 아닌 거 같다.

이지아도 어이없다는 듯 젖은 머리를 쓸어넘긴다.

“협회랑 싸운 거하고, 그쪽이 지금 현우 씨한테 시비 거는 거하고. 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협회에서 우리한테 전폭적인 지원 약속했는데, 저기 멀대가 보복 행정 당한 거 폭로해서 일 커졌잖아요! 협회가 당장 다른 프로젝트에 돌릴 여력이 없어진 게 누구 탓인데?”

이지아가 실소를 머금는다. 어이가 없을 거다. 나도 들으면서 어이가 없는데. 이지아는 사건 당사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니까 그쪽 말은, 이지아가 협회에 당하고만 있었어야 한다?”

“누가 그렇게까지 말했어요?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조용히 넘기던가… 남 잔치상에 재 뿌렸으면 미안한 줄이나 알던가!”

무려 협회의 지원이다.

연예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방송에 홍보시켜주고, 최신 장비들을 가장 먼저 사용하게 해주며, 중요한 일을 앞둘 때는 이곳 온천 같은 최상의 훈련지를 제공해준다.

협회는 그저 나중에 써먹기 좋은 사냥개한테 단백질을 섭취시켜준 거에 불과하지만, 헌터들 입장에서는 로열 로드가 쫙 깔린 거처럼 보였을 거다.

그래서 나예정과 유망주들은 엎어진 기회가 안타까운 것이다.

마음에 안 들었겠지.

자기들의 성공 가도를 엎어버린 원인이 눈앞에 있는데.

“대체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 계약이 바로 코앞이었는데…… 일주일만 늦게 터트리던가!”

허, 이지아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듣자 듣자 하니까 어이가 없네.”

“뭐요?”

“현우 씨가 협회하고 싸우는데, 그쪽 계약까지 신경 써가면서 일해야 해요? 왜, 그쪽은 길가 걸을 때도 개미 죽을까 무서워서 짚신 신고 다니시겠네?”

이지아가 힐끔 나예정의 신발을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운동화인데. 짓밟혀 죽은 개미들은 불쌍해서 어떻게 사나 몰라.”

비꼬는 말투에 나예정이 신경질적으로 이지아를 쏘아본다. 눈가에 짜증이 가득했다.

“너는 뭔데 갑자기 끼어들어서 자꾸만 시비야? 관계자 아니면 빠져!”

“저요?”

이지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사건 당사자니까 끼어들죠.”

정적이 내렸다.

뒤에서 험악한 시선을 보내던 유망주들도. 그 눈빛을 꼭 응원처럼 받아내며 싸우던 나예정도.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지아를 쳐다본다.

그녀와 함께 걸어가면, 전혀 무관한 일반인들도 세 걸음마다 한 명씩 아는 체 해온다.

그런데 헌터 업계에 몸담은 유망주가 이지아를 못 알아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끅!”

한참 뒤에 나예정이 가슴을 들썩이며 딸꾹질을 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식은땀을 질질 흐른다.

“이, 이지아? 아니, 이지아 님? 왜, 왜 여기에….”

좆됐다, 이걸 어떡하지?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얼굴에 유성 매직으로 떡하니 적혀있었다.

이지아가 횡설수설하는 나예정에게 얼굴을 들이민다. 잔뜩 쫀 나예정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다가 벽에 등을 부딪쳤다.

이지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예, 네?”

“내 눈에 띄지 마라.”

나예정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이지아가 팔짱을 끼며 뒤로 물러났다. 턱짓을 하자 유망주들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이지아가 선글라스를 코 위에 걸치며 내게 다가온다.

“지아 씨, 밤중에 선글라스 끼고 있으면 앞에는 보여요?”

“잘 보여요. 특수 제작된 거라. 밤눈도 밝은 편이구요. 아니, 지금 그게 궁금하신 거에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저야 뭐….”

나예정도 액션만 커다랬지 어딜 때리고 한 건 아니었다. 팔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며 멀쩡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지아가 이맛살을 작게 찌푸렸다가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현우 씨 기다릴까 봐 일찍 나온 건데, 다행이네요. 진짜 사람이 맨날 겁도 없이…….”

“에이, 그 사람들도 진짜로 저 때리려고 한 건 아닐걸요. 여기 근처에 헌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뒷감당 생각 안 하고 내지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자기 몸 좀 걱정하세요!”

나는 이지아의 잔소리를 적당히 웃어넘겼다.

*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뒤늦게 짐을 정리했다. 1박 2일 여행이라 트렁크 가방에 내용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잠옷하고 다음날 입을 옷 한 벌 정도.

그렇게 정리를 마무리하고 잘 준비를 하는데, 큰 문제가 생겼다.

침대의 이불을 젖힌 내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잘못 봤나 싶어서 두 눈을 비벼봤는데 그대로였다.

대체 이걸 왜 지금 확인한 거지?

철렁이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이지아를 찾았다.

“그, 지아 씨…?”

아직 짐 정리를 끝내지 못한 이지아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본다.

입이 도저히 뚫리지 않았다.

결국 이지아가 먼저 재촉했다.

“왜 그러세요?”

“제가, 이게 진짜, 맹세코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이지아가 당황한 내 얼굴을 보고는 아하하, 웃는다.

“현우 씨 당황하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사람이라도 죽였어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 방을요.”

“네.”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던 이지아의 얼굴이, 이어지는 내 말이 와르르 무너졌다.

“트윈룸이 아니라 더블룸으로 잡은 거 같아요. 그러니까, 침대가 하나에요.”

“…네? 하나요?”

이지아가 트렁크 가방을 닫고 다급히 침대를 확인한다.

2인용 사이즈 하나뿐이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묻는다.

“어, 어떡하죠?”

원래 같이 잔다는 게 우리한테는 썩, 어색한 상황은 아니었다. 일요일마다 한유정의 천살성 때문에 항상 붙어있어야 했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 이지아, 한유정 세 명이 함께였다.

그리고 집이었고.

살을 부대끼면 의식은 되지만, 그 이상은 없으리란 걸 서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호텔이었다. 한유정은 없고 이지아와 나, 단 둘뿐이다.

그게 문제였다.

“잠깐만요. 일단 프런트에 방 하나 더 있나 물어볼게요.”

능력이 개발되며 범위가 아닌 이지아와 한유정 개인에게 포커스를 맞출 수 있게 됐다. 범위로 쓸 때보다 능력의 효율성은 떨어지지만, 개인에 한해서는 오히려 우월한 효능을 보였다.

이지아 한 명에게 능력을 집중했을 때, 떨어져도 되는 거리는 대충 50m.

그 안에만 들어오면 된다.

몇 번의 수신음이 울리고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혹시 남는 방이 있냐고 물었고, 직원은 성수기라 방들이 모두 꽉 차 있다고 대답했다.

철컥!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이지아가 구석에서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긴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우 씨….”

“네?”

“저 잠깐 샤워 좀 하고 올게요…….”

“방금 온천 갔다 왔잖아요? 또 씻게요?”

내 물음에 이지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뒤늦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고 머리를 쥐어 잡았다.

김현우 이 병신아, 그걸 대체 왜 물어본 거야?

*

이지아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에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현실감이 없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SNS에 접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나: 뭐해?]

답장이 곧바로 돌아왔다.

[패왕 지아: 폭포 맞으면서 불경 외우고 있어.]

뭔 말인지 모르겠네. 혹시 현실에서 도 같은 걸 수련하는 사람인가?

[나: 혹시 안 바쁘면 상담 좀 가능해?]

[패왕 지아: 뭔데?]

‘나도 너처럼 여자 친구하고 호텔에 왔는데’, 까지 썼다가 쫘르륵 삭제했다. 나도 모르게 남자인 걸 밝힐뻔했다.

적당히 고쳐서 다시 적었다.

[나: 나도 너처럼 친구하고 호텔에 왔는데, 예약한걸 확인하고 보니까 트윈룸이더라고.]

[패왕 지아: ????]

[패왕 지아: 진짜로???]

[나: ㅇㅇ 왜?]

[패왕 지아: 미안, 그래서 그다음은? 빨리 말해봐.]

[나: 어색하게 있다가 지금 친구가 잠깐 샤워한다고 욕실에 들어갔는데…… 이거 혹시 신호인가?]

메시지 옆의 1이 사라지고, 욕실에서 쿵! 벽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아 씨? 괜찮아요?”

“어어, 네! 현우 씨 저 괜찮아요! 끄떡없어요!”

끄떡이야 없겠지. S급 헌터인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침대로 돌아와 앉았다.

[패왕 지아: 그, 만약인데. 진짜 만약인데.]

[패왕 지아: 만약 반대의 상황이면, 남자들은 약간 그런 기대를 하려나…?]

[나: 내가 먼저 물었잖아.]

[패왕 지아: 갑자기 나도 궁금해져서 그렇지!]

남자라.

남자 마음은 내가 잘 알지.

[나: 살짝…?]

메시지를 보내고 곧바로 전화가 왔다.

우웅! 우우웅!

한유정이었다. 받으려다가 갑자기 뭔가 꺼림직해졌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잘못을 저지르려다가 애인한테 딱 걸린 느낌이다.

수신 거절을 누르고 메시지를 작성했다.

[미안, 유정아. 슬슬 자려고. 나중에 통화하자. 내일 일어나면 아침 꼭 챙겨 먹어]

메시지를 보내고 초조하게 팔짱을 꼈다.

드르륵!

욕실의 문이 열리며 이지아가 나왔다. 힐끔, 날 쳐다본 그녀가 삐걱대는 팔다리를 움직이며 침대에 앉았다.

바스락, 바스락.

등 뒤로 살결에 잠옷이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현우 씨?”

“어, 네?”

등 뒤를 돌아봤다. 베개에 머리를 기댄 이지아가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 자요?”

“……자야죠.”

우리는 평소의 일요일처럼 가까이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서 그런가?

이지아한테서 싱그럽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그 단내에 정신을 못 차리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이지아와 숨결이 섞일 정도로 코가 맞닿아 있었다.

서로 어색하게 시선만 마주치다가 먼저 입을 연 건 그녀였다.

“현우 씨는 왜 그렇게까지 저를 도와주는 거예요?”

“네?”

“청문회 때도 그렇고, 이번에 협회하고 싸운 것도 그렇구요. 항상 현우 씨한테 도움받았던 기억밖에 없거든요.”

헌터를 지망하는 모든 사람이 가장 먼저 바라보는 이름은 이지아였다.

그건 잠시나마 헌터를 꿈꿨던 나도 다르지 않다.

“지아 씨를 보고 있으면…….”

“보고 있으면?”

“속에서 열불이 나더라고요.”

대체 어떤 말을 기대한 건지, 당황한 이지아가 눈을 깜빡인다.

“네?”

“맨날 당하고만 살잖아요. 옆에서 보면 얼마나 열 받는지 알아요? S급 헌터답게 좀 뻐기고 그래 봐요. 사람이 순둥순둥해서…….”

대체 왜 맨날 협회에 당하고 사는 거야?

이지아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까 저 못 봤어요?”

“뭐를요?”

“현우 씨가 이상한 사람들한테 맞을뻔한 거 구해주고, 대신 싸워준 거요. 저도 어디 가면 한 성격해요.”

어이가 없어서 한참 동안 웃었다.

그게 한 성격하는 거면 나는 아마 호랑이쯤 되고, 한예림은 드래곤 정도 될 거다.

그렇게 웃고 나니까 대화가 애매하게 끊겼다. 묘한 침묵이 감돈다.

서로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냥 눈을 감았다.

고요 속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음란 마귀에 쓰였었구나, 하는 생각이.

대체 뭘 은연중에 기대했던 거야?

“현우 씨, 자요?”

잘 리가 있나. 눈감은 지 일 분밖에 안 지났는데. 아니요, 라고 대답하려는데 이지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만, 눈 감고 있어 줄래요…?”

“네?”

야릇한 감정이 입 밖으로 나올 때였다.

쿵쿵쿵!

갑자기 누군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눈을 뜬 내가 이지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몽롱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확 내려간다.

쿵쿵쿵!

다시 들리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침대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제가 보고 올게요.”

“……네.”

이지아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작게 웅얼거린다.

내일 집 돌아갈 때 큰일 났네. 어색해서 어떡하지?

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 때문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집에 있어야 할 한유정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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