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호텔에서 생긴 일 (1)
* * *
박 변호사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축하드립니다, 대표 이사님.”
히죽이며 손을 마주 잡았다.
“감사합니다, 박 변.”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요?”
“드라마에서요. 재벌들은 변호사 부를 때 항상 이렇게 말하던데요.”
박 변호사가 숨넘어갈 것처럼 크게 웃으며 소파에 앉는다.
청문회 때부터 일 관련으로 꼬박꼬박 마주치다 보니까 이제는 제법 관계가 편해졌다.
능력 있는 친구는 가까이. 믿음 가는 친구는 더 가까이.
박 변호사는 유능한 남자다. 청문회, 고발문 작성부터 몇 가지 의뢰한 일들을 모두 깔끔하게 해결했다. 의뢰인에 대한 신의도 있다.
멀리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내 참, 무슨 매니저 월급이….”
“제가 좀 받죠?”
“좀이요? 지금 좀이라고 했어요?”
박 변호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무슨 장난감 은행 수표도 아니고 15억인데 좀은… 전 세계 매니저 중에 현우 씨가 가장 많이 받을걸요? 헌터 포함해도 윗줄에서 손꼽히겠구만. 페이퍼 컴퍼니 만들게 도와달라고 할 때는 무슨 뻘짓인가 했는데 통장 보니까 한 번에 이해 가네.”
박 변호사에게 투자 회사를 만들게 도와달라 부탁했다.
대표 이사의 이름은 제이스 킴으로 한국계 미국인이다.
콜로라도주의 한적한 마을에서 성장한 이민 3세.
안타깝게도 가족들은 어릴 때 교통사고로 사망.
혼자 힘으로 학비를 벌며 미국 하버드 대학교를 만 21세의 나이로 조기 졸업한다.
졸업 이후에는 증권사에서 3년간 화이트칼라로 근무.
한국 나이로 스물여섯이 되는 해, 망한 회사를 뒤로하고 동료들과 함께 스위스에서 투자 회사를 설립했다.
물론 전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구라다.
제이스 킴의 신분증과 카드는 내게 있다.
즉, 내가 제이스 킴이고, 실질적인 대표 이사다.
직원들도 유령 인간으로 모든 통장이 내게 연결돼있다.
“이지아 씨가 돈을 증여하는 게 아니라 투자하는 방식이거든요. 그 정도 금액이면 이렇게 돌리는 게 훨씬 낫긴 하죠. 잘 생각했어요.”
“차이가 크나요?”
“많이 나죠. 원래라면 반절 넘게 세금으로 가져갔을 텐데. 회사 보유금으로 법인 카드 긁으시면 되니까.”
박 변호사가 썩은 동태눈깔을 뜬다. 통장을 보고부터는 계속 인생무상한 얼굴이다.
자신의 몇 년 치 연봉이 월급으로 들어가는 걸 보니까 일할 맛이 뚝 떨어진다나.
“180억짜리 인간…….”
벌컥벌컥!
병 음료를 나발로 불던 박 변호사가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혹시 탈세가 목적이에요?”
“네?”
“그럼 다른 좋은 방법들도 많아서요. 해외에 기업을 설립하는 것보다는 조세 피난처에 유령 회사를 만드는 게 더 효과적이거든요.”
이 양반 말하는 거 봐라? 하루 이틀 한 솜씨가 아닌데? 부탁한 페이퍼 컴퍼니 건과 신분증도 되게 일찍 끝났고.
“아뇨, 그렇게까지는 안 할 거예요. 합법적인 명함이 필요한 거라서요.”
박 변호사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진짜 모르겠네.”
“뭐를요?”
“현우 씨 목적이요. 다른 사람들은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하는 게 보이는데 제 눈에 현우 씨는 꼭…….”
꼭, 뭐?
“던전 들어가기 전에 장비 점검하는 헌터 같아서요. 비장하고, 피를 볼 거 같은 얼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보여요?”
“네.”
“눈썰미 좋으시네. 정확해요.”
“네?”
박 변호사가 눈을 끔뻑이며 되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에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들었다.
그곳에는 상호가 적혀있었다.
[KJJ코퍼레이션]
합법적인 내 회사다.
세금을 절세하는 건 겸사겸사.
목적은 다른 데에 있다.
“협회를 무너트리기 위한 초석이에요. 백년지계 짜리 한 수.”
회사의 진짜 설립 목적은 헌터 협회의 목에 칼을 꽂아 넣기 위해서.
그리고 이지아와 한유정을 지켜주는 우산이 되기 위해서.
스위스의 페이퍼 컴퍼니는 양복쟁이인 내 유일한 비수이자, 갑옷이 돼줄 것이다.
&
가위인가?
가슴이, 아니, 가슴부터 배까지 전부 무겁다. 발가락을 움직이면 풀린다던데.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깨달았다.
이거 가위 아닌가 본데?
자연스럽게 잘만 움직인다.
눈을 비스듬히 뜨니까 한유정의 얼굴이 바로 들어온다. 고개를 들어 다시 확인했다. 내 위에 새우처럼 올라탄 한유정이 새근거린다.
이지아까지 함께 누울 때는 서로 낑겨서 몰랐는데, 잠버릇이 안 좋구나.
아침도 먹을 겸 한유정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굳이 붙어있을 필요가 없다.
“야야, 유정아. 이제 일어나야지.”
“엄마….”
엄마 아닌데.
얘는 이상하게 다른 건 척척 혼자 다 잘하면서 깨울 때만 손이 많이 간다. 1분간 한유정의 어깨부터 머리카락까지 탈탈탈 털고 나서야 반응이 왔다.
“아저씨, 그만….”
“일어났어?”
눈을 뜬 한유정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배시시 웃는다. 창틈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깊게 팬 보조개를 비춘다.
“네… 저 일어났어요.”
아직 잠기운에 빠진 한유정이 몽롱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친놈.
자괴감이 팍 밀려온다.
“나와줄래? 밥 먹으러 가게.”
한유정이 주섬주섬 침대 밑으로 내려간다. 잠깐 벽에 걸려놓은 외투를 뒤적였다.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종이봉투를 꺼내며 헛기침을 했다.
한유정이 가만히 날 쳐다본다.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월초잖아.”
“네.”
“이번 달 용돈.”
“아.”
한유정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봉투를 받는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봉투에서 오만 원 딱 두 장만 뽑아 잠옷 주머니에 넣는다.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는 듯 그림자 속에다가 집어넣는데, 내 예상이 얼추 맞다 싶어서 한숨이 푹 나왔다.
“유정아, 너 저번 달에 돈 얼마 썼어?”
한유정이 슬쩍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다 썼어요. 죄송해요.”
“아니, 그거 말고.”
“네?”
“생활비로 얼마 썼어?”
지금도 꽤 많은 돈을 한유정에게 주고 있다. 굶고 다니지 말라고 제법 넉넉하게 넣어주는데,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임 몇 개 사는 거를 제외하면 돈 쓰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금액도 얼추 계산해보면 전부 10만 원 안팎이었다.
“저번 달에 생활비로 10만 원 썼어요.”
어쩐지 이럴 거 같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이상한데 돈 쓰는 건 아니지?”
한유정이 어색하게 웃는다.
“아니지?”
“네….”
뭐지? 죄책감에 깃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엄청 수상쩍어 보인다. 눈을 게슴츠레 뜨며 얼굴을 마주했다.
“아닌 거, 맞지?”
“아, 아니에요!”
나하고 눈을 못 마주친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유정아, 믿는다.”
“……네!”
한유정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
조 기자한테 전화가 왔다.
그가 대뜸 물었다.
숙박권 사용했어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인다.
확인 안 하고 이지아한테 제안한 내 잘못이지만, 오늘따라 조 기자의 목소리가 괜히 얄밉다.
“아뇨, 같이 갈 애인이 없어서요.”
친구는요?
“있긴 한데, 어차피 못 가요.”
최근 꾸준히 사용한 성과가 있던 건지, 한예림의 복제 능력도 꽤 성장했다. 그래도 아직은 14시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이지아는 내 능력이 없으면 금방 우울증에 빠져 발작을 일으킨다. 그런데 호텔에서 숙박하다 오라고?
내가 이걸 쓰는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이지아가 자살하는걸 모르는 척 하거나, 이지아하고 함께 가야만 한다.
둘 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깝네요. 숙박권 날짜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언제 까지길래요?”
일주일 남았을걸요?
어쩔 수 있나.
아깝긴 해도 버려야지.
그런데, 갑자기 조 기자가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
내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그럼 차라리 이지아 씨한테 넘기는 건 어때요? 거기 온천이 조금 특수해서, 정신적인 문제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요.
“네?”
원래는 헌터들이 찾는 유명한 호텔이에요. 근처에 있는 온천이 정신적인 문제를 좀 완화해주는 효과가 있거든요.
난 또 뭐라고. 괜히 기대했네.
“자연 테라피, 뭐 그런 거요?”
뜨거운 탕에 들어가면 흐물흐물해지는 걸 누가 몰라?
아뇨, 실제로 특수한 효능이 있어요. 헌터 능력인지, 아티팩트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래서 트라우마 있는 헌터들이 많이 찾는다고 하던데요.
“진짜요?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요?”
네, 관심 있는 사람들한테는 유명해요. 전지 훈련지로도 많이 쓰이고. 헌터들한테는 거기가 뭐랄까, 돈 벌면 꼭 가보고 싶은 휴양지 같은 곳이죠.
곧바로 인터넷에 접속해서 확인해봤다. 조 기자의 말대로 업계에서는 제법 유명한 곳이었다.
차 안에서 이지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전에도 잠깐 묵은 적이 있다고 했었다.
그게 우울증 치료 때문이었구나.
근데 왜 요즘에는 안 갔지?
아, 가려면 나하고 가야 하지.
“…….”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좌측에 한유정 방. 우측은 이지아 방. 우측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방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한참 동안 서성였다.
이상하게 안 들릴까? 들릴 거 같은데. 나 같아도 착각할 거 같다.
일단 지르고 보자.
방문을 쾅쾅쾅 두들겼다. 문이 슬며시 열리며 이지아가 얼굴을 비춘다.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 지아 씨.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네.”
“진짜로, 오해하지 마요. 그런 거 아니니까.”
이지아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네, 알겠어요. 오해 안 할게요.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티켓 준 사람한테 들었는데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호텔 온천에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구요. 같이 가보는 건 어때요?”
&
탕! 탕탕탕!
패드의 버튼을 누를 때마다 TV 화면 속에서 총성이 들린다. 좀비의 머리가 터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한유정이 내 주민등록 번호를 빌려서 구매한 게임은 좀비 서바이벌이었다.
왜 19세 게임인가 했더니, 제법 표현이 적나라했다.
흔한 설정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고, 문명이 멸망하고, 폐허가 된 도시에서 생존자들끼리 싸우는 그런 게임.
근데 조금 이상했다.
보통 이런 류의 게임에서 벙커를 업그레이드한다는 건, 기관총을 달거나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건데…….
“아저씨, 침대는 몇 개가 좋으세요?”
“나무 부족하니까 한 개만 만들어 놓자.”
이 게임에는 생존자 벙커를 꾸미는 하우스 시스템이 있었다.
그냥 아기자기하게 소품만 배치하는 건 줄 알았는데, 침대 같은 경우에는 회복력을 올려주는 등의 효과가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한유정이 게임하는걸 옆에서 구경이나 할 겸, 약속도 지켜줄 겸 약간은 의무적인 느낌으로 패드를 잡았다.
그런데 웬걸, 하면 할수록 빌드업하는 재미가 있어 조금씩 빠져들었다.
게임을 시작할 때는 혹시 재미없어하면 어떡하나, 계속 눈치를 보던 한유정도 안심하고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슨 기분인 줄 알겠다.
친구들한테 웃긴 영상 보여주면, 재밌는 부분 나올 때까지 나도 괜히 초조해지거든.
끼에에에에엑!!
탕! 탕탕!
오전에 시작한 게임이 점심을 넘어 5시까지 됐을 때, 슬슬 집중력에 한계가 왔다.
퍼즈 버튼을 누르고 패드를 놨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피곤해 죽겠네.”
“네.”
한유정은 아쉬워하며 게임을 저장했다.
8시간 동안 게임을 내리 했는데 안 피곤하나?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겠다.
기지개를 쭉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게임기 선을 정리하던 한유정이 불쑥 날 부른다.
“아저씨.”
“응?”
되게 심각한 얼굴이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게임 시간이 현실하고 실시간으로 연동되는데요.”
“응.”
“금요일에 이벤트가 하나 있어서요. 혹시 그때 시간 되면 같이 게임을 해주시면 안 돼요?”
금요일에는 이지아하고 같이 호텔에 가기로 했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곤란해하는 기색을 눈치챈 걸까, 한유정이 조심스레 다시 묻는다.
“많이 바쁘세요?”
“금요일에는 지아 씨하고 일이 있어서 집을 비워야 할 거 같은데.”
“아줌마하고요…? 어디 가시는데요?”
“우울증 치료 때문에 잠깐 지방에 가게 돼서… 게임은 다음 주에 다시 하자.”
목석처럼 굳어있는 한유정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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