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49화 (49/112)

〈 49화 〉 송곳 (6)

* * *

“본부장님, 결재 서류입니다.”

차장이 결재판을 건넸다. 의자에 앉은 본부장이 관성적으로 사인을 하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응? 이건 뭐야?”

결재 서류들 사이로 종이 하나가 송곳처럼 튀어나왔다. 차장이 헛기침하며 대답했다.

“그, 이지아 쪽 길드입니다.”

“뭐?”

본부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또 왔어? 매니저를 그런 식으로 보냈는데?”

“네.”

“배알도 없기는.”

본부장이 신청 서류를 확인했다.

양식에 맞춰 단정한 글씨로 적어놨다.

쭉 훑던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구성 인원 2명

길드 대표: 한예림

소속 헌터: 이지아(S급)

.

.

.

신청 길드명: 좆같은 협회 새끼들 엿이나 처먹어라」

“이 새끼들 이거, 완전 또라이구만? 매니저부터 길드 대표까지 단체로 제정신이 아니야.”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장이 찍혔다. 빨간색 글씨로 선명한 자국이 남았다.

[불허]

“백번이고 천 번이고 오라 그래.”

본부장 입장에서는 도장 한 번 찍으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었다.

“누가 먼저 지치는지 보자고.”

본부장이 결재판을 건넸다. 차장이 꾸벅 허리를 숙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런데 본부장님.”

“뭐?”

“혹시, 이지아 쪽에서는 반응 없습니까?”

“왜? 불안해?”

차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본부장이 짧게 혀를 찼다.

“박 차장.”

“네?”

“담력 좀 키울 필요가 있겠어.”

“하하…….”

본부장이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핸드폰은 조용했다. 이지아가 제보하려고 했다면 이사회에서 바로 문자를 보냈을 것이다.

스물여섯짜리 애송이들뿐이었다.

길드 대표고, 주력 헌터고, 담당하는 매니저까지.

어떻게 싸워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런 식의 기 싸움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겁니까?”

“잠잠해. 솔직히, 언론사에 제보 정도는 하려고 할 줄 알았는데.”

본부장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대처가 기대 이하야.”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우울증과 편집증에 시달리는 정신병자.

결국, S급 헌터라는 허상을 벗기면 남는 건 그것뿐이었다.

쾅쾅!

문이 거칠게 열렸다. 직원이 뛰어들듯 들어와 외쳤다.

“보, 본부장님!”

“뭔데 소란스러워?”

“이지아 SNS 확인해보세요! 어서요!”

“뭐?”

직원의 다급한 재촉에 본부장이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SNS를 확인한 그의 얼굴이 왈칵 찌푸려졌다.

“…뭐야, 이거?”

그곳에는, 파도가 거세게 차오르고 있었다.

&

SNS가 활활 불타오른다.

[방배동라이더: 현실이 어째 더 영화 같냐ㅋㅋㅋㅋㅋ]

[패왕 지아: 시발 진짜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티슈두장: ??? 이게 진짜라고? 협회 입장문 나옴?]

[ㄴ국밥요정: ㄴㄴ 아직 안 나옴]

[떡볶이냠냠: 와, 이건 좀…]

몇몇 눈에 익은 악플러들도 협회의 행패에 입을 떡 벌리는 눈치였다. 언제나처럼 벌어지던 개싸움도 드디어 멈췄다.

이거 진짜냐, 설마 뒷감당 생각 안 하고 이지아가 없는 일을 꾸미겠느냐 등 온갖 의견들이 오가는 중이었다.

스크린을 올려 게시글을 다시 한번 읽었다. 옆에 앉아 있던 이지아가 감탄한다.

“변호사라 그런지, 글을 잘 쓰긴 잘 쓰네요.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게.”

이지아의 SNS 계정에 올릴 고발문을 작성해달라고 부탁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일목요연한 명문이 도착했다.

현재의 사건과 청문회 때의 문제를 자연스레 연관시켜줬다.

협회장부터 이사들까지 모가지가 싹 다 썰려나갔었고, 그 복수로 길드 신청을 계속 반려한다는 내용.

사실 여기서 뭘 더 추가하고 말 것도 없다. 모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변호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조금 더 절절하게 꾸며준 거다.

게시글을 어제 올렸는데 달린 댓글만 벌써 수천 개다. 대형 언론사들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시간문제였다.

이지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물었다.

“그런데 현우 씨.”

“네?”

“여긴 왜 온 거에요? 카페는 집 근처에도 많잖아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창가 밖을 가리켰다. 우뚝 서 있는 협회 건물이 보였다.

“저쪽하고 만날 사람 있어서요.”

“협회요? 누구요?”

“그게…….”

띠리링!

조 기자한테 전화가 왔다. 이지아에게 양해를 구하며 받았다.

“기자님, 무슨 일이세요?

­혹시 인터뷰 약속 잡아놓으셨습니까?

“네?”

조 기자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편집장실에서 나왔는데, 빨리 이번 사건 취재하라고 난리에요. SNS 관련 기사는 올라갔고, 단독 보도 때문에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지아 씨 찾을 거에요.

그 말은….

“드디어 보도 지침이 풀렸네요.”

­아니, 자꾸 보도지침, 보도지침…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게 그거죠.”

­……아무튼,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

조 기자의 말을 눈치 빠르게 가로챘다.

“지아 씨하고 인터뷰하고 싶으신거죠?”

­어, 네. 저희 잡지사도 인터넷 신문 운영 중이라, 그리고 현우 씨하고 저 친한 것도 다들 알고 있고, 그리고…….

“그럽시다.”

­네?

“단독 인터뷰 하자구요.”

횡설수설하는 조 기자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예전에 약속한 대로 내부 정보를 바로 알려줬다.

받은 도움이 있는데 입 싹 닦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에 또 어떻게 될 줄 알고.

­진짭니까?! 그럼 지금 바로….

“아뇨, 인터뷰는 협회 쪽 입장문 나오고 나서요.”

­네? 왜요?

“그쪽에서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대응이 조금 달라질 예정이라.”

조 기자와 전화를 끊고, 협회의 SNS와 홈페이지를 꾸준히 확인했다.

직원의 따가운 눈초리에 추가로 주문한 커피만 서너 잔이 쌓였을 때쯤, 이지아가 핸드폰을 보며 불쑥 외쳤다.

“떴어요!”

“뭐가요?”

“협회 입장문, 떴다구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헌터 협회 입장문]

[헌터 협회는 설립 이후…….]

뭔 사족이 이렇게 길어? 건너뛰고 본론부터 읽었다.

요약하자면, 대충 이랬다.

1) S급 헌터인 이지아는 협회와 좋지 못한 과거가 있다.

2) 하지만, 당시 이지아에게 죄를 덤터기 씌우려던 관계자들은 모두 파면됐다. 협회는 이지아에게 유감이 없다. 오히려 죄송하다.

3) 협회는 규칙대로 했을 뿐이다. 현재 심사 중인 길드의 대표는 경력이 3년밖에 안 된 초짜다. 준비 과정에서 미비된 게 많아 반려처리가 된 거고, 이지아가 착각을 한듯하다.

4) 이번 사건으로 협회의 대응이 달라질 일은 없다. 이지아 측이 제대로 서류를 갖춰서 온다면 심사를 통과시켜주겠다.

급하게 움직인 거 치고는 깔끔했다.

이지아를 심하게 내려치지 않은 채로 이 모든 사건을 단순 해프닝으로 돌렸다.

댓글을 확인했다.

상황적으로는 충분히 의심 가지만, 증거가 없으니 일단 두겠다.

그런 반응이었다.

아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지아가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런데 웃긴 걸 어떡하라고?

변호사의 말이 맞았다.

이 업계는 정말이지… 정글 같은 곳이다. 언제든지 서로가 목을 잡아 뜯어먹으려고 하기에, 어느 누구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약점이 될 걸 알고 있으니까. 인정하면 언젠가 목을 옥죄어올 게 분명하니까. 일단 부정하고 보는 거다.

우웅! 우우웅!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연락을 받았다.

“여보세요?”

­김현우, 너 이 새끼… 지금 어디야? 이딴 짓을 하고 무사할 거 같아?

분노에 찬 말투.

번호는 모르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다.

헌터 협회 본부장이었다.

입꼬리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협회 건물 건너편 카페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튀어오세요.”

­뭐? 너…!

뚝!

전화를 끊고 빨대를 입에 물었다.

혀끝에 닿는 아메리카노가 달다.

아무래도, 양보는 필요 없을 거 같다.

*

본부장이 씩씩거리며 담뱃갑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후처리는 빠르게 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청문회 이후로 협회는 숙청이 한창이었다.

건수 하나 잡히면 피라냐 떼처럼 몰려드는데, 벌써 이걸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시발, 이사회 영감태기들, 지들도 동의해놓고….”

하지만 책임을 지는 건 결국 그였다.

본부장이 외투를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지아의 SNS 글 이후로 좋지 않던 여론이 입장문 이후로 중화되고 있었다.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의심의 눈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상황이 워낙 명백하다 보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서로 간의 착각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계속해서 미심쩍은 시선을 보낼 테고, 기사들도 하나둘씩 걸리기 시작할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본부장이 거울을 바라봤다. 단두대의 환영이 보였다. 줄에 매달린 커다란 칼날이 떨어질 듯 말듯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회유하고, 협박해서 SNS의 글을 유야무야 정리시켜야만 한다. 그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멀리서 남자가 손을 번쩍 든다. 김현우였다.

“오셨어요? 이쪽은 지아 씨인데 얼굴은 아시죠?”

본부장이 자리에 앉으며 말을 끊었다.

“원하는 게 뭐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네. 이거 좀 마시지 그러세요. 여기 원두 향이 괜찮던데.”

김현우가 커피를 건넸다. 본부장이 혀를 차며 손등으로 쳐냈다.

“됐고, 이야기나 꺼내.”

“저희가 원하는 게 뭐 더 있겠습니까. 길드 심사나 통과시켜달라고 이 지랄을 떠는 거죠.”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논란이 된 순간부터 이지아에게 보복 행정은 할 수 없게 됐다.

속이 쓰리지만 부탁하지 않아도 심사를 합격 시켜줬을 터다.

“그리고?”

“그리고….”

김현우가 책상을 툭툭 두들겼다.

“인정해주셔야죠.”

“인정? 무슨 인정? 길드 심사는 통과시켜준다 했잖아.”

“그거 말고요. 지아 씨 SNS 글 내용이요.”

본부장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가 한숨을 쉬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 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해? 내가 왜 여기 왔는지 몰라?”

“알죠. SNS 건 넘어가 달라고 부탁하러 온 거잖아요. 그 대가로 우리한테 필요한 거 말하라는 거고.”

김현우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꼭 사냥감에게 달려들기 전, 짐승이 거리를 가늠하는 모습 같았다.

“그런데, 제가 지아를 바보로 만들기는 싫어서요.”

“…뭐?”

이미 쏘아진 화살이었다.

이지아 측에서 지금의 사건을 잠재울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지아 본인이 과민반응을 했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희가 대체 왜요? 가만히 있어도 여론 눈치 보여서 우리 길드 심사 통과시켜줄 거 뻔한데.”

본부장이 거칠게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가 너희 상대할 여력이 없어서 지금 고개 숙이는 줄 알아? 이게 가장 빠르니까 당사자하고 원만하게 협의하려는 거 뿐이야!”

김현우가 여유롭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태도였다.

“입장문 봤지?”

“네, 다 읽었습니다. 반나절도 안 돼서 나온 거 치고는 훌륭하던데요?”

“댓글들 반응도 조금씩 바뀌고 있어. SNS에서 이지아 말만 믿고 욕하던 사람들도 ‘그럴 수 있겠구나’, 반응하고 있다고.”

본부장이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핥았다.

“결국 이지아 SNS로 제시한 건 전부 허황된 이야기들뿐이야. 고작 5번 정도 심사 엎어진 걸로 협회가 보복 행정을 했다고 주장을 하는 건데. 그딴 걸로 협회를 곤란하게 만들지 못해.”

“그리고요?”

“……청문회 때 협회장 한 번 담갔다고 협회가 좆으로 보이나 본데.”

본부장이 딱딱하게 굳은 턱을 움직였다.

“협회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니네 깔아뭉개는 건 일도 아니야.”

“글쎄요.”

김현우는 서늘하게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손에 길쭉한 물건 하나가 쥐여져 나왔다.

대진 일보 기자한테 빼앗은 녹음기.

그가 옆구리의 버튼을 눌렀다.

“지금 저한테 말해야 할게, 그런 협박이 아닐 거 같은데.”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길드 심사가 통과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녹음기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본부장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

천장의 줄이 끊어졌다.

단두대가 목 위로 떨어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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