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이미 흘러넘친 술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2)
* * *
카페 바스타드의 영업시간이 끝나고, 적당히 근처의 곱창전골에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늦어 박지영은 중간에 먼저 떠났다. 나는 술기운이 오른 사장과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형, 딸이 지금 몇 살이었죠?”
“고등학교 입학하면 몇 살이냐?”
“17살이요.”
“그럼 17살이야.”
무슨 자기 자식 나이도 몰라? 어이가 없네.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하니까 또 이렇게 대답한다.
“네가 나이 먹어봐라. 내 나이 기억하는 것도 얼마나 벅찬데.”
“1년 동안 기억할 게 뭐 얼마나 많다고요? 그게 자랑이에요?”
“그러니까, 너도 먹어보라니까? 너, 인마! 내가 이 대화 내용 기억해놨어. 나중에 딴소리하면…….”
“자기 자식 나이도 까먹으면서 이런 건 어떻게 기억하려고요?”
사장이 입을 벙긋거리더니 소주잔을 확 털어 넣는다.
“그래서, 우리 딸 나이를 왜 물어?”
“음, 사실 그게요.”
나는 소주 대신 콜라를 따라 마셨다.
“그 정도 또래의 아이하고 친해졌거든요.”
“누구 또래? 너?”
사장이 소주잔을 기울인다.
“아뇨, 형네 딸하고 비슷한 또래요. 동갑이에요. 17살…….”
“푸흑!”
사장이 입안에 든 소주를 뿜었다. 뚝뚝. 알코올 냄새나는 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는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저 돌아갈 때 운전해야 해요. 술 냄새 난다고 단속 걸리면 형 책임…….”
“미친 새끼야!”
“네?”
“이 새끼야!”
“뭐가요?”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사회에서 뭐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이지아하고 분위기 좋던 거 아니었어?”
잠깐 콜라잔을 쥐고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
아니, 이 양반이 무슨 착각을 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17살짜리는 제가 담당하는 헌터고, 지아 씨하고는 안 사귀고 있다니까요? 몇 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그 이야기에요?”
이런 말을 맨날 해도 통 믿질 않는 눈치다. 사장이 팔짱을 끼며 묻는다.
“그래서, 그 애는 왜?”
“어, 형이 아무래도 한 아이의 아버지잖아요. 마침 유정이하고 나이도 똑같고. 물어볼 사람이 근처에 형밖에 없어서…….”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본론만 말해.”
“전에 놀아주기로 한 약속을 두 번이나 깼거든요. 따지는 말도 제가 좀 서툴게 받아줬어요. 자기는 괜찮다고 하는데 많이 섭섭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스읍, 사장이 짧게 혀를 차며 내 잔에 콸콸콸 콜라를 따랐다.
“왜요? 뭔데 그런 얼굴을 해요?”
“좀 위험한데…….”
“네? 위험할 정도에요?”
사장이 무거운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지, 인마! 다 큰 성인들도 약속 깨지면 기분 엿 같은데 애들은 오죽하겠냐? 한창 감정 날뛸 때인데.”
“근데 그게 바빠서 미루고 미루다 보니까…….”
“원래 아빠들 변명이 다 그래. 회식 있다, 야근 있다 같은 일 이야기로 시작해서 주말 등산, 골프, 조기 축구, 동창회 같은 사적인 약속까지 가는 거야. 그렇게 자식하고 약속 몇 번 깨지면 나중에 있잖아, 애가 내 말을 안 믿어.”
“왜요?”
“신뢰를 완전히 잃는 거지. 어차피 약속 안 지키겠구나, 하고.”
사장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한다. 꼭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뒷말을 기다렸다.
“부녀 관계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싸우는 거요?”
“아니야. 그건 최소한 관계 회복의 건덕지라도 있지. 마음에 안 드는걸 교정하려는 거잖아. 반대로, 그거만 고치면 밉보일 일도 없어.”
“그럼 뭔데요?”
“포기하는 거야.”
화내던 한유정이 갑자기 괜찮다며 대답한 게 퍼뜩 떠오른다.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요?”
“부모한테 더는 기대감이 없다는 거거든. 그때는 뭘 잘못해도 화를 안 내. 약속 지키든 말든 뭔 상관이야? 처음부터 안 지킬 거 알았는데. 기대감의 디폴트가 바뀌는 거야.”
테이블에 떡하니 올려져 있는 소주가 눈에 들어온다. 저 우울한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까 몸속에서 알코올을 갈구하는 기분이다.
“아직 그런 낌새는 전혀 안 보였는데. 어제도 멀쩡히 잘 대화했거든요.”
“그 어린아이가 이지아네 집에 얹혀산다면서? 네가 한유정 입장에서 생각해봐. 눈치가 안 보이겠냐?”
“네?”
“17살짜리 애가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싫으면 싫다고 티를 내겠냐고. 마음에 안 들어도 좋은 척, 불편해도 괜찮은 척 반응하겠지. 안 그래?”
그렇게까지는 생각 못 해봤다. 듣고 보니 그랬다. 나도 뻔뻔하다는 말은 제법 많이 듣지만, 17살 시절의 내가 한유정의 입장이었어도 그게 가능했을까?
얼굴이 두껍다는 건,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양심이 깎여나간 거에 불과하다.
당장에 다 큰 어른들도 다른 사람 집에 얹혀살면 제법 불편해할 텐데, 고등학생 나이대의 소녀야 말할 거리도 안된다.
“잘 봐. 사람의 믿음이라는 건 바로 깨지는 게 아니거든.”
사장이 술잔에 소주를 한두 방울 따른다.
“게임해주기로 한 거 취소했으니까 한 방울, 주말에 외식하기로 한 거 취소했으니까 한 방울, 여행 가기로 한 거 취소했으니까 한 방울. 이게 계속해서 쌓이잖아?”
사장이 소주를 콸콸 부었다. 꽉 찬 잔이 바닥에 흘러넘쳤다.
“임계점을 넘으면 그때부터는 주워 담을 수 없게 되는 거야. 나중엔 말 걸으면 듣는 채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지….”
그 말이 제야의 종처럼 머릿속에서 둥둥 울렸다.
임계점을 넘는 순간, 주워 담을 수 없다. 집에 돌아가면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진다.
“젠장, 어떡하죠?”
“어떡하긴, 인마!”
사장이 잔에 담긴 소주를 빈 컵에 쫙 뿌렸다. 그리고 소주잔에 반 컵 분량을 다시 따라 내게 내밀었다.
“잃어버린 신뢰를 되돌리는 방법이 어딨겠어? 그만큼 더 약속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두 배로.”
“두 배로…….”
“이미 흘러넘친 술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 그 전에 전부 비우면 되는 거야.”
잔을 양손에 쥐고 가만히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결심한 나는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
상암동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촬영 스튜디오를 찾았다.
슬슬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아직 헌터 등록도 안된 게 벌써 김칫국을 마시나 싶기도 하지만, 설령 안되더라도 어때?
다음 기회도 있는 거고, 헌터를 못하더라도 프로필 사진 한 번 찍어두면 두고두고 쓸 수 있는 거지.
한유정은 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피부 위에 뭔가를 칠한다는 게 거부감이 드는지, 한참 동안 몸을 뒤틀던 한유정이 여직원에게 묻는다.
“너무 불편한데. 더 가볍게 하면 안 돼요?”
“끝나고 닦아드릴 테니까 잠깐만 참으세요.”
불만스러운 한유정의 눈길이 이번엔 내게로 향한다.
“아저씨.”
“응?”
“뭐 하세요?”
나는 입꼬리를 히죽이며 말했다.
“사진 찍는데.”
찰칵!
고개를 틀어 피하려던 한유정의 머리가, 여직원에 의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조금 있다가 어차피 찍잖아요.”
“그건 공식용이고, 이건 개인 소장용.”
“뭐가 다른데요?”
“현장의 생생함이 달라.”
약간의 쌈마이가 오히려 더 가깝게 다가오거든.
찍은 사진들을 확인했다.
뾰로통한 한유정이 다양한 각도에서 찍혀있었다. 톤까지 정리된 얼굴을 보고 몰래 감탄했다.
평소에도 얼굴 마주칠 때마다 이쁘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가벼운 메이크업까지 마치니까 정말 ‘와’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아이돌이나 배우를 시킬걸 그랬나.
잠깐 생각했다가 바로 그만뒀다. 카메라 앞에서 웃는 것도 힘들어하는 아이인데 무슨.
사진을 정리하는데 여직원이 다가온다.
“메이크업 끝났어요.”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핸드폰 속의 한유정을 본 직원이 웃는다.
“두 분이 되게 친하시네요.”
“네?”
“여기서 일 하다 보면 자주 보거든요. 매니저하고 아이돌, 배우, 헌터들이요.”
“아… 다른 사람들은 어떤데요?”
그러고 보니 1차 시험 때 만난 악산 길드의 매니저도 내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혹시 가족이냐고.
“정도의 차이는 있긴 한데, 정말 매니저와는 비즈니스적인 관계구나 싶어요. 하인 대하듯 막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정도예요?”
“제가 말씀드린 건 좀 심한 경우고, 그만큼 다들 거리가 있다는 거죠. 그런데 매니저님하고 한유정 씨하고는 그런 거리감이 안 느껴져서 보기 정말 좋더라고요.”
한유정을 바라보는 직원의 넉살이 포근하게 주름진다. 꼭 귀여운 새끼 동물이라도 보는 거 같은 눈빛이다.
“우리 딸아이도 저랬으면 좋겠는데.”
“몇 살인데요?”
“이제 중학교 올라갔죠. 사춘기라 어찌나 말을 안 듣고 틱틱대는지, 그제 대판 싸워서 주말에는 유원지 데려다주려구요.”
“아, 네….”
대충 흘려듣던 귀가 번쩍 뜨인다.
“네? 싸웠는데 놀이동산은 왜요?”
“화 풀어주려구요.”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화날 때 놀이동산을 왜……?”
말끝을 흐리며 직원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나이 때 애들은 유원지 한 번 데려다주면 대부분 화 풀려요.
“어, 진짜요? 아무리 그래도 7살짜리 애도 아니고 그런 거로 화가 풀린다구요?”
“어릴 때 부모님하고 유원지 안 가보셨어요?”
오락실이나 가라고 만원은 쥐여주던데.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17살 애도….”
“네?”
“17살짜리 여자애도 놀이동산 데려다주면 좋아할까요? 묵혔던 화도 풀리고?”
한유정과 나를 번갈아 보던 직원이 웃는다.
“그럼요. 엄청 좋아할걸요?”
직원이 마지막으로 한유정의 머리를 만져줬다. 멀뚱멀뚱 앉아있는 한유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볼을 양옆으로 잡아당겼다. 부드러운 볼살이 찹쌀떡처럼 쭉쭉 늘어난다.
“아어히….”
“유정아, 이번엔 꼭 좀 웃자. 이렇게.”
한유정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분명 모델은 좋다.
촬영 기사도 말끔하게 차려입은 한유정을 보고는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와, 한유정 씨 사진 찍으면 홍보용으로 사용해도 될까요?”
저렇게 웃는 것도 얼마나 갈지.
촬영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역시나, 촬영 기사는 진땀을 흠뻑 뺐다.
“한유정 씨! 웃을게요!”
“너무 긴장하셨다! 편하게 웃을게요, 편하게!”
“웃어주세요! 카메라 그만 의식하시고, 좀!!”
“예? 저게 웃은 거라고요?”
지금 당장은 나 혼자 한유정을 관리하지만, 언젠가 스케줄에 따라 한예림이 데리고 다닐 수도 있다. 그래서 혼자서도 익숙해지게 이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기사님, 저도 들어갈게요.”
“예? 사진 찍으시게요?”
“아뇨, 유정이 좀 웃기려고요.”
검은 정장이라 어깨 조금 나오더라도 후처리는 쉬울 거다. 한유정의 뒤쪽에 비스듬히 선 나는 조용히 집중했다.
훈련하다가 능력을 새로 개발했는데, 범위를 개인 타깃으로 바꿀 수 있게 됐다.
그만큼 위력도 강해지지만, 대신에 사정거리도 길지 않고 효율성도 극히 떨어진다.
하지만 한유정과 이지아, 둘 만을 위해서 사용하던 능력이다. 좋은 방향성이라고 생각한다.
한유정의 얼굴이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졌다.
활짝 웃었다고 보기에는 2% 부족한 웃음.
사진 기사는 아쉬워하면서도 결국 타협했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는데, 여러 가지 상념들이 떠오른다.
이미 흘러넘친 술잔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 그 전에 비우라는 사장의 조언.
그리고 애들은 놀이동산 한 번 데려다주면 대부분 화가 풀린다는 애 엄마의 조언.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이야기를 꺼냈다.
“어, 유정아.”
“네?”
“왜, 그동안 바쁘다고 게임 미뤘던 거 있잖아.”
“네.”
“약속 어긴 게 너는 괜찮다고 했지만, 계속 신경 쓰이고 미안하더라고. 그래서 그런데….”
뻘쭘하게 목덜미를 주물렀다. 잃어버린 신뢰를 돈으로 사는 거 같아서, 괜히 말하기 쑥스럽다.
“조금 있다가 일 끝나면 같이 놀이동산이나 갈까 해서. 괜찮아?”
어째 대답이 없어서 시선을 내리는데, 한유정의 어깨가 하악질 하는 고양이처럼 뻣뻣하게 굳어있다.
“유정아?”
“아저씨하고 둘이요?”
“지아 씨나 예림이를 지금 부르기는 아무래도 힘들지. 가려면 둘이 가야 할 거 같은데. 왜, 별로야?”
“아뇨, 그게 아니라….”
한유정이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갈래요.”
촬영이 생각대로 안 풀려 짜증스레 머리를 긁적이던 기사가, 갑자기 환한 얼굴로 셔터를 마구 눌렀다.
“어어! 잠깐만요! 그대로 유지해주세요!”
&
스튜디오의 분장실.
김현우는 주차된 차를 빼러 떠났다.
여직원이 한유정에게 다가와 물었다.
“한유정 씨, 아까 화장 불편하다고 했었죠?”
“네.”
“앉아볼래요? 화장한 경험이 없다니까, 제가 지우는 거 알려줄게요.”
한유정이 의자에 앉아 거울을 바라봤다. 여직원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화장 지우는 방법을 설명했다.
“일단 클렌징폼으로 씻기 전에 리무버로 먼저 지워주는 게 좋아요.”
직원이 화장 솜을 한유정의 얼굴에 가져다 대려 했다. 멍하니 있던 한유정이 황급히 직원의 손을 붙잡았다.
“한유정 씨?”
어리둥절해 하는 직원의 부름에, 한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말 바꿔서 죄송해요. 화장 안 지울게요.”
“계속 불편하다면서요?”
“네, 불편한데…….”
한유정이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은 그냥, 조금만 더 불편하고 싶어서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