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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34화 (34/112)

〈 34화 〉 김현우 (4)

* * *

짹─! 짹짹─!

새벽부터 참새 소리가 시끄럽다. 마른세수를 하며 일어났다. 구멍 뚫린 거처럼 바람이 눈에 숨풍숨풍 지나간다.

피곤해 죽겠네.

대충 입은 츄리닝 바지에 손을 찔러넣고 거실로 향했다. 외출복을 입은 한예림이 소파에 쓰러져 자고 있다. 머리를 한 번 맞대고는 집 밖으로 나갔다.

한량 차림으로 길가를 걸었다. 출근 시간대라 그런지 말끔한 양복 차림으로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조금 깔끔하게 입고 나올 걸 그랬나? 너무 백수 같은데.

에이, 누구한테 잘 보이겠다고. 그냥 가자.

슬리퍼를 찍찍 끌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컨테이너 박스가 보인다. 매대에 팔을 턱 걸치며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사장님, 조간 들어왔어요?”

“요즘에도 신문 보는 청년이 있네. 밑에 찾아봐요.”

작은 진열대에 신문 몇 부가 주르륵 나열돼있었다. 하나씩 넘겨짚으며 신문을 찾았다.

“어디 보자, 대진 일보가….”

“맨 위에서 두 번째.”

“아,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커피 하나 주문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다음은 뭐, 별거 없다. 고개를 처박고 신문을 정독했다.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광고란에 뭐가 할인하는지 살피고, 4컷 만화는 생각보다 재밌어서 두어 번 보고, 기자의 비평란까지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전부 읽었다.

그리고 40분이 지났을 때.

차갑게 식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 기자 녀석, 유정이 기사 안 올렸구나.

반협박으로 기자에게 백기를 받긴 했지만,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다.

어제 집에 돌아오고 나서 오후부터 새벽까지 대진 신문사 홈페이지에서 새로 고침만 수천, 수만 번을 누르며 기사가 올라오나 확인했다.

다행히 인터넷 기사는 조용했지만, 혹시 조간신문에라도 실린 건 아닐까 걱정돼서 아침부터 신문 사러 지하철까지 나온 거고.

하지만 걱정은 우려에 불과했다.

기자는 내 진심이 담긴 경고를 잘 알아들은 모양이다. 근심이 썰물처럼 물밑으로 떠내려간다. 인터넷 기사도, 신문도, 내 마음도 모두 고요한 바다처럼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하다.

흡족하게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아메리카노는 시럽을 서른 개정도 두른 것처럼 달게 느껴졌다.

&

창틈 사이로 들어온 햇볕이 눈가에 스며들었다. 한유정이 인상을 찡그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녀가 눈을 비비며 알람 시계를 확인했다.

[07:45]

이렇게 일찍 눈이 떠진 게 얼마 만이더라?

대부분 김현우가 깨워줬던 기억뿐이었다.

한유정은 뻗친 머리를 다듬으며 문밖으로 나갔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발걸음이 이끌리듯 주방으로 향했다.

“웬일이야? 네가 이 시간에 혼자 깨고.”

주방에서 프라이팬을 돌리던 김현우가 반갑게 맞이해줬다. 얼굴에 대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뇨, 그냥, 어제는 피곤해서 일찍 잤어요.”

한유정이 민망스러운 시선을 받아넘기며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반찬이 빠르게 올라갔다.

반숙으로 익힌 계란 후라이, 노릇하게 구운 문어 소시지,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미역국.

모두 한유정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김현우가 맞은편에 앉았다. 한유정이 물었다.

“아줌마는요?”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더라고.”

대부분의 아침 식사는 김현우와 한유정 둘이서 해결했다.

식단이 한유정에게 맞춰져 있는 이유였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식기만 시끄럽게 달그락거렸다. 물을 마시던 한유정이 문득 김현우를 바라봤다.

“…?”

무슨 일인지,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계만 계속 확인하고 있다. 한유정은 문어 소시지를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뭐 할 거 있나?

“아저씨.”

“응?”

“전에 약속하신 거 있잖아요.”

“무슨 약속?”

한유정이 눈썹을 찌푸렸다. 김현우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거.”

“그거, 뭐요?”

“그거 있잖아, 그거!”

“또 잊으셨죠?”

한유정의 무뚝뚝한 얼굴 속에서 감춰진 감정을 파악하는 기술은.

한유정의 지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김현우만 가지고 있는 특기였다.

저건, 지금 상당히 심기가 불편한 거다.

그가 필사적으로 뇌를 굴렸다.

곧 최적의 해답이 나왔다.

“디저트 사주기로 한 거 말하는 거잖아. 다 기억하지.”

“……그거 아닌데.”

“아니야…?”

김현우의 미소가 얼어붙었다. 그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미안, 갑작스러워서 기억이 안 나네. 무슨 약속이었지?”

“게임이요.”

“응?”

“같이 게임 해주기로 약속하셨잖아요.”

백화점 때부터 헌터 자격시험까지 벌써 얼렁뚱땅 약속을 두 번이나 깨트렸다.

한유정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오늘은 저 게임 알려주시면 안 돼요?”

“아.”

김현우가 곤란해했다.

“오늘은 할 게 있는데.”

“어떤 거요?”

“음, 미안. 말하기 좀 그렇네. 개인적인 일이야.”

선을 긋는듯한 김현우의 말투에 한유정의 젓가락이 우뚝 멈췄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한유정이 겨우 말했다.

“……알겠어요.”

“응.”

젓가락이 다시 조용히 움직였다.

* * *

식사하는 동안 한유정의 얼굴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심장에 가시가 쿡쿡 박히는 느낌이다.

식기를 정리 중인 한유정에게 말했다.

“유정아, 어제 고생했는데 가서 쉬어. 설거지는 내가 할게.”

“됐어요. 제가 할게요.”

목소리가 싸늘하다.

약속을 어긴 탓만은 아닐 거다.

그런 거라면, 한두 마디 투정 부리다가 금방 풀어졌으니까.

부모, 오빠, 아니면 나이 차이가 조금밖에 나지 않는 삼촌.

한유정은 평소에 날 그렇게 보고 있는 거 같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개인적인 일’이라고 딱 잘라 끊어서 말했으니…….

화나고 섭섭할 만하다. 타인이라고 선을 그은 거니까. 어린 마음에 상처를 크게 받을 수도 있다.

조금 좋게 이야기할걸.

많이 후회된다.

그런데, 이건 진짜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한유정에게는 특히나 지금부터 할 일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오해는 조금 있다가 차분히 풀기로 하고,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잡지를 펼쳤다.

원하던 내용물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제2의 이지아'한유정, 고득점의 비결은?]

교복을 입은 한유정이 밝게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저렇게 미소짓게 만들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웃긴 이야기만 수십 개를 해주고, 하도 안돼서 내가 양 볼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이건, 정말 순간포착의 힘이다.

한순간의 기적.

가위를 들어 한유정의 기사를 조심스레 오렸다. 사진을 앨범에 넣어두고 흐뭇하게 웃었다.

한유정의 첫 번째 기사다.

앞으로 이 앨범에 많은 것들이 채워지겠지.

마지막 장까지 좋은 기사들만 가득하길 바랄 뿐이다.

쨍그랑!

갑자기 거실 쪽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한유정이 설거지 중일 텐데.

앨범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유정아?”

대답이 없다.

뭐야?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싱크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유정을 발견했다.

“너 거기서 뭐해?”

화들짝 놀란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다.

“그, 그냥 사색 중이었어요!”

“뭐?”

어이가 없어 물었다.

“사색을 무슨 설거지하면서 해? 손 안 베였어?”

가까이 다가가는데 한유정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젓는다.

“아저씨!”

“응?”

“무슨 일이세요? 그냥 거기서 말씀해주시면 안 돼요?”

“그릇 깨진 소리 나서. 걱정되니까 와봤지.”

“괘, 괜찮아요! 보세요!”

그러면서 팔다리를 휘휘 젓는데, 기름칠 안 한 목각인형처럼 뻣뻣하고 수상쩍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자세히 살폈다.

머리카락 사이로 쫑긋 튀어나온 귀가 시뻘겋게 익어있다.

“너 열 있어?”

“아뇨!”

“귀가 빨간데. 잠깐 얼굴 봐봐.”

“괜찮아요!”

“아니, 대체 뭔데?”

“오지 마세요! 열 옮아요!”

“진짜 감기 걸린 거야?”

“아, 아뇨! 멀쩡해요!”

뒤로 내빼려던 한유정의 팔을 붙잡았다.

순간 한유정의 고개가 홱 돌아가며, 잘게 떨리는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과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볼이 꼭, 알몸을 엿보다가 들킨 사람 같다.

한유정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 아저씨.”

“응?”

“어어, 사춘기잖아요. 제가.”

“뭐?”

그걸 무슨 자기 입으로 말해?

“그냥, 괜히 심술부려서 죄송해요.”

조금 전의 이야긴가보다.

한유정의 추궁에 당황한 내가 탁 잘라버렸던.

“아까 내가 섭섭하게 말한 거는…….”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알아요!”

한유정이 정말 금방이라도 터질 거 같은 얼굴로 횡설수설 변명한다.

“아저씨한테 하나도 안 섭섭해요. 아까는 그랬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슨 말 하는 건지.”

대화가 연결되지 않고 빙빙 돈다.

그래도, 한유정의 화가 가라앉은 건 알 거만 같았다. 방안에 숨겨둔 앨범과 잡지가 떠올랐다.

그냥 조금 있다가, 늦은 새벽쯤에 다시 하자.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잖아. 잡지도 사놨으니까.

심하긴 했지. 거의 한 달째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미뤄왔다. 거기다 대고 되려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했으니까. 나 같아도 많이 섭섭했을 거다.

오늘은 약속을 지켜야겠다.

“유정아, 게임 말인데.”

“네.”

“아까 볼 일 있다는 건 나중에 하려거든. 괜찮으면…….”

한유정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친다.

“아뇨!!”

“뭐?”

“괜찮아요! 오, 오늘은 혼자 게임 하고 싶은 기분이라. 아저씨는 하시던 거 하세요!”

“너 아까는 같이 게임을 하자면서?”

“말씀드렸잖아요! 사춘기! 갑자기 마음 바뀌었어요.”

한유정이 다급하게 설거지를 한다. 어안이 벙벙해서 팔짱을 끼고 쳐다봤다.

쨍그랑! 쨍그랑!

컵 두 개를 더 깨 먹은 한유정이 손에 묻은 물기를 쓱쓱 옷에 문지르며 도망치듯 떠났다.

머리를 긁적이며 식기들을 살폈다.

주방세제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그래, 급하게 할 때부터 그럴 거 같더라.

소매를 걷어붙이고 물을 트는데, 뒤에서 한유정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저씨.”

“아직 안 갔어?”

“네. 여쭤볼 게 있어서요.”

벽 뒤에 숨은 건지, 문 옆으로 머리카락만 빼꼼히 튀어나와 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게 꼭 부끄럼을 타는 것만 같다.

“방금 방에서 하시던 거 있잖아요.”

“응.”

“취미 생활이에요?”

“음, 아니. 그건 아니고.”

식기를 닦으며 말했다.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마음이 시키는 거지.”

“그게 취미잖아요.”

“그런가?”

듣고 보니 맞네.

“옛날부터 하시던 거예요?”

“아니, 오늘 처음….”

내가 이걸 왜 순순히 대답해주고 있는 거지?

얘하고 대화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져 버린다.

경계심을 확 끌어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한참 동안 대답을 기다리던 한유정이 뜨문뜨문 말한다.

“아저씨, 있잖아요….”

“응.”

“저 진짜 화 안 났어요.”

“아까 말했잖아.”

“그냥, 그렇다구요.”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 * *

말끔하게 차려입고 카페에 들어갔다.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조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 현우 씨! 여기에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통화로 말씀하시지,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선물이 있어서요. 실물은 주고받는 게 또 제맛이죠.”

“선물이요?”

“네, 아주 끝내주는 선물입니다.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얼마나 입이 근질거리던지.”

조 기자가 음침하게 웃는다.

­걱정할걸 해라. 우리가 어떤 길드인데. 이미 판 다 짜놨지. 돈만 먹이면 되니까, 너넨 그냥 떠먹여주는 거 받아먹기만 해.

“블랙박스 영상을 몇 번 돌려봤는데, 아직 돈까지 찌르진 않은 모양이더라구요. 그럼 뭐 별거 있겠어요? 카메라 들고 쭉 쫓아다녔죠. 2차 시험 전까지는 돈을 건넬 거라는 의미니까.”

“네?”

잠깐, 이 양반이 지금 줄 선물이 있다는 게…….

“혹시 단서 잡으신 거에요?”

“네.”

그렇지!

조 기자가 서류 봉투에서 사진을 꺼냈다.

태산 길드의 매니저가 누군가에게 돈을 건네고 있었다.

낯선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뭐 하는 사람입니까?”

“하하, 누구겠어요?”

조 기자가 후루룩, 커피를 마시며 설명한다.

“2차 테스트에서 팀 짤 때, 난수 시스템 돌리는 거 아세요?”

“자대 배치처럼요?”

“네, 이게 뭐, 말로는 랜덤이다 랜덤이다 하는데. 결과물만 보는 우리들은 그게 정해진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미리 숫자를 입력해놨는지, 시스템대로 돌아가는 건지. 결국 관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잖아요.”

조 기자가 남자의 정체를 밝혔다.

“협회 쪽 시스템 엔지니어 팀 직원이에요. 뒷돈 창구더라구요.”

“그러니까, 그 말씀은…….”

“축하드립니다. 현우 씨.”

조 기자가 히죽 웃었다.

“핵폭탄을 손에 넣으셨네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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