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한예림 (9)
* * *
쾅쾅!
누군가 거칠게 방문을 두드린다.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8시였다.
“아이씨, 누구야?”
잠결에 투덜거리는데 한예림의 목소리가 들린다.
“야, 김현우! 대체 언제까지 잘 거야?”
쟤가 왜 이지아의 집에 있지?
양옆에 누워있는 이지아와 한유정.
익숙하지 않은 광경에 어제의 기억이 떠오른다.
맞다, 한예림하고 길드 이야기 나눴다가…… 일요일이라 같이 잤었지.
“지아 씨, 잠깐 일어나봐요. 유정아 너도.”
눈을 비비며 하품하는 이지아와 다르게 한유정은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져 있었다.
“야. 한유정.”
볼을 콕콕 찔러도 안 일어난다.
한유정이 눈썹을 찡그리며 볼을 긁적였다.
얘 잠귀 어둡네.
쿵쿵!
“현우야, 아직 자? 있다가 올까?”
어딘가 다급하게 느껴지는 노크 소리에 한유정을 등에 업고 나갔다. 이지아가 비몽사몽간에 비척이며 발걸음을 맞춘다.
끼익!
“아침부터 뭐야?”
“잠깐만.”
“어어?”
한예림이 방안을 둘러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눈동자가 창문하고 침대에 고정돼있다.
닫힌 창문과 건조한 침구류.
한예림의 불편한 안색이 한결 풀어진다.
일련의 과정을 확인한 나는 아니꼬운 감정이 먼저 들었다.
이지아하고 한유정도 옆에 있는데 지금 뭐 하는 거야?
한예림이 어떤 의심을 하는 건지 너무나도 눈에 훤해서, 나도 모르게 속에서 열불이 확 났다.
“너 무슨 생각하는 건데? 적당히 해. 지아 씨랑 유정이한테도 실례잖아.”
"...알겠어. 미안."
풀이 죽은 기색으로 어깨를 푹 떨어트리는데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숨이 막혀와서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등 뒤의 한유정이 뒤척인다.
“어, 유정아. 깼어? 시끄러웠지?”
“아저씨…….”
“응?”
고갤 돌리자 한유정의 얼굴이 코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게슴츠레 눈을 뜬 한유정이 물었다.
“아침밥은요?”
* * *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건지.
무거운 식탁 분위기에 꾸역꾸역 숟가락을 놀리는데 한유정과 시선이 마주쳤다.
얼굴을 보니까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입술을 벙긋거렸다.
괜히 밥 먹자고해서.
한유정도 입술을 벙긋거렸다.
이런 분위긴지 몰랐어요.
“……안 되겠어.”
깨작깨작 생선을 뜯던 한예림이 탁! 젓가락을 내려놨다.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이지아 헌터하고 팔짱 끼고 나온 거. 이해할게. 화장실 같이 가는 거? 뭔지 몰라도 사정이 있겠다고 이해할게.”
이지아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
“그걸 왜 예림 씨가 이해하고 말고 해요?”
“그전까지는 남이었어도 이제는 아니니까요.”
“네?”
“저, 길드 마스터예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이지아 헌터는 우리 길드의 간판 헌터가 되겠죠.”
“…….”
“S급 헌터가 전속 매니저하고 추문이라도 나면 인터넷 반응이 어떨지 아시죠? 길드 평판도요. 그걸 길드 마스터가 미리 관리하겠다는데 주제넘은 짓이에요?”
이지아가 입을 다물었다.
한예림의 말이 맞았으니까.
그녀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침대까지 같이 사용하는 건 이유가 뭔데?”
반말 쓰는 거 보면 나한테 하는 말이 맞는데, 한예림의 시선은 이지아에게 꽂혀 있었다.
“어젯밤 하루종일 이해하려 해봤는데 어떻게 해도 이해가 안 가잖아. 설명해줘.”
“……길드 마스터로서?”
“응. 길드 마스터로서.”
이지아와 한유정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사실, 이건 내 문제가 아니라 둘의 문제였으니까. 한유정 같은 경우에는 특히나 단순한 호기심으로 알아서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유정아?”
그래서 거절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한유정은 의외로 순순히 허락해줬다.
“전 상관없어요.”
“지아 씨, 말 해도 돼요?”
“네.”
선선하게 대답하는 이지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제 능력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한 건, 순전히 한예림을 골탕 먹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럴 리 없겠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1년 전에 각성했는데…….”
“뭐? 누구?”
“나.”
“뭐어?!”
한예림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봤다.
“야! 너무한 거 아니야? 1년 전에 각성했다고? 그걸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눈길을 피하며 변명하듯 대답했다.
“옛날부터 내가 헌터 되고 싶어 하던 거 알았잖아.”
“당연하지!”
“각성한 거 알면 너 성격에 괜히 무리해서 길드 가입시켜줄 게 뻔하니까 말 안 했어. 재능이 워낙 없냐, 내가. 트레이너도 두손 두발 다 들더라.”
한예림이 기쁜 듯 슬픈 듯 왔다 갔다,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이마를 짚으며 허탈하게 식탁에 엎어졌다.
“길드 괜히 나왔어…… 그냥 헌터로 데려올걸…….”
“너 그럼 길드에서 욕 엄청 먹었을걸.”
“차라리 그게 나아.”
한예림이 고개를 홱 들었다. 후회 가득한 얼굴로 눈물을 삼키던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너가 각성한 거하고 침대에서 같이 자는 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아, 그게 사실은 각성한 능력이 마음의 평화인데…….”
마음의 평화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
그리고 이지아와 한유정에 대한 과거들을 설명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지아, 천살성 한유정.
한예림이 얼떨떨하게 한유정을 쳐다봤다.
“에, 에스급이라고? 이 꼬마…… 한유정 씨가? 그것도 천살성?”
꼬마라는 단어에 한유정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한예림이 다급히 말을 바꿨다. 허, 짧게 한숨을 내쉰 한예림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지금 길드 하나에 S급이 두 명이야?”
한예림의 착각을 정정해줬다.
“유정이는 헌터 아니야.”
“그래도 세력으로 따지면…… 아무튼, 그래. 알겠어.”
한예림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인상을 찌푸리던 그녀가 이지아를 쳐다보며 슬쩍 미소지었다.
아,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다.
문뜩 한예림이 각성한 능력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그럼, 이지아 씨하고 붙어 다니는 게 마음의 평화 때문이란 거지? 침대나 화장실 갈 때까지 붙어 다니던 거.”
이지아가 밝게 대답했다.
“어쩔 수 있나요? 항상 미안해하고 있지만, 현우 씨도 괜찮다고 했으니까요.”
“이지아 씨는, 현우한테 미안한 거죠? 항상 붙어 다니는 거 때문에. 침대에서도 현우가 편하게 잠도 못 자잖아요. 이지아 씨가 얼마나 매력적인데 현우가 잘 때 신경 쓰여서 잠이나 자겠어요?”
“……그쵸?”
“그럼 다른 방안이 생기면 현우를 위해 떨어질 수도 있겠네요? 이지아 씨가 무슨 남자하고 달라붙기 좋아하는 변태도 아니잖아요.”
“……?”
눈웃음치던 이지아가 불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예림이 실실 웃고 있기 때문이다.
“아, 이지아 씨. 웃어서 미안해요. 사실 저도 각성자예요.”
“네?”
“현우 불편할까 봐 걱정하는 이지아 씨를, 제가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아서요.”
“……무슨 능력인데요?”
한예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경계하는 이지아에게 코웃음 친 그녀가 나와 이마를 맞댔다. 한예림 능력의 발동 조건이었다.
굳이 이마가 아니더라도 신체 일부분만 맞닿으면 된다.
이지아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무슨 능력인데요?”
“복사요.”
“네?”
“능력 복사요. 방금 마음의 평화 복사했어요. 저도 현우처럼 마음의 평화가 있는 거예요. 아시겠죠?”
한예림이 이지아의 귀에다가 속삭였다.
“그니까 현우한테 꼬리 그만 치고 이쪽으로 넘어와, 여우년아.”
한예림이 이지아를 끌어당기려 했다. 우뚝, 멈춰선 이지아가 내 옆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굳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급히 한유정을 불렀다.
“유정아.”
“네?”
“너가 예림 씨한테 갈래?”
“제, 제가요?”
침을 꿀꺽 삼킨 한유정이 애처롭게 날 쳐다본다.
내가 머릴 긁적이며 한유정의 편을 들어줬다.
“지아 씨.”
“네?”
“복사라고 해도 능력 그대로 복사하는 건 아니라, 유정이가 예림이한테 넘어가면 안 돼요.”
“…왜요?”
“경험치까지 베끼는 것도 아니고, 원본의 절반도 힘을 못 내거든요. 천살성까지 커버가 될지는 예림이도 몰라요.”
한예림의 복사 능력은 보기엔 강력해 보인다. 하지만 한예림이 헌터가 아니라 매니저로 노선을 잡은 이유가 있었다.
각성 능력에 레벨이 있다 친다면, 한예림은 LV1 상태…… 그중에서도 절반 정도의 힘밖에 끌어내지 못한다.
내 마음의 평화 최초 범위가 바스타드 카페 정도였으니까 한예림은 그 절반이 되는 것.
다중으로 능력을 보유하지도 못하고, 한 번 쓸데마다 다시 접촉해서 원래 보유자에게 능력의 사용을 허락받아야 한다. 사용 시간도, 쿨타임도 제한이 있다.
여러모로 양산품에 불과하단 것이다.
이지아의 정신적인 문제와 다르게 한유정은 각성 능력의 문제다.
이지아와 함께 할 때는 마음의 평화 사정거리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천살성은 다르다.
만약, 한예림의 능력이 한유정의 천살성을 담지 못한다면?
한유정은 곧바로 한예림을 죽이게 되겠지.
도저히 실험할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넘어간다면 이지아가 맞았다.
한예림이 고소하다는 듯이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경험상 12시간 정도 커버되지 않을까 싶네요. 지아 씨? 빨리 이쪽으로 넘어오세요. 현우 불편해하잖아요.”
“현우 씨…?”
처량한 얼굴로 날 쳐다보던 이지아가 힘없이 한예림에게 끌려갔다. 한예림이 유쾌하게 웃었다.
“아하하. 한국 와서 오랜만에 웃어보네.”
“그, 그래?”
“너, 연차도 없이 일한다면서?”
“응.”
“이지아 헌터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12시간이라도 편히 쉬고 있어.”
“괜찮은데.”
“모처럼 휴식이니까 푹 쉬어. 두 달 동안 하루도 못 쉬는 직장이 어딨냐?”
“사실, 맨날 집에만 있어서 괜찮았어.”
한예림이 거실에서 캐리어 가방을 끌고 나왔다. 그녀가 말했다.
“이지아 씨? 잠깐 저하고 나가죠.”
“네? 어딜요?”
“길드 일이니까 따라오세요. 빨리.”
한예림이 이지아를 질질 끌고 갔다. 손을 흔들며 배웅해줬다.
모처럼 휴일인데, 뭐하지?
어색하게 웃는데 한유정하고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얘한테 게임 알려주기로 약속했었지.
한유정도 약속이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게임 패드를 그림자 속에서 꺼냈다.
“아저씨.”
“응?”
"시간 남는거죠?"
"그치."
“그럼…."
한유정이 새침한 얼굴로 묻는다.
"저, 게임 알려줄 수 있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