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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16화 (16/112)

〈 16화 〉 한예림 (4)

* * *

한예림과의 찝찝한 만남이 있고 며칠이 흘렀다. 이지아와 함께 집 근처 마트에 장을 보러 나왔다.

“아, 맞다! 현우 씨.”

이지아가 정육점 앞에서 날 불렀다. 카트를 끌고 가던 나도 자연스레 멈췄다.

“저희 냉장고에 고기 있던가요?”

“먹은 지 꽤 된 거 같은데…… 아마 없을걸요?”

“그럼 오랜만에 고기 먹어요, 우리.”

그렇게 말한 이지아가 매장에 진열된 고기들을 쓸어 담았다. 카트에 순식간에 탑이 세워졌다.

“아하하…….”

이걸 대체 어떻게 다 먹으려는 거지. 어색하게 웃으며 카트를 밀었다.

이지아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 걸어간다.

그녀를 힘겹게 따라갈 때였다.

“그, 김현우 씨?”

웬 남자가 세상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건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누구…?”

날 어떻게 아는 건지 몰라서 조심스레 말끝을 흐렸다. 남자가 품속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저는 백승현이라고 합니다.”

빳빳한 명함에는 길드의 이름과 함께 남자의 직책이 박혀있었다.

백일 길드의 스카우터라. 스카우터가 헌터도 아닌 날 찾아온 건 아닐 텐데.

힐끔 돌아보니 어느 사이에 옆으로 다가온 이지아가 내 손에 쥐어진 명함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명함을 건넸다.

“제가 아니라 지아 씨 손님 같은데요?”

“……저요? 길드 스카우터가요?”

“네.”

이지아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명함을 다시 남자에게 돌려줬다.

“아직 길드 생각 없어요.”

“이지아 헌터!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대화 부탁드립니다!”

이지아가 내 손목을 잡았다.

“현우 씨, 그만 가요.”

“잠깐만요.”

“...?”

“지아 씨가 불편하시면 이분하고는 제가 대화 나누고 있을게요. 멀리 가지 마시고 근처에서 먼저 쇼핑하고 계세요.”

“네?”

남자의 명함을 다시 받았다. 그가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뇨, 저도 이야기 한 번 듣고 싶어서요. 주변 사람들 쳐다보니까 그쯤 하시고 말씀 좀 나누시죠.”

“아, 그럼…….”

이야기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였다.

이지아는 S랭크 헌터다. 그녀는 화신 길드라는 거대 길드에 소속돼있었다. 원래의 이지아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공룡이었다.

그런데 청문회 방송을 통해 화신 길드장과 척을 진 사실이 표면에 드러났다.

바보가 아니라면 다들 알았겠지.

길드장이란 인물이 청문회에서 대놓고 이지아의 약점을 드러내며 어떻게든 보내 버리려고 했는데.

청문회를 보고 있던 길드들은 확신한 것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이지아의 길드 탈퇴설이 진실이라고. 이적 시장에 국내 최정상급 헌터가 불쑥 프리로 튀어나왔다.

군침이 돌았을 것이다.

눈앞의 남자를 보낸 길드처럼 되든 안 되든 일단 찔러보자는 심정이었겠지.

“길드로 와주시면…….”

남자가 계약에 대해 언급하려고 했다. 내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아, 거기까진 아직 괜찮아요. 생각해보고 주신 번호로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넵!”

막연한 약속에 남자가 마땅찮은 얼굴을 숨기며 물러났다. 이지아가 와인을 카트에 넣으며 물었다.

“이야기 끝났어요? 뭐래요?”

“최대한 조건 맞춰줄 테니까 길드에 들어와 달라네요.”

“아.”

우물쭈물하던 이지아가 말없이 카트를 끌었다. 지금의 대화 내용이 많이 불편한 모양이다.

사실, 이지아에게 다시 헌터 활동을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꺼냈다.

그럴 때마다 이지아는 지금처럼 꺼림직해 하는 태도를 보였다. 모두 어비스 공략대 때문이다.

원래부터 멘탈이 약하던 이지아에게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 기억이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것이다.

어렵다 어려워.

마음의 평화로 트라우마까지는 못 지워주나?

저렇게까지 내키지 않아 하는 걸 보면 괜히 마음 약해져서 설득하기도 힘들어진다.

마트에서 쇼핑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자동차에 짐을 싣고 집으로 가는 와중이었다.

“지아 씨.”

“네?”

“싫으시면 안 해도 돼요.”

“뭘요?”

“헌터요.”

백미러를 힐끔 보니 이지아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 쳐다보고 있다.

망설이던 그녀가 겨우 입을 뗐다.

“…현우 씨는, 매니저 일 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그쵸.”

“근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요?”

“아니 뭐, 너무 제 욕심만 부리는 게 아닌가 싶더라구요. 지아 씨 힘들어하는 거 옆에서 다 봤는데.”

결국, 개인적인 욕심일 뿐이었다.

우리 둘 다 돈에 시달릴 일은 없었다.

이지아가 조금 더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기다려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길 안내를 종료합니다.

“도착했네요.”

트렁크를 열어 양손 가득 짐을 드는 와중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웬 남자가 헛기침하며 내 눈칠 살피고 있었다.

“김현우 씨?”

“네?”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

불쑥 내미는 명함.

확인할 것도 없이 길드 사람이다.

등 뒤에서 내 옷깃을 꽉 붙잡는 이지아의 손길이 느껴진다.

남자의 말을 끊고 지나쳐갔다.

“죄송합니다. 아직 길드 생각이 없어서요.”

“제발 말씀만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아, 됐다니까요.”

사정사정하며 달라붙는 남자를 떼놓고 가는데 멀리서 또 누군가 다가온다.

“저는…….”

“됐습니다.”

또 온다.

“이지아 헌터!”

“제가 매니저니까 지아 씨 말고 저한테 말씀하세요!”

또…….

“김현우 씨!”

“됐다니까!”

시발 무슨 팬 미팅하는 것도 아니고. 뭔 놈의 사람들이 이렇게 우글거려?

한두 걸음 옮길 때마다 어떻게든 명함을 꽂아 넣으려는 스카우터들이 찾아와서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힘겹게 그들을 밀치며 겨우겨우 집에 돌아왔다.

이지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현우 씨, 괜찮아요?”

“사람들이 너무 억세네요. 지아 씨는요?”

“저야 뭐…….”

그래. S급인데 멀쩡하겠지.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한유정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비춘다. 피곤함에 찌든 내 안색을 보더니 고개를 흔든다.

“밖에 아직도 있어요?”

“누구?”

“양복 입은 아저씨들이요.”

“스카우터들? 그 사람들이 있는지는 너가 어떻게 알아?”

“편의점 갔다 오는데 여기 사냐고 물어보면서 명함 건네더라구요.”

한유정이 신발장을 가리킨다. 수북이 쌓인 명함이 한가득이다.

한유정한테까지 명함을 돌렸다고? 나나 이지아야 관계자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일반인한테 뭐 하는 짓이야.

짜증 나서 명함들을 쓰레기통에 홱 집어 던져버렸다.

“버려. 이런 걸 왜 받아? 다음부터는 그냥 무시하고 들어와.”

“필요할 줄 알고 받은 건데.”

“뭐가 필요해?”

“슬슬 길드 들어가야 하지 않아요?”

한유정이 봉투를 뒤적이며 아이스크림을 꺼내 앙 물었다. 이지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길드를 우리가 왜 들어가?”

“돈 없잖아요.”

“누가?”

“아줌마요.”

실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S급 헌터가 돈이 없긴 왜 없어?

그런데, 이지아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어색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굳은 이지아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지아 씨…?”

의미심장한 태도에 말끝을 흐리니 이지아가 황급히 변명했다.

“어비스 공략 실패하고 개인 투자금 회수를 못 해서…….”

“…?”

“청문회 준비한다고 로펌에도 돈 쓰고, 훈련장이나 기타 장비들 때문에 집 유지비도 만만치 않아서…….”

“…….”

“그래도 생활비는 충분해요!”

이지아의 변명에 한유정이 끼어들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저씨 월급은요?”

“으응?”

“아저씨한테 월급 엄청 많이 주시던데 10년 고용 아니었어요? 생활비 뺄 거 다 빼면서 유지가 되나?”

“…!”

진짜 부자들은 통장에 돈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모른다고 했던가.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계좌 잔액을 확인하는 이지아를 보니 그 말이 맞는구나 싶다.

잔액을 확인한 이지아의 눈동자가 위로 데구르르 굴러간다.

“큰일 났다아…….”

“지아 씨?”

홱, 쪼그려 앉은 이지아가 방금 내가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 명함들을 줍는다.

당황한 내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지아 씨? 지금 뭐하시는거예요?”

“잠깐만요. 현우 씨. 명함 좀 먼저 챙기고…….”

“지아 씨!”

“……돈이 없어요.”

“네?”

“현우 씨한테 드릴 돈이 없어요.”

그 정도였어? 내가 물었다.

"얼마나 있는데요?”

“...2년이면 거덜 날 거 같아요.”

한유정이 아이스크림을 깨물며 덧붙였다.

“월급 못 주면 계약 해지될 텐데.”

이지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한유정을 눈으로 한 번 쏘아붙이고는 이지아의 등을 토닥거려줬다.

“2년이면 아직 멀었잖아요.”

“…….”

“월급 밀리면 나중에 받죠, 뭐.”

능력에 비해 이미 과할 정도로 많이 받고 있다.

욕심부리면서 계약사항에 대해 따박따박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S급이니까 반드시 받을 거란 확신도 있고.

이지아 정도면 우량주지.

“아직 시간 많이 있으니까 트라우마부터 먼저 고치고 차츰…… 지아 씨?”

“역시, 안 되겠어요.”

“네?”

이지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가 나를 샅샅이 훔쳐본다.

이미 몇 번인가 날 옭아맸던 이지아의 집착어린 감정이 눈동자 위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현우 씨, 저 일 할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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