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이지아 (5)
* * *
시야가 어두웠다. 손을 움직이려 해도 무언가에 꽉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으읍! 읍!”
도움을 구하기 위해 비명을 질렀지만 입을 막은 천 조각이 방해했다.
“현우 씨.”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
누구지?
뺨을 어루만지는 손의 감촉이 말랑말랑했다.
이지아!
이건 이지아의 목소리였다.
빌어먹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S급 헌터라고해도 이런 일이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여기서 나가면 당신 히어로 협회에 고소할 거야! 고소할 거라고!
“현우 씨가 없으면 어차피 저는 죽는걸요.”
내 생각을 읽은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이곳에서 저하고 같이 살면 되는 거예요.”
그녀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웃었다.
“영원히.”
*
*
*
“우와아아아아악!!!”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비몽사몽간에 머리를 긁적이고 있으려니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지아가 숙소랍시고 자기네 집에 나를 끌어들인 것.
언제 준비했는지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내가 살던 월세방의 짐을 모조리 이곳으로 옮겨놓은 거까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현실감이 없는데.
아직 꿈인가? 현실 맞지 이거?
부스럭거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끼익!
““아.””
방문을 열고 나가니 때마침 옆방에서도 이지아가 나왔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눈도 퀭하니 걸어 다니는 시체나 다름없었는데.
지금은 볼때기도 탱탱한 게 기름칠 먹인 것마냥 번들거렸다.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활력적으로 변해가는 느낌이었다. 실제로도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잠자리는 괜찮으셨어요?”
“…넵, 덕분에요.”
잘 자긴 개뿔.
이지아의 양면적인 모습 때문에 밤잠을 설치다가 악몽까지 꿨다.
순간 악몽 속 이지아의 언행이 떠올랐다.
“어우씨, 소름 돋아.”
나도 모르게 양 팔뚝을 슥슥 문질렀다.
“네? 추우세요?”
이지아가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다가오는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하, 날씨가 쌀쌀하더라고요.”
그런 꿈의 내용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지아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식탁으로 나를 끌고 갔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이지아가 소매를 걷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음식을 준비했다. 플레이팅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한 한식들이 식탁 위로 빠르게 올라왔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서 무난하게 한식으로 준비해봤어요.”
이지아가 찌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집에 전속 요리사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지아 씨.”
“네?”
“앞으로 제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악몽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지아가 테이블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괬다.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되는데…….”
작게 중얼거린 이지아가 고민에 빠졌다. 괜히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갑자기 홱 돌변해서 지하에 가둬놓는 거 아니야?
악몽이 아니라 예지몽인 건?
...그런 끔찍한 상상은 하지도 말자.
“아!”
짝!
이지아가 손뼉을 쳤다. 깜짝 놀란 내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길드에서 나왔잖아요.”
“그, 그렇죠.”
“프리랜서로 움직이다 보니 혼자 해결하기에는 많이 바쁘거든요. 그러잖아도 매니저 한 명 뽑을 생각이었는데…….”
이지아가 우물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저 정도까지 이야기하는데 눈치 못 채면 병신이지.
내가 선뜻 나서줬다.
“그럼 제가 겸직할게요.”
“정말요? 고마워요, 현우 씨!”
이지아가 반색하며 고마워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외부에서 보여지는 시선도 있으니까.
멘탈 케어 코치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해봤자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을 게 분명했다.
온갖 추문이 뒤따르겠지.
어제 복귀했다는 소식으로도 그런 욕설을 박았는데…….
이지아의 우울증을 내 능력으로 진정시키는 것과 별개로 욕을 왕창 먹는다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래, 차라리 매니저가 낫지 싶다.
어디 가서 소개할 때 때깔부터 다르잖아.
‘무슨 일 하세요?’
‘S급 헌터 이지아 씨의 매니저를 하고 있습니다.’
‘우와.’
역시 사회적 시선도 중요하지.
띠리링.
전화벨 소리. 이지아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지아 양, 청문회 일정이 잡혔네.
협회장인가.
어제 말했던 청문회에 관한 통화인가 보다.
귀를 쫑긋 세운 채로 숟가락을 들었다.
음, 찌개 맛있네.
“생각보다 일 처리가 빠르시네요.”
전국민적 관심사니까. 인터넷은 봤나?
“난리긴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정은 언제로 잡혔죠?”
내일일세.
“알겠──”
목에 걸린 찌개가 역류했다.
“쿨럭!”
사레들린 내가 잔기침을 계속 토했다. 통화하던 이지아가 냉장고로 다다다 뛰어가서 물을 꺼내왔다.
“괘, 괜찮으세요?”
“쿨럭! 켁!”
괜찮다는 의미로 손사래를 쳐줬다.
지아 양? 방금 무슨 목소리지? 혹시 지금 밖인가?
협회장이 대답 없는 이지아를 계속 불렀다. 이지아가 내 등을 토닥이며 수화기로 입을 가져다 댔다.
이지아, 당신 뭐 하는 거야. 지금 제정신이야?
다급하게 그녀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
당황한 이지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수화기를 손으로 가리며 입을 벙긋거렸다.
‘내일은 안 된다고 하세요.’
“네?”
‘어떤 이유든 간에 안된다고 하세요. 그리고 청문위원들 명단 확인해달라고 하시구요.’
지야 양? 듣고 있나?
눈빛으로 마구 재촉했다. 얼빠진 표정을 짓던 이지아가 입술을 열었다.
“혀, 협회장님?”
말하게.
“제가 어비스 던전에서 얻은 상처가 아직 다 낫지가 않아서요. 당장에는 안될 거 같아요.”
……청문회에 참석 못할 정도로 말인가?
“네. 그리고…….”
이지아가 힐끔 나를 쳐다봤다. 내가 입술을 크게 벌려 또박또박 발음해줬다.
‘청 문 회 위 원.’
“청문회 위원분들 명단 좀 보내주시겠어요?”
협회장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너구리 같은 새끼.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애라고 어물쩍 넘어가려고 그래?
……명단은 절차에 따라 정식으로 서면 통보하지.
대충 이야기도 마무리되는 거 같고 이지아가 말실수 하기 전에 여기서 끝내는 게 낫겠다.
손날로 목을 찍찍 그었다. 이지아가 고갤 끄덕였다.
“쿠, 쿨럭! 제, 제가 몸이 아파서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연기 거 더럽게 못 하네.
너구리 녀석도 눈치가 있으면 대충 알았겠지.
……후우, 알겠네. 나중에 다시 통화하지. 몸조리 잘하시게.
협회장이 특히나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전화가 끊겼다.
“…….”
“…….”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미치겠네.
이 아가씰 어떡하지 진짜?
“……지아 씨.”
“네, 네?”
이지아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며 조곤조곤 타일렀다.
“청문회 일정이 내일이라는데 그걸 그냥 알겠다고 대답하면 어떡해요?”
청문회 일정을 하루 만에 잡아 놓는 단체가 어디 있나.
자료를 준비하는 최소한의 기간이 있었다.
이건 이지아에게 지극히 불리했다. 전에 통화로 듣기로는 이지아는 이미 한차례 청문회 출석을 거부했다고 언급했었다.
‘──청문회 일정 다시 잡아주시고요.’
‘자네 청문회 만큼은 나서기 싫다고 하지 않았나?’
위원회 쪽은 이미 이지아를 공격할 단서들을 모두 준비해놓은 상태일 것이다. 전에 쓰려고 했던 자료를 재활용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니까.
반대로 이쪽은 하루 가지고는 아무런 준비도 못 한다.
이러면 당연히 이길만한 싸움도 못 이긴다. 저쪽에서는 온갖 숫자와 증인들로 이쪽을 농락할 텐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가서 앵무새처럼 그런 사실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합니다만 말하다가 들어오겠지.
말이 이어질수록 이지아의 고개가 밑으로 푹푹 꺼져 들어갔다.
“듣고 보니 현우 씨 말이 맞네요. 제가 성급했어요…….”
“그리고──”
“더, 더 있어요…?!”
“당연하죠! 엉덩이 의자에 붙이세요!”
어딜 혼자 끝내려고.
청문위원의 성격에 따라 청문회의 분위기는 극과 극일 게 분명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본인이 스타로서 뜨길 원하는 위원도 있을 테고, 이익 단체의 요구로 무작정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들어갈 위원도 있을 수 있다.
명단은 그런 위원들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위원직 자리에 어디 산골 마을에서 살던 김 아무개 씨 데려올 리도 없고.
이름과 직책만 알면 이쪽에서도 성향 정도는 조사해서 알맞게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문뜩 이지아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선을 돌리니 이지아가 입을 벌리고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감탄했다.
“대, 대단하시네요. 현우 씨는.”
“……대단하긴요.”
대단하긴 S급 헌터가 대단하지.
한 업계의 최고 권위자인데.
알량한 사회지식 따위는 이지아의 경력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이지아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못내 쑥스러워 숟가락을 들었다.
찌개는 살짝 식었지만 맛있었다.
“……매니저 겸직한 첫날부터 한 건 했죠?”
장난스레 묻자 이지아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럼요! 전부 현우 씨 덕분이에요! 현우 씨 없었으면 청문회에서 눈뜨고 코 베일뻔했어요!”
혀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어디까지나 장난처럼 보이도록 말해야 한다.
어제의 대화. 오늘의 악몽.
그것들이 자꾸만 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저 숙소는 따로──”
“안 돼요.”
서글서글하게 웃던 이지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엄동설한이 몰아친다.
이지아가 포크로 방울토마토를 찍었다.
콰직!
아니 이게 지금 방울토마토에서 나는 소리 맞아?
화목한 식탁 분위기가 무슨 장례식장에서 육개장 먹는듯 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침묵을 참지 못한 내가 멋쩍게 혼잣말을 했다.
“아…. 찌, 찌개 얼큰하니 맛있네.”
“…….”
이지아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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