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23. 결심
결과적으로, 서이안은 ‘지화자’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 망할 자식. 곱게 의뢰를 받을 것이지. 전생에 돈 없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지화자’ 쪽에서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는 대가로 말이다. 지화자 이전 랭킹 1위였던 지유화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생명 수당 내놔.”
서이안은 길드원들의 안위를 챙긴다는 명목하에 지화자로부터 돈을 뜯어냈다.
백 단위도 천 단위도 아닌, 억 단위로 말이다.
순식간에 홀쭉해진 통장 숫자에 지화자가 혀를 찼다.
“욕심 많은 독주 새끼.”
어떻게 모은 돈인데, 하필 스콜피언에게 모두 주게 되다니.
“좋게 생각해요.”
유은영은 그녀와는 다르게 웃는 낯이었다.
서이안으로부터 유승민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연락을 조금 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화자 씨께서 스콜피언 측에 지불한 돈은 제가 꼭 갚을게요.”
“언니가 무슨 수로?”
지화자는 센터의 최고 권위자인 나화진과 동등한 연봉을 받는 중이었다.
여기에 더해 게이트를 공략하러 들어갈 때마다 생명 수당이 추가됐다.
그야말로 억대 연봉.
하지만 유은영은 그에 비해 절반도 못 미치는 연봉이었다.
그녀가 스콜피언 측에 지불한 금액을 갚으려면 10년은 족히 걸릴 터.
“언니는 갚을 생각하지 말고 몸조심이나 해. 내 몸 성하게 돌려줘야 할 거 아니야?”
“지화자 씨야말로 몸조심하죠?”
여기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유은영’이었다.
당장 그녀를 얻기 위해 경고하는 차원으로 유승민을 건드리지 않았던가?
생각하기만 해도 분노가 차올랐지만 유은영은 침착하게 이성을 유지했다.
‘지화자’의 몸으로 움직이면서 분노에 휩싸이면 잘 될 일도 그르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지유화는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글쎄.”
아마 인적 드문 어딘가에서 키메라를 이용한 실험을 진행 중이지 않을까?
지화자는 뒷말을 삼켰다.
키메라를 언급하는 순간, 유은영의 낯빛이 어두워질 거라는 걸 뻔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화자는 능숙하게 유은영의 관심을 돌렸다.
“어차피 지유화는 때가 되면 알아서 나타날 거야. 지금은 앞으로의 일에 집중해.”
“앞으로의 일이라면…….”
“유승민 씨가 그렇게 됐는데 뭔가 반응을 보여줘야지.”
지유화는 분명 자신들이 모르는 곳에서 상황을 지켜볼 테니.
어쩌면 가증스럽게 바로 옆에서 재잘재잘 유승민에 대해 떠들어 댈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이 아닌, 남의 몸을 빌려서 말이다.
그러니까.
“연기 한번 해보자고.”
지유화를 속일, 연기를.
지화자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 *
“모두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하태균 씨.”
하태균이 사무실을 휙휙 둘러보고는 ‘지화자’에게 물었다.
“라이가 안 보이는군요?”
“오빠는 저기에 있어!”
리아가 유은영 대신 답해줬다.
하태균이 소파에 드러누워 쿨쿨 자고 있는 라이의 모습에 놀란 눈을 보였다.
“왜 저기에서 자고 있답니까?”
“밤새 게임 하느라 잠을 못 잤다더라고요.”
지화자가 서류를 정리하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센터에 자러 오는 건지, 일하러 오는 건지.”
“하하! 라이의 일이야 제가 대신 처리하면 되는 일이잖습니까?”
하태균이 그렇게 말하면서 라이 몫의 서류를 자신 쪽으로 옮겼다.
“지후는 잘 데려다줬습니까?”
“네, 보면 볼수록 애가 의젓하더라고요. 원래 그 나이대의 애는 보호자 곁에서 잘 안 떨어지려고 하는데.”
“하성이를 닮아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하태균이 호탕하게 웃고는 말을 덧붙였다.
“어제, 하성이한테 지후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성이한테 듣기로는 팀장님과 유은영 씨께서도 알고 계시다던데…….”
“아아, 네. 맞아요.”
유은영이 씁쓸하게 웃었다.
“가하성 씨께서 빨리 퇴원하시면 좋겠네요.”
“하긴, 팀장님께서 암만 잘해주셔도 가족의 품이 최고이니 말입니다. 그나저나.”
하태균이 시계를 흘긋거리고는 물었다.
“유승민 씨는 아직인가 봅니다?”
“그러게요. 원래 진작 출근했을 인간인데.”
‘유은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덤덤하게 말했다.
“뭐, 오는 길이 막히고 있나 보죠. 금방 올 거예요.”
하태균도 그 말에 동의하며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전 9시가 지날 때까지 유승민이 출근하지 않자 그의 낯빛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저, 유은영 씨. 아무래도 유승민 씨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말입니다.”
‘유은영’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 망할 오빠는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지화자 씨, 연기 잘 하시네.
유은영이 감탄하며 그녀를 쳐다볼 때, 지화자가 말했다.
“팀장님, 죄송하지만 저 대신 오빠한테 전화 좀 걸어줄래요? 전원이 다 됐네요.”
“아, 그런 거라면 제가 대신 전화를 해보겠습니다.”
하태균이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십니다.”
“정말요?”
“네, 유은영 씨.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전화해보겠습니다.”
결과는 똑같았다.
유승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의 휴대폰은 진작 망가진 상태였으니까.
“아무래도 유승민 씨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만…….”
조심스럽게 내뱉는 목소리에 ‘유은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 늦잠 자고 있거나 그러고 있겠죠. 오빠가 평범한 각성자도 아니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유은영’의 표정은 정말 어두웠다.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걱정할 정도로 말이다.
그때, ‘지화자’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우선, 점심시간까지 기다려보도록 하죠. 그때까지 출근을 안 하면 유은영 씨와 함께 유승민 씨 집으로 찾아가 볼게요.”
지화자가 가하성과 함께 실종됐던 일로 0팀은 누군가의 부재에 굉장히 민감하게 됐다.
다른 팀이면 하루 이틀 무단결근해도 그러려니 할 일을, 0팀의 모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 거다.
‘지화자’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승민이 오빠,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유은영’이 리아의 걱정에 결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아무 걱정말고 네 오빠 몫까지 열심히 일이나 해.”
“네에.”
리아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 * *
유승민은 점심시간이 지날 때까지 출근하지 않았다.
그가 왜 소식도 없이 결근하게 됐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0팀에서 두 명뿐.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걱정돼서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제가 계속 유승민 씨한테 연락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태균이 유승민의 집으로 출발하려는 지화자와 유은영에게 말했다.
“나랑 오빠도 거미 친구들 이용해서 승민이 오빠 찾아보도록 할게!”
리아도 한 손을 번쩍 들었다. 라이는 졸음기 가득한 눈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누님들, 조심히 다녀오세요.”
지화자와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인 후 길을 떠났다.
그들이 향한 곳은 유승민의 집.
유승민이 집에 있을 리가 없지만 이런 식으로 그를 찾는 척 굴어야했다.
“안 그러면 지유화가 의심할 거야. 애초에 지유화의 목적은 ‘유은영’을 불안하게 만드는 거니까. 그러니 어울려줘야지.”
그러면서 지화자는 말했었다.
“어제 새벽의 일은 걱정 마. 내가 곁에 있는 한, 지유화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
맞는 말이었다.
지유화는 단 한 번도 지화자와 유은영이 함께 있을 때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지화자는 그저 웃기만 했을 뿐.
어쨌거나 도착한 유승민의 집.
“왔냐?”
빈집인 줄 알았던 곳에 누군가 있었다.
“서이안 씨.”
스콜피언의 길드장인 서이안이었다.
눈 밑에 다크써클이 짙게 진 그가 두 사람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왜 이렇게 늦어?”
“최대한 빨리 온 거예요.”
지화자가 퉁명스레 대답하고는 물었다.
“몰래 온 거죠?”
“당연하지.”
스콜피언의 유능한 인재를 통해 단번에 이곳까지 이동했다며 서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참고로 폐급 힐러, 네 어머니는 걱정 마. 역시 우리 길드의 유능한 인재들이 24시간 지키고 있으니까.”
“고마워요.”
“왜 지화자 네가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야?”
“아, 그게.”
유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아끼는 팀원의 일이니까 이러죠.”
“네가 팀원을 아낀다니.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말이야.”
‘지화자’가 이상한 거야 작년 겨울부터 시작된 일이니까, 뭐.
서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서 너희는? 뒤에 따라붙은 사람 없지?”
“있다면 지화자 팀장님께서 알아차렸겠죠.”
“하긴.”
서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지유화 님께서 어디에 있는지 짐작 가는 곳 있어?”
“지유화가 저지른 악행을 모두 알았을 텐데 여전히 그 인간을 ‘님’이라고 부르는군요?”
지화자가 비아냥거렸다.
“습관으로 굳어진 걸 어쩌라고? 그리고 나는 아직 못 믿어.”
서이안이 팔짱을 꼈다.
“너희를 돕기로는 했지만, 내 두 눈으로 확인을 좀 해봐야겠어.”
“지유화가 정말 악인인지요?”
“그래.”
유은영의 말에 서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화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유승민을 그 꼴로 만든 것만 봐도 이미 악인이지 않나?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일단 고맙게 여겨야겠지.’
서이안이 자신들의 의뢰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아니.
자신들의 이야기를 지유화에게 흘렸다면 더 최악인 상황이 벌어졌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너희에게 완전히 협조하는 건, 지유화 님의 실체를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야.”
“어쩔 수 없죠. 서이안 씨께 계속 저희를 믿어 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온전히 서이안의 몫.
“소모적인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지유화에 대해 정보를 좀 공유해볼까요?”
“좋아.”
서이안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