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21. 자매
지유화다.
정말 지유화다.
“화자야, 내 동생.”
다정하게 저를 부르며, 지화자를 좀먹었던 존재.
그녀의 하나뿐인 언니.
끝내 지화자가 제 손으로 죽였던 지유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놀라셨나보네요?”
“아…….”
지화자가 탄식이 튀어나온 입을 황급히 막았다.
입을 막은 손이 벌벌 떨렸다.
‘침착하자, 침착해.’
동요했다가는 끝이다.
저 눈치빠른 괴물이 자신을 알아봤다가는 모든 게 끝.
지화자가 작게 숨을 내쉰 후,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정말로 살아계셧네요?”
“살아난 거예요.”
지유화가 싱긋 웃었다.
“저는 정말 죽었었거든요. 우리 동생한테.”
“그런데 어떻게 살아있는 거죠?”
“말했듯, 다시 살아났으니까요.”
“그러니까 어떻게!”
지화자가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어떻게 되살아나신 건가요?”
“으음, 글쎄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드려야하지?”
지유화가 한쪽 팔꿈치를 다른 손으로 괸 후에 미소를 그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유은영 씨, 시나리오 게이트를 클리어한 적 있으시죠?”
“네, 있습니다.”
“그 게이트가 단순히 만들어진 곳이라 생각하세요?”
“무슨 말씀이죠?”
“한 마디로 게임 속 세상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이에요.”
시나리오 게이트에서는 다양한 종족을 만날 수 있다.
인간을 비롯한 마족, 엘프 등등.
각성자들은 그들 모두를 단순한 NPC로 취급했다.
그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존재로 취급한다면, 시나리오 게이트를 공략하는데 지장이 있을 게 뻔했으니.
하지만, 단 한 명.
“유은영 씨, 바보야? 내가 말했잖아! 이곳은 공략되면 사라질 세계라고!”
“그렇다고 해도요! 살아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암만 NPC라고 해도 사고할 줄 아는 사람들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모른척 해요?”
유은영은 아니었다.
지화자가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게임 속 세상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지유화가 작게 웃음을 흘린 후 입을 열었다.
“유은영 씨의 말대로 시나리오 게이트에서 만나는 세상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 따위가 아니에요.”
무도 실존했던 세상들이라면서 지유화가 말했다.
“그렇지만 모종의 이유로 멸망해 시나리오 게이트란 이름으로 구현되게 됐죠.”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요?”
지휴와가 ‘유은영’의 말을 끊은 후 웃으며 대답해줬다.
“봤으니까요.”
지유화는 그리 말하면서 ‘유은영’에게 다가갔다.
“사실, 저도 끝이라 생각했어요. 사후 세계같은 건 믿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웬 걸?”
지유화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눈 떠 보니 새로운 세상인 거 있죠? 그것도 언제인가 공략해본 적이 있는 시나리오 게이트에서 만났던 세상!”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면서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더군요. 그런 경험을 몇 번이고 반복하게 되니.”
지화자가 조용히 입을 다문 채로 눈 앞의 여자를 쳐다봤다.
언제인가 시나리오 게이트에서 그녀는 제 언니를 만났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말이다.
닮은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지유화는 제게 있어서 악몽이며 괴물이었으니.
그런 존재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버젓이 살아있다는 걸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애써 부정했던 사실이 제 앞에 현실로 도래했다.
지화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 손으로 죽인 언니가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지화자가 초연한 태도로 지유화에게 물었다.
“지유화 씨가 머물렀다는 세상은 어떻게 됐죠?”
“어떻게 됐을 것 같으세요?”
답은 뻔했다.
“멸망했겠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유화가 흥미롭다는 듯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유은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지유화 씨가 그러셨잖아요. 눈을 뜬 세상은, 시나리오 게이트에서 공략했던 세상이었다고.”
그러면서‘ 유은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그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시나리오 게이트에서 만날 일이 없었겠죠.”
“맞아요, 유은영 씨.”
지유화가 유쾌하게 대답했다.
“뭘 어떻게 해도 제가 몸담고 있던 세상은 계속 망하더라고요. 그럴 운명이었던 거죠.”
“지유화 씨 때문에 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네요.”
날선 목소리가 멋대로 튀어나가고 말았다.
“유은영, 자네. 지금 유화가 좋게 봐준다고 기어오르는 건가?”
지유화 뒤로 물러나있던 나화진이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유은영’을 노려봤다.
그 시선에 지화자가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빌어먹을!’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말았다.
지화자가 황급히 지유화의 눈치를 살폈다.
지유화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하지만 지화자는 알았다.
지유화가 웃고 있는 건, ‘유은영’이란 사람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란 것을.
그녀는 지금 재고 있는 거다.
‘유은영’이란 사람을 여전히 제 편으로 만들지, 아님 그냥 죽여버릴지.
지유화가 후자를 선택하게 둬선 안 된다.
지화자가 황급히 고개 숙였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저는 단지 궁금해서.”
“아니에요, 유은영 씨.”
지유화가 다정하게 말했다.
“궁금해할 수도 있죠. 그리고 저는 의심 많은 사람 좋아해요.”
거짓말.
지화자는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어쨌거나 지유화는 전자를 선택한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후자를 선택했다가는 꼼짝없이 죽었을 테다.
지금, 이 자리에서든.
아님, 머지 않은 훗날에서든.
그때, 지유화가 ‘유은영’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우리 이야기를 계속 해볼까요?”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지유화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눈 앞의 여자가 참 신기했다. 동생이 곁에 두고 있다고 해서 가지고 놀아볼까 했더니만.
‘신기하네.’
보면 볼수록 동생을 닮은 모습에 그 생각을 고이 집어넣었다.
대신 그녀는 겁먹은 얼굴로 또박또박 제 할 말을 다하고 있는 별 볼 일 없는 힐러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감히 제 자리를 빼앗아가버린 사랑하는 동생을 완벽하게 무너뜨릴 작정으로.
“먼저, 유은영 씨.”
지유화가 ‘유은영’의 앞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웃었다.
“제 손과 발이 되어주세요.”
‘유은영’이 표정을 굳혔다.
***
“나참, 도대체 어디로 간거야?”
유은영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기껏 지화자를 찾으러 나왔건만 어디에 있는 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전화도 안 받고.”
유은영이 부재중 전화가 잔뜩 떠있는 화면을 끄고는 구시렁거렸다.
“설마 옥상에 있나?”
한국 종합 병원에서 가보지 않은 건 옥상뿐이었다. 유은영이 안내도를 확인하고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지금 이 시간에 옥상문이 열려 있을까 걱정됐지만 일단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병원에서 나를 부른 이유가 따로 있더라고. 잠시 볼 일 좀 보고 올게.”
도대체 ‘유은영’에게 무슨 볼 일이 있어 그녀를 부른 걸까?
‘애초에 누가 부른 거지?’
유은영은 그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생각보다 보잘 것 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은영은 걱정됐다.
지화자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도움을 바란 적이 없으니.
자신에게 속마음을 꺼내본 적도 없는 그녀는 언제나 모든 일을 처리한 후에야 보고하듯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었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겠지.”
유은영이 구시렁거렸다.
곧 엘리베이터가 옥상에 도착했다. 유은영은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다리를 움직였다.
다행히 옥상문은 열려 있었다.
사실, 공중 정원이라 잠길 일도 없었다.
어쨌거나 유은영은 사방을 둘러보며 지화자를 찾았다.
“유은영 씨, 여기 계세요?”
들려오는 대답이 없다.
‘여기에도 없는 건가?’
유은영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유은영 씨?”
그녀는 지화자를 발견했다.
유은영이 활짝 웃으며 한달음에 그녀에게 달려갔다.
“유은영 씨! 있으면 대답 좀 하지! 제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요?!”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도 유은영은 지화자를 제 이름으로 불렀다.지화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반겼다.
“언니.”
“아, 네.”
유은영이 자리에 멈춰섰다.
왜인지 모르게 지화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화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지유화가 돌아왔어.”
지화자는 단 한 번도 유은영에게 도움을 바란 적 없다.
구한 적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그래, 지금까지는 그랬다.
허망하기 그지 없는 지화자의 목소리에 유은영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