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으윽…….”
유은영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들 괜찮으세요?”
“덕분에.”
그녀의 가까이에서 지화자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면과 부딪치기 전, 유은영이 봉을 휘둘러 바람을 일으킨 덕분에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다행힌 일이었다.
“그런데 유승민 씨는.”
“저기 있어요.”
유은영이 가리킨 곳에 넋이 나간 채로 쓰러져있는 유승민이 보였다.
“저 인간 왜 저래?”
“고소 공포증 있거든요. 아마 떨어질 때 기절했나봐요.”
“아하.”
“그보다 저희만 떨어진 것 같죠?”
“그런 것 같네.”
지화자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고는 물었다.
“언니, 나나 유승민 씨 데리고 위로 올라갈 수 있겠어?”
“글쎄요.”
지화자의 신체 능력치라면 가능한 일로 보였다.
“한번 해볼까요?”
“아니.”
그렇게 말한 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유승민이었다.
“하지마, 은영아.”
“뭐라도 봤나보네?”
“응.”
유승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가면 안 돼.”
“왜?”
“너나 지화자 씨, 둘 중 한 명은 죽을 테니까.”
유은영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겠지.”
지화자가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유승민 씨, 눈 좋잖아.”
“칭찬 고마워요.”
“고마워하실 것 까지야.”
지화자가 유승민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게 유승민의 심기를 자극했다.
험악해지려는 분위기에 유은영이 다급히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위는 안전하겠죠?”
“그거야 나도 모르지.”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그녀가 어떻게 알겠는가?
유은영이 유승민을 불렀다.
“오빠.”
“안전해.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다들 하하호호 사이가 좋아 보이는데?”
그러니까 안심하라며 유승민이 말했다. 그 말에 지화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요?”
자신들을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화자의 의문에 유승민이 대답했다.
“보이는 건 그렇습니다. 다들 웃고 있어요.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요.”
“흐음.”
지화자가 아래 턱을 쓸었다. 그때 유은영이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위쪽에 있는 사람들이 게이트를 공략하는 걸 기다려야하나?
유은영이 미간을 좁히는데 지화자가 말했다.
“저기 길이 있는데?”
그 말대로 길이 나있었다.
“가봐야겠죠?”
“응, 그래야 몬스터를 만날 테니까.”
“굳이 만나야하나요?”
유은영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그에 지화자가 대답했다.
“만나야 해. 그러려고 언니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니까.”
역시, 목적이 있었구나!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몬스터이길래 저를 순천까지 데리고 오신 거예요?”
“정신계에 특화되어 있는 몬스터라고 했잖아? 구체적으로 어떤 녀석들인지는 몰라.”
그보다 어서 가자면서 지화자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지화자 씨!”
유은영이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저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부모님이 주신 귀한 몸이 더 이상 상처입지 않았으면 했다.
그들을 물끄러미 보던 유승민이 울상을 지었다.
“은영아, 오빠는 걱정 안 해주니?”
유은영은 무시했다.
***
길은 어둡고 또한 험했다.
유은영이 무기를 가지고서 빛을 만들어내지 않았더라면 몇 번이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거다.
“지화자 씨 무기에는 정말 여러 기능이 있네요.”
유은영은 지화자의 말을 따라 봉에 빛을 만들어냈었다.
그녀의 감탄에 지화자가 말했다.
“내가 그 무기 만들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당연히 성능이 좋아야하지 않겠어?”
그건 그랬다.
“그보다 지화자 씨, 저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그건 유승민 씨가 아시겠지. 눈 좋은 유승민 씨가 어련히 알아서 잘 가르쳐주지 않겠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유승민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오빠, 알겠어?”
동생의 물음에 곧장 헤벌레하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 이곳으로 들어온 후부터 미래를 보는 게 힘드네.”
“그래?”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계속 가야겠지.”
이미 들어온 길이다.
다시 되돌아 나가기에는 꽤 멀리까지 온 것 같기도 하니.
‘별 일이야 있겠어?’
유은영은 속편하게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갈림길을 맞딱드리게 됐다. 빛이 환한 오른쪽 길과 어둡기 그지 없는 왼쪽 길.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유은영의 물음에 지화자가 그녀의 오빠를 쳐다봤다.
유승민이 멋쩍어하며 말했다.
“어디가 안전한지 잘 모르겠네.”
지화자가 짧게 혀를 차고는 손을 들었다.
“오른쪽 길이 어때?”
“저도 오른쪽 길이 좋을 것 같았어요! 안전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 나는 함정일 것 같은데.”
수년 간의 게이트 짬밥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지화자의 말에 유은영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함정이라고 하면?”
“몬스터.”
그러니까 몬스터가 많이 나올 것 같다는 소리였다.
그놈의 몬스터!
유은영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왼쪽 길로 갑시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왼쪽 길을 향해 움직였다.
지화자가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게이트에 들어왔으면 몬스터를 공략해야지.”
“게이트라고 꼭 몬스터를 공략해야 하나요? 당장 시나리오 게이트만 하더라도 몬스터 공략하는 일이 별로 없는데.”
“그거야 시나리오 게이트니까.”
어쨌거나 두 사람은 실랑이하며 왼쪽 길로 들어섰다.
“오빠, 뭐해? 안 와?”
“응? 아, 으응. 가야지. 갈게.”
유승민이 살짝 어두워진 표정으로 뒤늦게 두 사람을 따랐다.
조금 전 희미하게 보였던 미래 때문이었다.
‘뭐였지?’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었다. 그것이 지화자인지 유은영인지, 아님 자신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위에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일 수도 있다.
“오빠, 빨리 오라니까?”
“그냥 놔두고 가자.”
유승민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지화자 씨, 다 들립니다만?”
“아, 그래요? 죄송해라.”
지화자가 전혀 죄송하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유승민은 속으로 그녀를 한껏 욕하며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조금 전에 걸었던 길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험한 길인지라 유은영은 계속 봉에 불을 킨 채였다.
그 불빛에 의지하며 걷던 사람들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다그닥―!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 탓이다.
유은영이 경계 태세를 갖췄다.
지화자는 대몬스터용 격퇴총을 꺼내 들었다. 유승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1초가 1분 같이 흐를 때.
“뒤요!”
유은영이 버럭 소리 질렀다.
뒤쪽에서 갑자기 땅이 솟구쳤다.
지화자와 유승민이 가까스로 그것을 피했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이번에는 옆쪽에서 땅이 들이닥쳤다.
벽이 움직인 거다.
“커헉……!”
지화자는 피했지만 유승민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그대로 튕겨져 나가 반대쪽에 강하게 부딪쳤다.
“오빠!”
유은영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언니는 앞쪽이나 신경 써! 유승민 씨는 내가 봐줄게!”
“부탁할게요!”
암만 오랑우탄이라고 해도 자신의 하나뿐인 오빠였다.
유은영은 이를 으득 갈았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구조의 게이트인 건지, 이 이상 농락당하는 건 사양이었다.
유은영이 봉을 들고서 있는 힘껏 휘둘렀다.
쿠구궁!
거세게 일어난 바람에 움직이고 있던 땅 곳곳이 파였다. 하지만 신경써야할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유은영이 무기를 꼭 쥐었다.
분명 몬스터일 게 뻔한, 저것들이 들이닥치는 걸 기다릴 텐가?
아님, 먼저 쳐들어갈 텐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유은영이 땅을 박찼다.
“언니!”
지화자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지만 유은영은 이미 사라진 뒤.
“성격도 급하지.”
지화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명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람이 참 많이 변했다 싶었다.
“윽… 지화자 씨…….”
“아, 정신이 들어요?”
지화자가 유승민에게 힐을 시전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갈비뼈에 금이 가신 것 같아요.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네요. 제가 할 줄 아는 건 여기서 상태가 악화 되는 걸 막는 것뿐이니가요.”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유승민이 지화자의 팔을 세게 쥐며 외쳤다.
“당장 은영이 쫓아가세요! 여기, B급 게이트 아닙니다!”
“네?”
지화자가 당황했다.
B급 게이트가 아니라니? 이곳은 B급 게이트였다.
‘지화자’에게 있어서는 별 거 아닐 B급 게이트.
그래, 그게 분명한데.
―국가 넘버, 82.
전남 순천시 비례골길 24에 생성된 게이트 공략 중입니다.
Type: 타임 브레이커.
Lank: S급.
Time Limit: 240분
현재 공략 진행 57분째입니다―
지화자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S급?”
분명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B급이었던 던전이다.
그런데 S급이라니?
지화자가 경황없는 얼굴로 유승민을 쳐다봤다.
“당장 가십시오!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요! 이대로는 둘 다 죽을 겁니다!”
“뭐라고요?”
“당신들 중 한 쪽이 죽으면, 다른 한 쪽도 죽는단 말입니다!”
유승민이 봤던 미래.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던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