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지하에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텅 빈 복도를 걸으며 지화자가 유은영에게 물었다.
“이은혜를 어떻게 도울 생각이야? 무턱대고 말한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죠.”
유은영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먼저 김정남 부장님께 자료를 요청하려고요.”
“무슨 자료?”
“이은혜 씨가 퇴사하기 한 달 전에 처리한 업무에 대한 자료랑 CCTV 자료요.”
“CCTV?”
“네.”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저희 사무실 안에도 CCTV가 설치되어 있잖아요.”
현장 파견 부서의 0팀뿐만이 아니라 다른 팀 모두가 그랬다.
그 말에 지화자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그렇기는 하지만 소리가 녹음되지 않잖아.”
“그래도요.”
유은영이 말했다.
“그저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아, CCTV 자료는 두 달 치를 요청해야겠네요.”
“굳이?”
“비교를 위해서에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그게 바로 습관이었다.
“퇴사하기 한 달 전, 이은혜 씨는 자신의 몸에 누군가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말했지.”
“그 사람이 과연 이은혜 씨와 똑같이 행동했을까요?”
그랬다면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했을 리가 없을 테였다.
“이은혜의 몸에 들어가 있던 누군가의 습관을 찾을 생각이구나?”
“네, 어떤 습관이든 그걸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그 사람을 추적하면 될 거예요.”
“흐음.”
지화자가 오른쪽 팔꿈치를 왼 손으로 받치며, 제 턱을 쓰다듬었다.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두 달치의 CCTV를 하나하나 확인해야하는 작업이었다.
“괜찮아요. 이은혜 씨가 야간 근무할 때의 시간만 보내 달라고 할 테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어마무시한 분량일 터.
“괜찮겠어?”
“네.”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지화자 씨도 도와주실 테니까 괜찮을 거예요.”
지화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유은영 씨, 점점 뻔뻔해지는 것 같네? 그보다 누가 도와준데?”
“그렇지만요.”
유은영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입을 열었다.
“지화자 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저는 계속 밤을 새겠죠. 몇날 며칠이고요. 그럼 이 몸은 자연스럽게 컨디션이 나빠지겠죠? 꼴도 엄청 피폐해질 거예요.”
지화자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금 내 몸을 가지고 협박하는 거야?”
“그렇게 보였다면 유감이고요.”
유은영이 헤실거렸다.
지화자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일주일.”
“네?”
“딱 일주일만 도와줄 거라고. 그 시간 동안 나오는 게 없으면 나는 빠질 거야. 그리고 언니도 빠져.”
지화자가 말을 이었다.
“이은혜의 재판은 빠르게 진행될 거야. 잘하면 일주일 안에 재판이 진행될 수 있지.”
그렇게 되면 끝이었다.
‘A-Index와 관련된 사안은 항소고 뭐고 없으니까.’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어쨌거나 지화자의 말에 유은영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정말 고마워요, 지화자 씨!”
“잘도 고맙다고 하네? 협박한 주제에.”
유은영이 멋쩍게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협박한다고 정말 들어주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보다 지화자 씨도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실 줄 아는 분이셨네요?”
“시끄러.”
지화자가 짜증스럽게 일갈하고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퇴근하려고요?”
“그럼, 오늘도 사무실에서 밤을 샐 작정이야?”
“아니요!”
유은영도 덩달아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류는 들고 가야겠죠?”
“그래야지.”
지화자가 말했다.
“가는 길에 김정남 부장한테도 들려야겠네.”
“CCTV 자료를 받으려면 어쩔 수 없죠.”
“그 전에 오늘 CCTV 자료를 받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왜요?”
“야간 근무 때의 자료만 따로 정리해달라고 요청해야할 거 아니야?”
“하지만 일주일밖에 시간이 없는데…….”
“그러니까 더더욱 부탁해야지.”
안 그러면 그 자료를 자신들이 정리하게 될 거라면서 지화자가 말을 덧붙였다.
“내일 아침까지 끝내서 보내 달라고 하면 돼.”
“그래도 되나요?”
“안 될 게 뭐가 있어?”
지화자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언니는 ‘지화자’라고?”
시스템 통제 부서와 기술 관리 부서에 있어서는 공포 그 자체의 이름.
그건 암만 부장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지화자의 말에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화자 씨! 저 열심히 해볼게요.”
“뭘 한다는 거야?”
“지화자 씨의 흉내요!”
유은영이 명랑하게 외쳤다.
어쨌든 간에 두 사람은 시스템 통제 부서의 김정남을 찾아갔고.
“네? CCTV 자료요?”
“그리고 이은혜 씨가 퇴사하기 한 달 전에 처리했던 업무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했다.
“많이는 필요 없고, 퇴사 직전의 한 달 동안 처리한 자료만 건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그건 왜.”
“알아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유은영이 김정남을 낮잡아 보듯 쳐다보면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모든 자료, 내일 오전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왕이면 제가 출근하기 전까지 정리를 완료해서 전달해주시면 감사하겠군요.”
김정남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금 막 퇴근하려던 그였다.
그런데 이렇게 일거리를 주다니!
“저기, 지화자 팀장님.”
“안 되겠습니까?”
“네? 그게, 그것이…….”
“안 된다면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김정남이 기다렸다는 듯 안 된다고 하려던 찰나.
“부장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죄송하지만 시스템 통제 부서의 인원 몇을 차출하겠습니다.”
날벼락과도 같은 말이 들려왔다.
김정남이 펄쩍 뛰었다.
“네? 그건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인력이 부족한 시스템 통제 부서였다.
그런데 사람을 뽑아가겠다니!
그 말에 ‘지화자’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럼, 내일 오전까지 넘겨주실 자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자, 잠깐만요! 지화자 팀장님!”
김정남이 애타는 심정으로 그녀를 불렀지만.
“가버렸군.”
‘지화자’는 ‘유은영’과 함께 사라진 뒤였다.
김정남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두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아악! 왜 다 끝난 일을 헤집으려는 거야!”
이은혜의 일이 미심쩍게 처리된 건 알았다.
하지만 우종문이 앞장서서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던가?
센터 내에서 가장 입김이 센 현장 파견 부서의 부장이 처리한 일이었다.
감히 그의 의견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는 말.
하지만 지화자가 누구인가?
센터를 넘어서 전국각지에 널리 알려진 개차반 인성의 소유자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김정남은 알았다.
오늘 중으로 퇴근하기는 글렀다는 것을.
***
“김정남 부장님께서 모르쇠로 나오시면 어떻게 하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유은영이 불안한 얼굴로 지화자에게 물었다.
지화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럼 시스템 통제 부서에 쳐들어가면 돼.”
“네?”
“나는 그랬어.”
유은영이 멍하니 두 눈을 끔벅였다. 지화자는 그녀를 흘긋 쳐다보고는 말했다.
“현장 파견 부서는 시스템 통제 부서랑 많이 부딪치거든. A-Index의 노후화가 진행되고 나서는 더더욱 부딪치고 있지.”
지금에야 그 빈도가 적지만, 두세 달에 한 번씩은 꼭 시스템 통제 부서를 찾아갔었다고 지화자가 말을 이었다.
“가서 뭐했는데요?”
“죽치고 앉아 있었지.”
지화자가 그때를 떠올리는 듯 픽 웃었다.
“서류고 뭐고 다 들고 가서 앉아 있었어.”
“가하성 씨랑 하태균 씨가 가만히 있었어요?”
“아니.”
지화자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나를 사무실로 데려가려고 난리였지.”
“그래서 사무실로 돌아갔었나요?”
“설마.”
지화자가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걔들 말을 들었을 인간으로 보여?”
“아니요.”
유은영이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내가 꼼짝도 안 하니까 우종문 부장을 데리고 온 거 있지? 내버려두면 알아서 돌아갔을 텐데, 하여튼 걱정이 많은 녀석들이었다니까?”
유은영은 생각했다.
‘가하성 씨랑 하태균 씨, 정말로 많이 고생을 하셨겠구나.’
라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는 지화자는 말했다.
“하여튼 걱정마.”
“네?”
“김정남 부장, 그동안 나한테 당한 게 있으니까 언니 부탁 꼭 들어 줄 거라고.”
“그렇겠죠?”
“응.”
집에 도착했다.
지화자가 능숙하게 주차를 하고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언니 부탁 쌩깐 것 같으면 내가 가서 지랄해줄게!”
“안 돼요! 지랄해도 지화자 씨의 몸으로 지랄해요!”
유은영이 다급하게 말렸다.
지화자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다가 휙 몸을 돌렸다. 유은영이 황급히 그녀의 옆에 따라 붙으며 재잘거렸다.
“이은혜 씨, 괜찮겠죠?”
“괜찮을 거야. 고문도 안 받고 있는데, 뭐.”
“당연히 안 받아야죠! 이은혜 씨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유은영이 빼액 소리 지르고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굶으면 어떻게 해요?”
“삼시 세끼 꼬박 나오니까 걱정하지 마셔. 그보다 언니 걱정이나 하지?”
지화자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눈웃음을 지었다.
“서류 마저 처리해야 하잖아.”
유은영이 그 말에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한편, 그 시각.
“김정남 부장, 퇴근 안 하고 뭐하고 있나?”
김정남에게 손님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