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유은영이 바라던 바는 이뤄지지 않았다.
서류를 모두 지화자에게 넘기고 이은혜를 찾으러 가겠다는 바람 말이다.
“시스템 통제 부서의 김정남 부장님께서 급하게 부탁하신 일이었는데.”
“그렇게 급한 일 아니잖아요.”
“A-Index를 인위적으로 조작해 게이트를 터지게 만든 유력한 범인인데.”
“범인이 아니라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죠.”
참고로 그런 사람은 용의자라고 부른다면서 지화자가 말했다.
유은영이 입술을 씰룩였다.
“어쨌든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용의자인데.”
“그래서요?”
그래서요는 무슨 그래서요야!
“혹시라도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그러면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잡으러 가야죠!”
“그렇기는 하지만요.”
지화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은혜 씨는 외국으로 도망칠 배짱이 안 돼요.”
“네?”
“그 사람 잘 아는 사람이거든요.”
“유은영 씨가요?!”
‘지화자’가 놀라 물었다.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에 지화자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가 센터에서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네.”
유은영이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사실 아니에요?”
부정할 수 없었다.
지화자가 이은혜와 잘 아는 사이이기는 했지만 그거야 그녀와 자주 부딪쳐서 그런 거였다.
권도혁 이전 이은혜.
그러니까 이은혜는 지화자에게 잘 갈궈지던 직원이었다.
크흠.
지화자가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어쨌든 이은혜 씨가 해외로 도망친다거나 그럴 가능성은 적으니 안심하도록 해요.”
그러니까 어서 서류나 처리하란 소리였다.
“하지만.”
“우는 소리할 시간에 어서 서류 보세요.”
유은영이 입술을 씰룩였다.
하지만 어쩌랴?
지화자가 저렇게 단호하게 나오는데 서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이은혜 씨를 잡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제가 책임질게요.”
심드렁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참 얄미웠다.
“그 말 꼭 지키세요.”
“네네, 지화자 팀장님은 어서 서류나 처리하도록 하세요. 야근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요.”
유은영이 두 뺨을 불퉁하게 부풀고는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지화자의 말대로 야근은 절대로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무실 안에 사각사각 펜 굴러가는 소리와 키보드 소리만 가득할 때.
“곧 퇴근 시간이네요.”
지화자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놀란 눈을 보였다.
“유은영아, 퇴근하게?”
“은영 누님이 웬일로 조기 퇴근을 다 한데요?”
“내일은 서쪽에서 해가 뜰 건가 봅니다!”
“아님 지구가 멸망하거나요.”
리아와 라이, 하태균과 가하성이 차례차례 말했다. 그 목소리들에 지화자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다들 저를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일 중독자.”
리아의 말 한 마디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화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 중독자라니!
지화자는 세상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서류를 보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사무실을 밤늦게까지 지키는 건 유은영 때문이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지화자’의 일을 처리하고 있는 그녀가 불쌍하기는 개뿔.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돼서 함께 일을 봐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간에 지화자는 말했다.
“퇴근할 생각 아니에요.”
“그럼요?”
유은영이 물었다.
지화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외근 나가려고요.”
“외근이요?”
유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근나갈 일이 있나요?”
“있잖아요, 팀장님.”
가하성이 말했다.
“저희가 담당했던 지역의 피해 복구가 얼마나 됐는지 확인해야 하잖아요.”
“아하.”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피해 복구 확인은 내일하러 갈 생각이에요.”
즉, 외근을 나가는 건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란 뜻.
그 말에 유은영이 놀라 물었다.
“그럼, 외근은 왜 나가는데요?”
“이은혜 씨 잡으러 가자고 하셨잖아요.”
“네?”
유은영이 멍하니 물었다.
지화자가 시계를 흘긋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에서 A-Index를 인위적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용의자라면서요?”
“그, 그렇기는 한데.”
“그럼 잡으러 가야죠.”
유은영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언제는 서류나 보라면서요?”
“그거야 오후에는 이은혜 씨를 찾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해가 지고 난 후에는 다르다면서 지화자가 말했다.
“어서 일어나세요. 이은혜 씨 찾고 나머지 서류 처리하셔야 하니까요.”
“나머지 서류라고 하면은?”
“팀장님 앞에 쌓여있는 것들요.”
지화자가 싱긋 웃었다.
“이은혜 씨 찾기만 할 거예요? 그대로 센터에 데리고 와야죠.”
그리고 나머지 서류를 처리하는 것.
“그게 오늘 중으로 팀장님이 끝내야 할 일이에요.”
유은영의 턱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럼, 팀장님과 함께 외근 다녀오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요!
유은영은 그렇게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잘 다녀오세요.”
“잘 다녀오십시오!”
자신을 보내버리는 팀원들의 인사에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유은영은 울지 못해 웃으며 지화자와 함께 사무실을 나오게 됐다.
그대로 차에 올라탄 그녀는 지화자에게 빼액 소리 질렀다.
“제가 말했을 때 진작 이은혜 씨 찾으러 갔으면 됐잖아요!”
“언니, 기억력이 혹시 금붕어야? 내가 말했잖아. 이은혜는 오후에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지화자가 차에 시동을 걸며 말을 이었다.
“시스템 통제 부서가 교대로 근무하는 거 알지? 이은혜는 야간 근무자였거든.”
그래서 오후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고 지화자는 말했다.
“퇴사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일 거야. 생활 패턴이 한 번 고정되면 바뀌는 게 힘들어서.”
“하지만 바뀌었을 수도 있잖아요. 퇴사한지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
부르릉!
지화자가 엑셀을 밟으며 유은영의 걱정에 대꾸했다.
“이은혜가 다른 곳으로 이직했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어.”
“그럼, 지금은 무직 상태겠네요?”
야간 근무자였던 그녀가 센터를 그만둔 후 지금까지 일을 쉬고 있다니.
“생활 패턴이 바뀌었을 가능성은 적겠네요.”
“정답.”
“그런데 이은혜 씨가 어디에 사는 줄 아세요?”
“아니? 모르는데?”
유은영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런데 가자고 한 거예요?”
“응.”
지화자가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 유은영을 쳐다봤다.
유은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은혜 씨랑 잘 알고 지내던 사이라면서요?”
“잘 알고 지내는 사이면 어디 사는지 다 알고 있어야 해?”
“그건 아니지만요.”
유은영이 우물쭈물거렸다.
“그리고 언니. 김정남 부장이 그랬다며? 이은혜랑 연락이 두절 됐다고. 아예 행방을 찾을 수가 없다고 그랬잖아?”
“네? 네,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은혜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소용이 없단 말이지.”
어차피 그녀는 사라졌으니.
“하지만 지화자 씨께서는 생각이 있으신 거겠죠?”
그러니까 이렇게 외근이란 이름으로 자신과 함께 밖에 나왔을 거다.
유은영의 물음에 지화자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사람 하나 찾는 건 나한테 일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는 지화자가 유은영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윽! 여기에서까지 서류를 봐야 해요?!”
유은영이 기겁했다.
“언니가 계속 보고 있던 서류랑은 다른 거야.”
그 말에 유은영은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서류를 읽어내려갔다.
“이건…….”
“이은혜에 대해 정리한 거야.”
“도대체 언제요?”
“언니가 서류를 열심히 처리하고 있을 동안에.”
지화자가 싱긋 웃었다.
“내 몫의 일은 진작 끝내 났거든.”
“그럼 저 좀 도와주지!”
지화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우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어쨌든 서류는 다 읽었지?”
“네.”
“그럼 찾아봐.”
“네?”
“찾아 보라고.”
유은영이 얼떨떨한 얼굴로 지화자에게 물었다.
“누구를요?”
“당연히 이은혜지.”
지화자가 빨간 신호에 차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
“내 힘을 운용해서 이은혜를 찾아 보도록 해.”
언니라면 할 수 있으니.
덧붙여 말하는 목소리에 유은영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지금까지 지화자의 힘은 모두 전투의 상황에서 사용했던 유은영이었다.
그런데 사람을 찾는데 그녀의 힘을 운용하게 되다니!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유은영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곧 그녀는 당혹감을 잠재우고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고는 지화자의 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라.
지화자가 자신의 힘을 이용해 이은혜를 찾아 보라고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다.
그래, 가령 예를 들면.
“잘 오셨습니다. 사람을 찾는다고 했죠? 그 사람의 이름, 특징, 생김새 등 모두 말해주시겠어요? 서류로 정리된 거라면 더더욱 좋고요.”
사람을 찾는 데에 특화되어 있는 힘을 직접 마주한 경험이 있다거나 그렇게 해서 말이다.
유은영이 꼭 감고 있던 두 눈을 슬쩍 떴다. 검은 눈에 붉은 빛이 감도는 찰나.
“윽……!”
유은영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갑작스럽게 머릿속으로 웬 지도가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언니?”
“찾았… 어요……!”
유은영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어요! 계속 전진하다가 다음 신호에서 오른쪽으로 도세요!”
신호가 떨어졌다.
지화자는 그대로 엑셀을 밟았고 다음 신호에서 유은영이 말한 대로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 다음 계속 직진!”
유은영의 말을 따라 차를 몰수록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왼쪽으로 도시고!”
왼쪽으로 도니 모텔촌이 나타났다. 유은영은 계속해서 직진하라고 지화자를 닦달했다.
“됐어요!”
곧 차가 멈췄다.
유은영이 후다닥 내렸다.
“여기야?”
“네!”
유은영의 우렁찬 대답에 지화자가 미간을 좁혔다.
이은혜는 지화자가 센터에 입사하기 전부터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퇴사할 때 퇴직금을 많이 챙겨갔을 텐데.’
그런데 모텔이라니!
하지만 당황할 새는 없었다.
“팀장님! 같이 가요!”
유은영이 허름한 모텔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화자가 놓칠새라 그녀의 뒤를 쫓아 모텔 안으로 들어갔다.
“숙박입니까? 아님, 대실?”
카운터 직원이 묻는 목소리에 유은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여기 이은혜 씨 있죠? 어느 방에 있어요?”
“뭐, 뭡니까?”
카운터를 보고 있던 직원이 당황하며 ‘지화자’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유은영이 한껏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다 알고 왔으니까 좋게 말할 때 알려주는 게 좋을 거예요. 이은혜 씨,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정중한 말투였으나 안에 담긴 건 경고였다.
모텔 직원이 꿀꺽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