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 힐러가 랭킹 1위가 되어 버렸다-111화 (111/200)

제111화

15.이은혜

정신 없는 하루가 시작됐다.

1월 1일.

새해부터 게이트가 터진 탓에 일이 물 밀 듯이 들려온 탓이다.

하나를 처리하면 두 가지 업무가 들어오고 두 가지 업무를 처리하면 그 배로 또 새로운 일이 들어왔다.

‘죽겠다.’

유은영이 초췌한 낯으로 쌓인 서류를 쳐다봤다.

‘이걸 오늘 하루 안에 다 끝내야 한다고?’

장난하나?

유은영은 옆자리에 앉은 지화자를 흘긋거렸다.

“죽인다. 죽여버린다. A-Index 제대로 관리 못한 새끼들 내 손으로 꼭 죽여버린다.”

음산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은영은 못들은 척 무시하며 시계를 흘긋거렸다.

어느새 점심에 가까워진 시간.

지금쯤이면 라이와 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해야하건만.

‘뭐 하세요!’

두 사람은 팀원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답지않게 말이다.

유은영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혼자 점심을 먹으러 가는 건 싫었고, 그렇다고 앞장 서서 “우리 이제 점심 먹으러 갈까요!”라고 외치기에는 분위기가 좀 그랬다.

결국 유은영은 울며 겨자먹기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점심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즈음.

“팀장님, 점심 안 드실 겁니까?”

“먹어야죠!”

하태균의 물음에 유은영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팀장님은 앉아계세요.”

“네? 왜요?!”

“일 해야죠.”

지화자의 말에 자리에 도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지화자가 자신을 억지로 앉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화자가 겉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카페에서 가볍게 음료랑 디저트 사올게요.”

“디저트는 밥이 아닌데.”

유은영이 중얼거렸다. 지화자는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음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디저트는 에그 샌드위치로 사올게요.”

“네에.”

유은영은 목소리를 쭉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어쨌거나 모두가 그렇게 나가고.

“후우.”

그녀는 그대로 책상 위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점심도 없이 일을 한다고 할 지라도 꼼짝없이 야근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진짜 싫다.”

어떻게 새해부터 야근을 할 수가 있지?

유은영이 까드득 이를 갈 때.

“저기…….”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유은영이 고개를 들었다.

“아, 지화자 팀장님! 저 권도혁입니다.”

권도혁?

유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찾아온 남자를 알아봤다.

“아아! 권도혁 씨!”

그와는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저… 제가 너무 상냥하게 말했나요……?”

“네… 답지않게요…….”

“아, 죄송해요.”

지화자와 몸이 바뀐 그 당일에 말이다.

“죄송한 게 아니라 미안해.”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때 그가 ‘지화자’를 얼마나 이상하게 쳐다봤었는지 모른다.

아닌게 아니라 권도혁은 그 날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다.

어쨌거나.

“저희 팀에는 무슨 일이세요?”

“그게, 부장님께서 지화자 팀장님을 찾으셔서 말입니다. 자리에 정말 계실 줄은 몰랐는데…….”

“보다시피 일이 많아서요.”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권도혁은 꿀꺽 침을 삼켰다.

저 일이 자신들 때문이란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지금 시스템 통제 부서는 센터의 어디를 가도 죄인이었다. 기술 관리 부서 역시 마찬가지.

권도혁이 우물쭈물 말했다.

“죄송합니다.”

“권도혁 씨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그보다 가죠.”

“네?”

“시스템 통제 부서의 부장님께서 저를 찾으신다면서요?”

안 그래도 서류가 눈에 들어오지 않던 참이었다.

유은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넵!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지화자 팀장님!”

권도혁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 * *

[지화자 팀장님]: 잠시 시스템 토에 부서의 부장님 좀 만나 뵙고 올게요.

‘유은영’이 미간을 좁혔다.

“유은영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지화자 팀장님이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튀신거야?”

리아의 물음에 지화자가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

튀셨다가는 그날로 세상 하직할 텐데 말이다.

“그보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안 돼!”

리아가 빼액 소리 질렀다.

“태균 오빠 아직이야!”

그 말에 하태균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리아, 나는 괜찮아. 유은영 씨, 먼저 올라가셔도 됩니다.”

“그래요, 그럼.”

지화자가 고민도 않고 사무실로 향했다. 가하성이 그 뒷모습을 보고 짧게 혀를 찼다.

“좀 같이 가면 안 되나?”

“하하, 일이 바쁘니 저러시겠지.”

“그래도요.”

“하성아, 아침에 유은영 씨와 분위기 좋아 보이더니 또 왜 그래?”

그 말에 가하성이 기겁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형님?! 분위기 좋아 보였다니! 누가 누구랑요?!”

“그야, 너랑 유은영 씨 말이지.”

“아니거든요? 이상한 오해하지 마세요!”

라이가 희죽거렸다.

“하성 형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아야야!”

“시끄러, 라이.”

가하성이 라이의 귀를 쭉 잡아 당겼다.

“하성이 오빠! 우리 오빠 괴롭히지마!”

리아가 두 손을 번쩍 들고는 가하성을 때리기 시작했다. 가하성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라이를 놓아줬다.

“오, 이게 누구야?”

불청객이 찾아온 건 그때였다.

찾아온 불청객은 한 명이 아닌, 두 사람.

“리아, 라이! 안녕!”

“하성 씨랑 태균 씨도 안녕하세요?”

3팀과 4팀의 팀장인 신영웅과 신호걸이었다.

두 사람의 인사에 리아와 라이가 가하성과 하태균의 뒤로 숨었고, 가하성과 하태균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영웅호걸 팀장님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두 사람의 인사에 영웅호걸이 키득거렸다.

“그러게.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니까?”

“같은 층에 있는데도 왜 그렇게 얼굴 보기가 힘든지!”

“생각해보면 0팀은 항상 얼굴 보기가 힘들었지?”

“맞아. 누가 그 팀장에 그 팀원들 아니랄까봐. 점심이 아니면 안 나오니까 말이야.”

영웅호걸이 주거니받거니 하며 싱긋 웃었다.

“그보다 리아, 라이. 우리가 그렇게 싫어? 인사도 하지않고 하성 씨랑 태균 씨 뒤에 숨다니.”

신호걸의 말에 리아와 라이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거야 아저씨가 우리만 보면 한 번 싸워보자고 하니까 그렇지!”

“맞아요! 그러지 않으면 저희도 하성 형님이랑 태균 형님처럼 인사할 텐데!”

아이들의 성난 외침에 신호걸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신영웅도 키득거리며 말했다.

“하하! 우리의 진심어린 결투 신청을 그렇게 불편하게 받아들일 지는 몰랐는데? 그렇지, 호걸?”

“그러게나 말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두 눈 꼭 감고 한 번만 우리랑 싸워봐주면 안 될까?”

“싫어!”

“싫어요!”

리아와 라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러고는 가하성과 하태균의 옷자락을 꼭 잡는 것이.

‘우리 이제 그만 그자!’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가하성과 하태균은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영웅호걸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일이 바빠서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하! 오랜만에 인사 나눠서 좋았습니다, 팀장님들!”

영웅호걸이 두 사람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아, 가버렸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영웅.”

가하성과 하태균은 라이와 리아를 데리고 발빠르게 사라졌다.

사라진 0팀의 네 사람을 보며 신영웅과 신호걸이 아쉬워할 때였다.

“자네들 여기서 뭐하고 있나?”

“아, 부장님!”

“안녕하세요, 부장님.”

우종문이 두 사람에게 말을 걸어왔다.

영웅호걸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는 말했다.

“어제 일로 아침부터 서류 보느라 눈이 빠질 것 같아서요.”

“잠시 쉬러 나왔습니다.”

“부장님께서도 많이 힘드시죠?”

우종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나야, 뭐. 힘든 일은 자네들이 모두 하고 있으니 말이지.”

“그렇기는 하죠.”

신영웅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신호걸이 그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왜에.”

앙탈을 부리는 목소리에 신호걸이 쯧쯧 혀를 차고는 우종문에게 물었다.

“범인은 잡혔습니까?”

A-Index를 인위적으로 조작해 어제 일을 야기한 사람이 잡혔느냐는 질문이었다.

우종문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잡히지 않았네. 하지만 단서를 찾은 것 같기는 하더군.”

“그 단서, 어제 밤에도 찾은 것 같다고 떵떵 소리친 것 같은데 말이에요.”

신영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 보게나. 시스템 통제 부서의 부장이 지화자 팀장을 불렀다고 하니, 곧 뭔가 나오겠지.”

“오, 시스템 통제 부서의 부장님이 지화자 팀장을 불렀데요? 그럼, 정말 곧 범인이 밝혀진다거나 그러겠네요.”

신호걸이 유쾌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닌 거로 지화자 팀장을 불렀다면 아주 큰 일이 날테니까요.”

* * *

유은영은 지금 당황스러웠다.

시스템 관리 부서의 부장.

김정남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유은영에게 죄를 고하듯 지난밤 알아낸 것을 토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저와 기수철 부장님은 한 달 전 퇴사한 이은혜 양이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은혜는 잠적한 상태로 행방을 알 수 없다면서 김정남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화자 팀장님의 힘을 빌리고자 싶어 이렇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없어요!”

유은영이 다급히 손을 저었다.

김정남의 얼굴이 곧 죽을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갔기 때문이다.

‘지화자 씨는 도대체 시스템 통제 부서에서 어떤 존재인 거야?!’

지옥에서 올라온 사탄.

그게 바로 시스템 통제 부서에서 생각하는 지화자의 이미지였다.

그녀가 시스템 통제 부서에 왔다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김정남은 말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저, 그럼, 힘을 빌려주실 수 있을지…….”

유은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었다.

“어떻게 힘을 빌려주면 되나요? 이은혜 양을 찾아오면 되는 건가요?”

“물론 그래주신다면야 감사하지만, 그 행방을 찾아 주시기만 해도 감사합니다!”

찾아만 준다면 나머지는 자신들이 알아서 하겠다며 김정남이 굽실거렸다.

유은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우종문 부장님과 같은 부장직에 있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나한테 예의를 차리는 거지?’

그거야 지화자가 시스템 통제 부서를 여러 번 뒤엎어버린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유은영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그 이은혜 양에 대해 알려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어이, 도혁아! 은혜 자료 정리해놓은 거 있지? 그거 어서 지화자 팀장님께 가져다 드려라!”

“네, 부장님!”

권도혁이 날쌔게 자료를 챙겨서 유은영에게 건넸다. 자료를 받아든 유은영이 미간을 좁혔다.

이은혜.

시스템 통제 부서에 있다 한 달 전 돌연 센터를 그만뒀다는 그녀는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녀가 가장 유력한 범인.

A-Index를 인위적으로 조작한 건 이유가 뭐가 됐든 중제였다.

유은영이 자료를 챙기고는 입을 열었다.

“범인 특정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이은혜 양의 신변이 확보되는 순간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지화자 팀장님!”

김정남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유은영은 그대로 시스템 통제 부서를 나왔다.

긴장된 분위기가 역력한 곳에서 나와서 그런가? 절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에휴.”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권도혁에게 받은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흐음.”

지금 중요한 건 이 사람의 신변을 확보하는 거겠지?

유은영이 씨익 웃었다.

“앗싸, 서류 안 봐도 된다.”

남은 서류는 지화자 씨에게 다 넘겨야지!

유은영은 싱글벙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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