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무슨 일로 다시 온 거냐고 묻기도 전에 유은영과 지화자는 우종문의 손에 이끌려 센터를 벗어나게 됐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TV에 몇 번 나온 적이 있는 한식집이었다.
종업원은 그들을 가장 안쪽에 있는 룸으로 안내해줬다.
우종문이 가장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혼자 저녁을 먹기에는 좀 적적해서 말이네. 새해 아침이야, 뭐.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 혼자 먹었지마는.”
“그러셨군요…….”
유은영이 애매하게 웃으며 지화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게 괜히 센터에 나와서!’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유은영에게 소리 없이 말했다.
‘이렇게 된 거 부장한테서 맛있는 밥 얻어먹는다고 생각해.’
‘먹다가 체할 것 같은데요.’
도대체 어느 누가 꿀같은 공휴일에 상사와 정답게 밥먹는 걸 좋아한단 말인가!
적어도 유은영은 그것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이미 음식점에 들어왔고 자리에 앉기까지 했다. 싫어도 먹어야만 하는 상황.
유은영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부장님.”
“그래, 많이 들게.”
우종문이 사람 좋게 웃었다.
유은영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때였다.
‘누구지?’
유은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곧 그녀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맞다! 리아 씨랑 라이 씨!’
화면에 떠있는 이름은 라이였다.
하지만 들려올 목소리는 두 사람일 것이다.
아마 저녁이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아 전화를 건 것일 터.
유은영이 우종문에게 양해를 구했다.
“부장님, 죄송하지만 잠시 전화 좀 받고 와도 되겠습니까?”
“급한 전화인가 보군.”
“그게, 집에 애들만 두고 나왔거든요.”
“라이랑 리아 말인가? 그렇다면 어서 받고 오게. 그동안 나는 유은영 양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유은영이 고개를 꾸벅거리고는 룸을 나갔다. 그녀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라이 씨?”
―지화자야! 지금 어디야?!
“리아 씨.”
―배고픈데 왜 안 와!
―누님, 리아가 지금 당장 안 오면 집에 있는 식량을 다 거덜내겠데요! 물론 저도 같이 다 먹어버릴 거예요!
그러니까 어서 돌아오라면서 리아와 라이가 협박했다.
유은영은 절절맸다.
“죄송해서 어쩌죠? 일이 있어서 지금 못 돌아갈 것 같아요.”
그럼 우리 저녁은?!
배고픈데 어떻게 해요?!
“떡국 있죠?”
아니요, 없어요.
없다니?
유은영이 놀라 물었다.
“남은 게 있을 텐데요?”
―있었는데 저랑 리아가 다 먹었어요. 간식으로.
떡국을 간식으로 다 먹었다니.
‘성장기 아이들은 무섭구나!’
암만 성장기 아이들이라고 해도 그렇게 먹지 않는다는 것을 유은영은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유은영은 말했다.
“그럼, 배달시켜서 먹을래요?”
―아무거나 먹어도 돼?
“네, 먹고 싶은 거 다 시키세요. 카드 있죠?”
―현금만 있는데?
―누님한테 받은 용도만 있어요.
유은영이 미간을 좁혔다.
“제가 카드 만들어주지 않았던가요?”
―잃어버렸어요.
유은영이 이마를 짚었다.
“언제요!”
―좀 됐는데요?
유은영이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집어삼키고는 말했다.
“그럼, 진작 말했어야죠! 현금 얼마 있어요?”
―3만원!
―저는 5만원이요!
그러고보니 이번달 용돈 주는 걸 깜빡했다.
“그 돈으로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먹어요. 집에 가서 줄테니”
―정말? 알겠어!
―네, 누님!
리아와 라이가 유쾌하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유은영은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고는 걸음을 돌렸다.
그 시각.
‘망할 언니같으니라고! 도대체 전화를 얼마나 오랫동안 할 생각이야? 하루종일 할 생각인가?’
지화자는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으로 우종문을 보고 있었다.
그가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유은영 양에게는 여러모로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네.”
지화자는 우종문이 이유없는 칭찬따위 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저런 말을 내뱉은 이유가 있을 터.
그런데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지 않으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설마 언니의 등급을 확인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
애초에 우종문은 현장 파견 부서의 사람들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까 현장 파견 부서의 직원들의 정보를 따로 확인한다거나 그럴 일이 없다는 거였다.
그건 ‘유은영’에게도 마찬가지일 터.
‘그런데 왜.’
지화자가 표정을 굳히며 우종문을 쳐다봤다. 우종문이 그 시선에 싱긋 웃었다.
“차가 식겠군. 어서 들게.”
“…네.”
마지못해 그녀가 찻잔을 들 때.
“지 팀장이 많이 늦는군.”
우종문이 말을 걸어왔다.
지화자가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대답했다.
“리아랑 라이가 지화자 팀장님을 많이 좋아하거든요.”
“다행이군.”
그 후 이어진 건 정적이었다.
지화자는 우종문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우종문의 속이야 모를 때가 많기는 했지만 오늘 만큼 신경이 쓰인 건 처음이었다.
아마, ‘유은영’에게 한 말 때문일 거다.
‘말할거면 속 시원하게 말해주던가! 자기 혼자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고 끝내면 다냐고.’
유은영이 속으로 열심히 구시렁거릴 때였다.
“유은영 양.”
“네, 우종문 부장님.”
그가 다시금 말했다.
“유은영 양은 지 팀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지화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나한테 지화자를 물어보다니.’
코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우종문이 ‘유은영’의 안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유은영은 말했다.
“글쎄요,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0팀에 소속된 지 아직 반년도 안 됐으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지화자 팀장과 꽤 자주 어울러 다니는 것 같던데 말이야.”
“아무래도 돌발 게이트에 같이 휘말린 인연이 있으니까요.”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물론, 고작 그런 이유 때믄에 지화자 팀장님께서 저한테 잘 대해 줄리는 없겠지만요.”
“지 팀장한테 특별 취급 받고 있는 건 알고 있나 보군.”
“눈에 보이는 걸 무시하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그런 것 같군.”
우종문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마음에 들어.”
“영광입니다.”
지화자가 미소를 그려 보였다. 곧 입가가 일그러졌지만 말이다.
“사실, 지화자 팀장이 자네를 금방 치워버릴 거라고 생각했다네.”
지화자는 조용히 우종문의 말에 귀를 기울었다.
우종문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F급 힐러가 팀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러나? 일처리가 시원시원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F급.”
게이트 공략이 주요 업무인 현장 파견 부서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지 팀장이 심경에 변화라도 생긴 줄 알았지. 뭐, 그래봤자 잠깐 유흥을 즐기는 거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아니었다.
“왜인가 궁금했지.”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지화자는 두 눈에 경계심을 품은 채 우종문을 쳐다봤다.
우종문이 그녀의 눈빛에 담겨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래서 자네에 대해 여러 가지를 조사해봤지.”
능구렁이 같은 인간.
지화자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겨우 펴며 물었다.
“그래서 뭔가 알아내셨습니까?”
“물론.”
우종문이 입을 열었다.
“더 완즈 인 더 서울의 피해자더군. 10년 가까이 식물인간으로 병상에 누워있다가 작년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차렸고.”
“네, 그 사고로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죠.”
“부친도 잃었고 말이지.”
지화자가 입을 다물었다.
우종문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그냥 자네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나열하고 있는 것 뿐이니 불쾌하게 여기지는 말아줬으면 하는군.”
“물론이죠.”
지화자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싱긋 웃었다. 하지만 웃는 낯과는 다르게 그녀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빌어먹을 부장 새끼.’
알아낸 게 있으면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본론을 꺼내란 말이다!
다행히도 우종문은 곧 지화자가 원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유은영 양은 F급이었지. 맞지 않나?”
“네, 맞습니다.”
“그런데 왜 A-Index 상에 기록되어 있는 등급이 D급으로 뜨고 있는 거지?”
지화자가 묻는 말에 속으로 욕을 짓씹고는 입을 열었다.
“저도 모릅니다.”
“모른다고?”
“네.”
지화자는 불안감이 스몰스몰 올라올 때부터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했다.
어쩌면 우종문이 느닷없이 자신에게.
그러니까 ‘유은영’에게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느니 뭐니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예상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지화자는 말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오류인 줄 알았습니다. 각성자의 등급이 잘못 표시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아니더군요.”
지화자가 담담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제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사람들의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힐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죠.”
그런데 아니었다면서 지화자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의 상처가 치료되더군요. 그때가 돼서야 제가 정말 D급 각성자로 등급이 변경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는?”
“그편이 좋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참고로 지화자 팀장님께서도 모르는 일입니다.”
“흐음.”
우종문이라면 속아 넘어갈 거다.
왜냐하면 지화자 역시 우종문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장 파견 부서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
그게 바로 지화자였다.
곧 우종문이 말했다.
“지화자 팀장은 정말 그 사실을 모르고 있나?”
“네, 팀장님께서 게이트를 공략한 후에 나오는 정보를 자세하게 확인하신다면 진작 알아차렸겠지만 말입니다.”
“그것도 그렇군.”
우종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 다른 것을 물었다.
“등급이 바뀐 이유는?”
“모릅니다.”
“모른다?”
“네, 부장님.”
지화자가 다 식어버린 찻잔을 손에 쥐며 말했다.
“애초에 이유를 알았으면 D급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든 더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고자 발버둥쳤겠죠.”
“하긴, 그렇겠지.”
우종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유은영 양.”
“네, 부장님.”
“앞으로 지 팀장의 곁을 잘 지켜주게나.”
D급 각성자, 그것도 힐러인 자신이 ‘지화자’의 곁을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
누군가 들었다면 콧방귀를 꼈을 말이었지만 지화자는 우종문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F급에서 D급으로 등급이 오르지 않았나?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더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도록 노력을 하도록 해라.
그것도 안 되면.
‘훗날 지화자한테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 목숨을 희생해라.’
자신은 센터에서 가장 소중한 도구니까.
지화자는 새삼스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종문이 유은영의 성언에 대해 알지 못해서, 그 힘이 가진 위력을 모르고 있어서 말이다.
알았다면 끔찍했을 거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전화가 길어져서…….”
우종문은 ‘유은영’을 어떻게든 S급으로 만들어 ‘지화자’가 어떤 상처를 입어도 계속해서 싸우도록 만들었을 테니.
그런 건.
“괜찮네, 지 팀장.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앉기나 하게.”
“네, 부장님.”
절대로 바라지 않는 지화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