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12. 해피 뉴 이어
1월 1일.
평화로운 새해 아침.
예정된 게이트 따위 없는 평화로운 공휴일.
“흐아암.”
유은영이 길게 하품하며 일어났다. 어제 하루는 정말 힘들었지만 그만큼 즐거웠다.
“지화자 씨랑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어.”
그렇지만 술을 마시고 떠들었기 때문인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
“지화자 씨랑 술 마시고 있는데 서도운 씨가 찾아왔었지.”
서이안과 같은 본관인 같은 본관의 이천 서씨의 스콜피언 루키.
지금은 당당히 스콜피언의 돌격 1팀의 팀장을 맡고있는 그는 서도운을 찾으러 와서는 유은영과 지화자에게 사과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화자 팀장님. 그리고 유은영 씨. 저희 길드장님께서 못 볼 꼴을 보였군요.”
“아니에요, 서도운 씨! 그보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간 지방을 돌며 게이트를 공략하러 다녀서 말입니다.”
랭킹을 올리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어쨌든 간에 서도운은 유은영에게 말했었다.
“서울은 A급 이상이 아닌 이상 공략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하긴, 서울은 구역별로 저희 센터가 담당하고 있으니까요. 그보다 서도운 씨. 서이안, 저 녀석. 왜 여기 혼자 있던 거예요?”
여자한테라도 차인 거냐고 묻는 말에 서도운은 말했었다.
“아마 저 때문인 것 같군요.”
“서이안 씨 때문에요?”
“네.”
서도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실, 길드장님께서 오늘 같이 밤새 달리자고 했거든요.”
“오, 그런데 서도운 씨께서 거절하셨나 보네요?”
“네.”
여자 친구와 시간을 보내기로 미리 약속을 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여자 친구라니!
유은영은 놀랐지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화자도 마찬가지.
그야, 이런 날에는 동성 친구와 노는 것보다는 이성 친구와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고 신나지 않겠는가?
더욱이 서도운은 혈기 왕성할 2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그것도 꽤 잘생긴 축에 속하는.
스물아홉, 아니.
이제 서른이 된 상사와 노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더 낫기도 했고.
“나라도 그랬을 거야.”
어쨌거나 서도운은 서이안을 짐짝처럼 들고 사라졌고 유은영은 지화자와 이른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
“지화자 씨, 일어나셨으려나?”
창밖을 보니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유은영이 두 눈을 비비고는 문을 열었다.
“오? 일찍 일어나셨네요?”
“나도 늦잠자고 싶었어.”
지화자가 피곤한 낯으로 말했다. 유은영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하고 있어요?”
“점심 만들고 있잖아.”
유은영은 지화자가 만들고 있는 음식을 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떡국?”
“새해니까.”
지화자가 심드렁하게 말하며 입을 열었다.
“마침 잘 일어났어. 라이랑 리아 좀 깨워. 저 녀석들, 오늘 하루종일 잘 생각인가봐.”
“피곤할 거예요. 저희 오는 거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그랬다.
라이와 리아는 타종 행사를 본 후 곧장 집으로 돌아왔지만 자지 않았다.
유은영과 지화자가 돌아오는 걸 기다린 거다.
“그래도 안 돼. 나중에 일어나서 밥 달라고 할 게 뻔한데. 그냥 지금 깨워.”
그렇게 말하는데 깨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유은영은 라이와 리아를 깨워 데리고 나왔다.
“우움, 더 잘래.”
“잘래요, 잘래. 아침 안 먹어도 돼요.”
“아침이 아니라 점심이야.”
지화자가 리아랑 라이를 억지로 앉혔다.
“지금 안 먹으면 저녁 때까지 굶어야해.”
“굶을게.”
“맞아요, 굶을게요.”
이 자식들이 기껏 떡국을 만들었더니!
지화자가 미간을 좁히며 초강수를 뒀다.
“까미랑 까망이도 같이 굶어야하는데 그럴 거야?”
그 말에 라이와 리아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까미가 왜 굶어야 하는데?!”
“맞아요! 까망이도 왜 굶어야 해요?”
지화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야, 까미랑 까망이는 산타 할아버지가 너희 착한 일 많이 했다고 준 선물이잖아.”
그런데 기껏 차린 음식을 안 먹겠다고 버티니 같이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지화자는 말을 이어나갔다.
“산타 할아버지가 그러래.”
유은영은 감탄했다.
‘어쩜, 거짓말을 저렇게 술술 할 수 있을까?’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어쨌거나 라이와 리아는 불퉁하게 자리에 앉아 떡국을 퍼먹기 시작했다.
“라이 씨, 리아 씨. 꼭꼭 씹어 드세요.”
“네에.”
“우웅.”
라이와 리아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때 지화자가 유은영의 앞에 그릇을 놓으며 말했다.
“팀장님도 어서 드세요.”
“네, 잘 먹겠습니다.”
유은영이 활짝 웃었다.
“떡국으로 해장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그러게 누가 그렇게 술을 마실래요? 어제 일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요?”
“조금요.”
유은영이 헤실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점심이 끝나자마자 사라졌다.
“어디에 가자고요?”
“센터요.”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유은영이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빼액 소리 질렀다.
“이 좋은 날에 센터는 왜 가요?!”
“가야할 이유가 있으니까 가죠.”
“그 이유가 뭔데요?”
“가서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지화자가 싱긋 웃었다.
“싫으면 말고요.”
유은영이 울상을 지었다.
“저를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이유여야 할 거예요.”
“걱정마세요.”
지화자가 미소를 그렸다.
“팀장님께서 궁금해하시던 것을 말해줄 생각이니까요.”
그녀가 보이는 웃음이, 유은영은 왜인지 모르게 소름끼쳤다.
***
유은영이 궁금해하던 것.
그건 바로 그녀의 등급에 관한 거였다.
F급에서 D급으로 변경된 등급.
지화자는 그에 관해 유은영에게 알려주고자 센터로 향한 것이었다.
유은영이 그 사실을 알자마자 벅벅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집에서 알려줘도 됐지 않아요? 왜 굳이 센터로 온 거예요?”
그것도 라이와 리아를 떼어놓고 말이다.
‘라이 씨와 리아 씨를 집에 두고 온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아이들은 자신도 데리고 가라면서 울고 불며 아주 난리였었다.
유은영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라이랑 리아 녀석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나를 죽이려고 들었을 테니까. 방해도 할 테고.”
“네?”
저게 무슨 소리지?
유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이었다.
쫘악!
지화자가 냅다 그녀의 뺨을 때려버렸다. 유은영이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빼액 소리 질렀다.
“지화자 씨! 이거 지화자 씨 몸이거든요?!”
갑자기 뺨을 맞아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유은영의 말에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
그러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그 안에 들어가 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언제는 자기 몸 소중하게 대하지 않으면 죽여버린다고 협박했었으면서!”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날조도 적당히 해, 언니. 그리고 원래 사람 마음은 갈대 같은 거야.”
말이나 못하면!
유은영이 씩씩거리면서 물었다.
“제 뺨은 왜 때린 거예요?!”
“네 등급이 올라간 이유, 궁금하지 않아?”
당연히 궁금했다.
“…설마, 뺨을 때리는 거랑 관련이 있어요?”
“아니.”
유은영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럼, 나는 왜 난데없이 싸대기를 맞은 거지?’
마음 같아서는 유은영도 지화자의 뺨을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저 몸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유은영은 지화자의 뺨을 때리는 대신 씩씩거렸다.
“그래도 뺨을 때린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정답.”
지화자가 제법이라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부여받은 성언이 뭔지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죠!”
상처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게 바로 유은영이 부여받은 성언이었다.
유은영의 말에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는 솔직히 힐러가 왜 그런 성언을 부여받은 건지 궁금했거든? 이게 바로 이유더라고.”
“뺨 때리는 게요? 뭐, 손맛이 찰질수록 제 능력치가 올라가기라도 하나요?”
“비슷해.”
비슷하다고? 그냥 내뱉은 말이었는데?
유은영이 당황하여 지화자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지화자가 설명해줬다.
“남을 상처입힐수록 능력치가 크게 성장해. 그게 언니가 부여받은 성언의 힘이야.”
“그런……!”
“놀랍지? 부여받은 성언에 이런 힘이 있다니 말이야.”
놀라운 것보다는 불편한 마음이 더 컸다. 누군가를 해침으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이라니.
“꺼림칙해요.”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 어쨌든, 이렇게 된 거. 언니가 내 샌드백이 좀 되어줘야겠어.”
“네?”
“성장했다고 해도 D급이야. 폐급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라고. 설마, 여기서 만족할 생각이야?”
지화자가 유은영을 굳이 센터로 데리고 온 이유.
그건, 유은영이 가진 힘을 극한으로 키우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언니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잘하면 S급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S급 힐러.
듣기만 해도 달콤한 말이었다.
하지만.
“…저는 남을 상처입히면서 성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겠지. 언니는 상냥하니까.”
유은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지화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원래의 몸을 영구적으로 되찾기 전까지, 나는 언니의 힘을 마음껏 사용할거야.”
지금 유은영의 몸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바로 지화자였으니까.
“싫으면 필사적으로 거부하도록 해. 나는 오늘 하루, 진심을 다해 언니를 상대할 생각이니까.”
“싸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안 되겠지.”
철컥, 지화자가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총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언니한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잖아?”
총구가 ‘지화자’의 머리로 향했다.
“유은영 씨는 사람을 죽이지 못해. 아니, 애초에 사람을 상처입히는 걸 두려워해.”
그렇지만 지화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상처입히는데도, 그리고 죽이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유은영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있을 때.
타앙―!
총성이 경쾌하게 체력 단련실을 울렸다.
유은영이 어깨를 부여잡았다.
탄창이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내가 총구를 돌리지 않았으면 언니는 조금 전에 죽었어.”
유은영은 알았다.
지화자가 자신을, 아니. 그녀의 몸을 죽일 생각 따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랬다가는 지화자 씨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지만 유은영은 또한 알았다.
지화자는 ‘지화자’의 몸에 상처 입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음에는 다리를 노릴 거야.”
그 말대로 총구가 유은영의 다리 쪽으로 향했다.
지화자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병가 내고 쉬고 싶은 게 아니라면 도망쳐봐. 아님, 진심을 다해 나를 상대하거나. 참고로 이 총, 대헌터용으로 개발된 거라서 맞으면 많이 아플 거야.”
어쩐지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간 것뿐인데 왜 이렇게 아픈 건가 했다.
“…봐주지 않을 거예요.”
“부디 그래줘.”
유은영이 자신의 몸을 상처 입힐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까드득, 유은영이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새해 첫날부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10년지기 친구라도 된 것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