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 힐러가 랭킹 1위가 되어 버렸다-99화 (99/200)

제99화

‘잘못 들은 거겠지?’

지화자는 생각했다.

‘언니가 잘못 말한 거겠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유은영이 잘못 말한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파일이 모두 날아가버렸다는, 그런 헛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죠……?”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 들은 것도, 유은영이 잘못 말한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어디 한번 봐봐요.”

지화자가 황급히 유은영의 모니터를 확인했다. 그녀는 유은영이 그랬던 것처럼 마우스를 여러 번 달칵거리고는 비명을 질렀다.

“팀장님! 도대체 뭘 건드린 거예요?!”

“아무것도 안 건드렸어요! 저장 눌렀을 뿐인데……!”

그런데 파일에 렉이 걸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꺼져버렸다.

“어,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기는요!”

지화자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자료는 이메일에 남아 있을 거고, 파일은 절반 정도 저장되어 있네요.”

“그러니까 그 말은.”

“다시 해야죠. 오늘 밤을 새서라도.”

지화자가 투덜거렸다.

“절반이라도 파일이 저장되어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나참, 틈이 날 때마다 저장해야할 거 아니에요?”

“당연히 자동 저장이 알아서 되고 있을 줄 알았죠.”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안으로 퇴근할 수는 있을까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지화자가 픽 웃고는.

“당연히 안 되죠.”

상큼하게 말했다.

유은영이 불퉁하게 물었다.

“좀! 말이라도 좋게 해주면 안 돼요?”

“뭘 잘 했다고 제가 말을 좋게 해줘요?”

되묻는 말에 유은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화자의 말대로 잘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결국 유은영은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파일이 절반이라도 남아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자.’

그게 아니었다면 하루 날밤을 꼬박 새워야했을 거다.

“제가 드렸던 몬스터들 자료 있죠? 올해 A-Index에 새로 등록된 녀석들 자료요.”

“네, 그건 왜요?”

“그 부분은 제가 작업할게요.”

“유은영 씨……!”

지화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팀장님 좋으라고 도와주는 거 아니에요. 마음 같아서는 팀장님 버리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유은영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지화자를 쳐다봤다. 지화자가 질색하며 입을 열었다.

“제발.”

“네! 이런 표정 짓지 않을게요!”

유은영이 지화자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제 실수로 일어난 일도 아니잖아요? 이건 다 컴퓨터가 일으킨 문제라고요! 컴퓨터가 잘못한 일이에요!”

“알겠으니까 빨리 작업이나 마저 하세요. 라이랑 리아, 계속 저렇게 재워둘 거예요?”

“아.”

잊고 있었다.

라이와 리아는 사무실 내 소파에 누워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지화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에 굴러다니고 있던 담요를 아이들 위에 덮어주었다.

“참 신기해요.”

“라이랑 리아가 자고 있는 게요?”

“아니요.”

유은영이 작게 웃었다.

라이와 리아가 자는 거야 함께 일을 하면서 몇 번이고 봤었다.

“지화자 씨가요.”

지화자가 멈칫하고는 유은영을 쳐다봤다. 유은영은 지화자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라이 씨랑 리아 씨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잘 챙겨준단 말이에요.”

“싫어한 적 없어. 귀찮은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지화자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는 말했다.

“그보다 암만 애들이 잔다고 해도 말조심 좀 하지 그래?”

“그러는 지화자 씨도 편하게 말하고 있으면서?”

“언니가 먼저 그렇게 나왔으니까 이러지.”

지화자가 태연하게 대꾸하고는 말했다.

“어서 작업이나 끝내자.”

“이대로 퇴근 못하면 어떻게 하죠?”

“말이 씨가 된다는 소리 몰라? 불길하게 그런 소리하지 말고 빨리 시작해.”

“네에.”

유은영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번 작업했던 일이라 그런가?

유은영은 수월하게 업무를 처리해나갔다.

그 사이에 지화자는 자신이 맡기로 한 일을 끝냈다.

“벌써요?”

“언니가 느린 거야. 그보다 밖을 좀 봐봐.”

“밖은 왜요?”

유은영이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밖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해가 뜨고 있는 거죠?”

“날이 밝았으니까.”

유은영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파일을 다시 복구시키는 것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유은영은 꼬박 밤을 새고 만 것이다.

“왜……?”

내가 이렇게 집중력이 강한 사람이었던가?

‘아닌데?’

간호 관리 부서에서 모든 일을 떠맡아 반강제적으로 야근을 하게 됐을 때도 이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유은영이 파르르 떨다 책상 위에 얼굴을 묻었다.

“흐어엉! 억울해! 직장에서 날밤을 새게 되다니! 한 해의 마지막날을 이렇게 맞게 되다니!”

“그러게 누가 파일을 날리래? 꼴사납게 궁상 떨고 있을 시간에 어서 씻고 오기나 해.”

유은영이 훌쩍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이라면, 파일의 복구가 거의 끝났다는 점.

그것 하나뿐이었다.

***

“지화자 팀장님? 유은영 씨?”

아침 일찍 출근한 가하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 다 여기서 밤을 새신 거예요?”

“라이 씨랑 리아 씨도 함께요.”

가하성이 소파에서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아이들을 쳐다봤다.

“아니, 도대체 왜…….”

“퇴근하려고 했는데, 지화자 팀장님이 그만 파일을 날려버렸지 뭐에요?”

그 덕분에 사무실에서 밤을 새고 말았다면서 지화자가 말했다.

“뭐, 밤 새도록 키보드 두드려서 파일 복구는 거의 끝냈지만요.”

“하하…….”

유은영이 힘없이 웃었다.

“가하성 씨, 죄송하지만 라이 씨랑 리아 씨 좀 깨워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유은영 씨랑 아침 좀 사고 올 거라서요.”

“네? 아, 네.”

가하성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침은 저한테 부탁하지 그러셨어요? 오는 길에 사왔을 텐데.”

“어떻게 그래요?”

간호 관리 부서에 있을 당시, 이혜나의 아침 심부름도 곧잘 했던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 여기서 먹을 거라. 아, 가하성 씨 것도 하나 사올까요?”

“괜찮아요. 집에서 아침 먹었거든요.”

“그럼 커피?”

“사주시면 감사하죠.”

그 말에 유은영이 말했다.

“그럼 오는 길에 같이 사올게요. 유은영 씨, 가요.”

“네.”

지화자가 작게 하품하며 유은영과 함께 사무실을 나갔다.

사이좋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곤해 죽겠어요.”

“나도.”

지화자가 유은영의 말에 뒷목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퇴근도 못하고 센터에서 밤샜네.”

“저는 처음이에요.”

“그렇겠지.”

유은영이 길게 하품하며 물었다.

“지화자 씨, 오늘 오후에 반차내지 않을래요?”

“파일 복구 아직 안 끝난 거 알지? 그리고 오늘 회의 있을 거야.”

“무슨 회의요?”

“총회의.”

지화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원래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모든 부서의 각 팀장이 보여서 회의를 진행해.”

“굳이요?

“응. 올 한해 각 팀에서 무슨 이슈가 있었는지, 뭐 그런 것들을 서로 공유해야한다나 뭐라나.”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당연히 처음 듣겠지. 지금 말해주고 있으니까.”

“그런……!”

유은영이 앓는 소리를 냈다.

“지화자 씨께서 대신 가주면 안 돼요?”

“응, 안 돼.”

지화자가 단호하게 대답해주고는 말했다.

“걱정마. 별 일 아니니까. 그냥 우종문한테 보고하는 것처럼 말하면 돼.”

“말이야 쉽죠.”

우종문, 단 한 사람에게만 보고를 올리는 것과 다수의 사람에게 보고를 올리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질문이나 그런 것도 받나요?”

띵! 엘리베이터가 멈춰섰다.

목적지인 로비에 도착한 거다. 지화자가 먼저 내리며 말했다.

“네, 가끔 질문이 들어오기도 하죠.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하세요.”

“어떻게요?”

지화자가 묻는 말에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참고 자료를 봐달라고요.”

그러면서 지화자는 말했다.

“회의실에 가면 모든 팀이 낸 자료를 받게 될 거예요. 그거 읽으라고 하세요. 자료를 괜히 주는 줄 아나?”

아무래도 지화자는 그 말을 직접 내뱉은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유은영은 우울해했다.

회의가 아침에 잡혀 있다면 오후 반차라도 낼 텐데, 하필이면 오후.그것도 오후 5시, 퇴근 1시간 전에 회의가 잡혀버렸기 때문이다.

‘피곤해 죽겠다.’

유은영이 시계만 계속 봤다.

파일은 진작 복구해서 우종문에게 제출한 상태.

“지화자 팀장님, 슬슬 회의하러 가셔야죠.”

“아… 네…….”

유은영이 흐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최대한 빠르게 회의를 끝낸다!’

라고 다짐하면서 그녀는 회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은영은 자신이 헛꿈을 꿨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장 파견 부서는 기술 관리 부서를 잡아 먹었고 기술 관리 부서는 현장 파견 부서에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 신경전은 부장들끼리도 이어져 유은영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시계를 흘긋 거리니 어느새 시간은 오후 7시 30분.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 버렸다.

회의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유은영은 9시를 넘겨서야 회의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 퇴사하고 싶다.”

퇴사하기 전에 현장 파견 부서든 기술 관리 부서든 모든 부서를 엎어버리고 싶었다.

3팀과 4팀의 신영웅과 신호걸이 마지막 밤을 팀장들끼리 불태우자면서 유은영을 붙잡았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유은영은 지금 그 누구보다도 퇴근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무실로 돌아간 유은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화자 씨! 라이 씨랑 리아 씨는 어쩌고 혼자 있어요?”

“라이랑 리아는 하태균이랑 가하성과 같이 광화문 광장에 갔어.”

“광화문 광장에요? 왜요?”

“타종 행사 구경하러.”

“아.”

유은영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생각해보니 오늘 12월 31일이었죠?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네요.”

“그럴 수밖에.”

지화자가 픽 웃고는 말했다.

“수고했어. 회의는 어땠어? 재미있었지?”

재미있기는 무슨!

“끔찍했거든요?!”

지화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서 퇴근이나 하죠?”

“네.”

유은영이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하지만 지화자가 차를 몰고 간 곳은 안락하고 편안한 집이 아니었다.

“여기는 어디에요?”

“보다시피 술집.”

“술집인 건 아는데…….”

겉보기에도 꽤 화려한 것이 값이 꽤 많이 나갈 것 같았다. 유은영의 얼굴에 깃든 걱정에 지화자가 말했다.

“내가 살테니 어서 가자. 한 해의 마지막을 평범하게 보낼 생각이었던 건 아니겠지? 그리고 여기 그렇게 안 비싸.”

유은영이 입술을 씰룩였다.

“지화자 씨가 사준다고 해도 결국에는제 카드로 사는 거잖아요.”

“불만이면 언니가 내 카드로 또 사주던가?”

지화자가 능글맞게 웃고는 차에서 내렸다. 유은영도 그녀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 모두 즐겁게 웃는 낯이었다.

하지만 유은영과 지화자의 웃는 얼굴은 오래가지 못했다.

“유은영 씨.”

“네, 팀장님.”

“저는 유은영 씨랑 단 둘이서 술을 마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그러게 말이에요.”

유은영과 지화자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