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유은영이 1팀과 협력하여 공략한 게이트에 관한 보고서 정리를 끝낸 건 30일의 아침이었다.
그녀는 보고서 정리를 끝내자마자 우종문에게 보고하러 갔다.
지화자 없이 그녀 혼자서 말이다.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지화자 팀장님.”
“아, 조수현 팀장님.”
유은영은 조수현과 함께 우종문을 찾아가게 됐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닙니다.”
조수현이 담담하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가시죠.”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다 뭔가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라 그녀는 조수현의 옆으로 움직였다.
조수현이 그런 유은영을 흘긋거렸다. 유은영은 그 시선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괜히 말했다.
“죄송해요. 보고서 작성이 많이 늦었죠?”
“괜찮습니다. 연말이지 않습니까? 다른 일로도 충분히 바쁘셨을 텐데 힘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에 유은영이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처리해야할 업무가 많기는 했다.
하지만 유은영은 계속 보고서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다음해를 맞이하고 나서야 보고서 작성을 끝냈을 것이다.
그럼, 연말에 처리해야할 업무는 어떻게 됐느냐고?
‘지화자 씨가 열심히 하고 있지.’
지화자 뿐만이 아니었다.
가하성과 하태균.
라이와 리아를 제외한 0팀의 모두가 유은영이 도맡아야 했던 업무를 처리 중이었다.
‘지화자 씨랑 하태균 씨라면 몰라도 가하성 씨까지 도와주실 줄은 몰랐는데.’
유은영은 우종문에게 보고를 올린 후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 팀원들을 위한 음료를 사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는 조수현과 함께 부장실에 도착했다.
“부장님, 조수현입니다. 지화자 팀장님과 함께 12월 24일에 공략했던 게이트에 관한 보고를 하러 왔습니다.”
“들어오게.”
조수현이 문을 열었다.
유은영은 그와 함께 부장실에 들어간 후 보고를 올렸다.
유은영이 할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중요한 이야기는 조수현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불꽃 독사자는 이름에 걸맞게 화염에 대한 저항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체내에는 독을 품고 있었고요.”
“사체를 얻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죄송합니다. 핵을 부수는 것이 급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됐네. 다음 기회에 얻으면 되니까. 수고했네. 두 사람 다 이만 나가보게.”
우종문이 싱긋 웃었다.
유은영은 조수현과 함께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걸음을 돌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아, 지화자 팀장은 잠시 남게.”
내 저럴 줄 알았지.
유은영이 찌푸려지려는 얼굴 근육에 힘을 주며 멈춰섰다.
“네, 우종문 부장님.”
그 사이에 조수현은 부장실을 나가버렸다. 우종문이 웃는 낯으로 유은영에게 말했다.
“0팀만 아직 연말 정산 자료를 보내지 않았더군.”
유은영이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내일 중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부장님.”
“당연히 그래야지.”
내일은 한 해의 마지막이었다.
“지화자 팀장, 여러모로 신경쓸 일이 많은 것을 알고 있네. 하지만 할 일은 해야지. 아닌가?”
“맞습니다.”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걱정해야지. 지화자 팀장은 우리 센터의 훌륭한 자원이지 않나?”
자원이라.
유은영은 그 말에 지화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우종문한테 가장 중요한 건 ‘평화’야. 그리고 나는 평화를 유지하는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지.”
그때는 지화자가 과민 반응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말로 분명해졌다.
우종문은 ‘지화자’를 가치있는 도구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유은영이 물끄러미 우종문을 노려보듯이 쳐다봤다. 우종문은 그 시선에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만 가보게. 내일 중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연말 정산 마무리해서 자료 올리도록 하고.”
“네.”
유은영이 우종문을 향해 허리를 크게 숙이고는 부장실을 나왔다.
“부장님이 뭐라십니까?”
아이, 깜짝이야.
유은영이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심장 부근을 부여잡았다.
“지화자 팀장님?”
“아, 네, 조수현 팀장님. 우종문 부장님과는 별 이야기 안 나눴습니다.”
“그런데 왜…….”
조수현이 말을 멈췄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황급히 말을 고치고는 걸음을 돌렸다.
“가보겠습니다. 보고서 작성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잠깐만요, 조수현 팀장님.”
유은영이 조수현을 멈춰세웠다.
조수현이 왜 말을 하다 말고 황급히 떠나려는 건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조수현 팀장님,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착각하지 마세요.”
“저는 지유화만큼이나 당신을 증오하고 싫어하니까. 제가 아무리 달라져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파충류샵에서의 일을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는 거겠지.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유은영이 애써 웃는 낯으로 조수현에게 말했다.
“저희 팀이 아직 연말 정산을 마무리하지 못했거든요. 우종문 부장님께 듣기로는 다른 팀들은 모두 끝냈다고 하던데, 맞나요?”
“네? 네, 맞습니다.”
현장 파견 부서의 모든 팀 중, 가장 먼저 연말 업무를 마무리한 1팀의 조수현이었다.
“그렇군요”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우종문 부장님과는 그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내일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연말 정산 마무리해서 자료 올리라고 하시더군요.”
“아…….”
조수현이 멍하니 유은영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유은영이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대답이 되셨나요?”
“네? 아, 네.”
조수현이 황급히 대답하고는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조수현 팀장님께서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 이런 인사는 하지 않으려나?그러니까 ‘지화자’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화자 씨였다면 조수현 팀장님의 기분 따위 전혀 생각하지 않으셨을걸?’
그녀라면 조수현이 말을 걸었어도 무시해버렸을 터.
유은영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사무실로 향했다.
물론, 그 전에 로비의 카페에 들려 팀원들이 좋아하는 음료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저 왔어요. 다들 음료 한 잔씩 마셔요.”
“우와아! 지화자, 최고!”
“누님 최고예요!”
빈둥거리면서 놀고 있던 리아와 라이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이들은 사이좋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쥐었다. 곧바로 빼앗겼지만 말이다.
“리아, 라이. 너희는 아직 커피 마시면 안 돼.”
“그래! 지금 커피 마시면 키 안 클걸?”
가하성과 하태균의 말에 리아와 라이가 벙 찐 얼굴을 보였다.
“정말이야, 지화자야?”
“정말이에요?”
유은영은 키득거렸다.
“네, 정말이에요.”
라이와 리아가 벌벌 떨었다.
“지화자야, 어떡하면 좋아? 나랑 오빠, 지화자 몰래 커피 많이 마셨었는데.”
“아메리카노 맛있어서 많이 마셨었는데 어떻게 해요? 저희 이제 키 안 커요? 여기서 멈춰버리는 거예요?”
유은영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안 돼!”
라이와 리아가 사이좋게 비명을 질렀다. 그때 지화자가 다가와서는 말했다.
“팀장님, 애들 놀리지 마세요. 가하성 씨랑 하태균 씨도 애들 적당히 놀리고요.”
유은영이 입술을 오므렸다.
지화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가하성과 하태균의 반응도 유은영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지화자는 신기하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을 무시하며 쿠키 프라페를 쥐었다.
“잘 마실게요, 팀장님.”
“네? 네! 맛있게 드셔요!”
지화자는 그대로 자리로 돌아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형님, 유은영 씨 오늘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평소보다 많이 유해지신 것 같다, 하성아.”
“그렇죠?”
유은영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울지 못해 웃었다.
‘저는 원래 유하거든요?!’
자신이 얼마나 순한데!
“팀장님? 일 안 하실 거예요?”
“네? 아, 해야죠.”
지화자의 말에 유은영이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가하성과 하태균은 그것을 보고 또 수군거렸다.
“많이 유해지신 것 같더라니, 또 아닌 것 같네.”
“그러게요.”
다 들려요!
유은영은 팀원들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업무를 시작했다.
0팀이 올 한 해 공략한 57개의 게이트는 모두 등급별로 나누어진 상태.
유은영은 등급별로 나누어진 것을 유형에 따라 또 나누었다.
차라리 보고서 작성이 재미날 정도로 지루한 일이었다.
“음……?”
그러던 중에 유은영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왜 그러세요?”
지화자가 물었다.
“유은영 씨, 올 한 해 저희팀이 공략한 게이트는 57개잖아요?”
“네.”
“그런데 기록되어 있는 숫자는 59개라고 되어 있는데요?”
“아아, 그거요?”
지화자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돌발 게이트에 휘말린 것도 포함시켰으니까요. 타임 브레이커 유형 하나, 시나리오 유형 하나.”
“아하.”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키보드 소리만 시끄러울 때, 라이와 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점심시간이에요!”
“맞아! 점심시간이야!”
그 말에 가하성이 기지개를 쭉 켰고 하태균은 웃으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라이, 리아. 너희 시계만 보고 있었어?”
“네!”
“응!”
대답 한번 잘한다 싶었다.
리아는 그대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고기 먹고 싶다!”
“점심부터 무슨 고기야?”
가하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그 질문에 리아가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리며 물었다.
“하성이 오빠, 점심시간에 고기 먹으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고기 먹으러 가자! 응? 지화자야!”
난데없이 이름이 불린 유은영이 당황했다.
“네?”
“고기 먹으러 가자고!, 고기!”
가하성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있다가 황급히 말했다.
“리아! 팀장님께 되도않는 떼 좀 부리지 마!”
하태균이 그에 거들었다.
“그래, 리아. 나랑 하성이가 고기 사줄 테니까 팀장님 귀찮게 하지 마. 알겠지?”
리아가 불퉁하게 두 뺨을 부푸는 찰나.
“아니요.”
유은영이 말했다.
가하성과 하태균이 ‘지화자’를 쳐다봤다.
단 한 번도 자신들과 점심을 먹은 적 없는 그녀를 말이다.
유은영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제가 고기 살게요. 다 같이 점심 먹으러 가요.”
가하성과 하태균의 얼굴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리아는 해맑게 웃었다. 라이도 마찬가지.
지화자는.
“소고기 먹으러 가야겠네요.”
의외로 태연하게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입으며 그렇게 말했다.
“소고기 좋죠!”
어차피 ‘지화자’의 카드로 그을 건데 무슨 상관이 있으랴?
쾌활하게 대꾸하는 목소리에 지화자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유은영은 그녀를 향해 헤실거릴 뿐.
가하성과 하태균은 상황 파악이 덜 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유은영이 그들에게 물었다.
“가하성 씨, 하태균 씨. 안 가실 거예요?”
“네? 아, 그게.”
“가, 가겠습니다! 무조건 가겠습니다! 팀장님!”
가하성이 당황해하는 사이 하태균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렇게 0팀은 사이좋게 점심을 먹게 됐다. 5년 전, 팀이 만들어진 이래 처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