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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 힐러가 랭킹 1위가 되어 버렸다-96화 (96/200)

제96화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수현과의 이야기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비록, 분위기가 굉장히 어색했지만 말이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유은영과 조수현을 흘긋거리면서 눈치를 봤으니 말 다했지.

어쨌거나 대충 이야기가 됐다.

“그럼, 불꽃 독사자 관련해서는 조수현 팀장님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네, 지화자 팀장님.”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나 싶었다.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네?”

조수현이 난데없이 사과했다.

“제가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서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유은영이 얼빠진 얼굴을 보였다.

그가 말한 ‘그날’이 언제인지 또 왜 사과를 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조수현이 말하는 날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가 분명했다.

유은영이 라이와 리아의 선물을 사겠답시고 파충류숍을 찾았다가 조수현과 만난 날이자 그와 불편하게 헤어진 날이이었다.

‘갑작스럽게 지화자 씨의 기억이 펼쳐져서 말이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유은영은 조수현과 좋게 헤어지지 않았을 거다.

그녀는 그랬을 것이라 믿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조수현 팀장님. 크게 신경쓰지 마세요.”

오히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지화자의 기억과 감정에 휩쓸려 조수현에게 차갑게 굴고 돌아섰으니 말이다.

하지만 왜일까?

미안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사과해야 하는데.’

유은영은 몇 번이고 조수현을 향해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으려고 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대신 그에게 말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지화자 팀장님.”

조수현과는 그 말을 끝으로 헤어졌다. 그렇게 유은영은 잔뜩 불편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돌아왔고.

“어라? 왜 지화자 씨만 계세요?”

텅 빈 사무실을 보게 됐다.

유은영의 물음에 사무실에 홀로 남아있던 지화자가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대답해줬다.

“다른 녀석들은 점심 먹으러 나갔거든.”

“아직 점심시간 안 됐잖아요.”

“됐어. 지금 막.”

지화자의 말에 유은영이 시계를 쳐다봤다.

정말 점심시간이었다.

유은영이 지친 낯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네요.”

“이번 주 내내 그럴 거야. 연말이잖아.”

“연말이 왜요?”

묻는 말에 지화자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어느 회사든 연말이랑 연초가 제일 바빠. 그것도 몰라?”

“네.”

유은영은 센터가 첫 직장이었다.

애초에 10년 가까이 식물인간으로 병상에 누워있었던 그녀다.

의식을 되찾은 후, 기적적인 회복 속도를 보이면서 이렇게 센터에 힐러로 들어오게 됐지만 말이다.

어쨌든 간에 유은영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알 상식 같은 게 많이 부족했다.

지화자가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알아. 연말이랑 연초에는 제시간에 퇴근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그러니까 왜요?”

묻는 말에 지화자가 귀찮아 죽겠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연말에는 한 해에 있었던 업무를 모두 정리해야 하고, 연초에는 한 해에 처리할 업무를 미리 정리해야 하니까.”

다르게 말하면 연말에는 한 해에 사용했던 예산을 정리해야 했고, 연초에는 한 해에 사용해야 할 예산을 짜야 한다는 거였다.

유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높은 사람이 하는 일 아니에요?”

“유은영 씨, 요새 자주 잊는 것 같은데 그 높은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언니야.”

유은영은 지금 ‘지화자’였다.

0팀의 팀장, 대한민국의 랭킹 1위이기도 한 그녀의 몸에 들어가있는 유은영이 울상을 지었다.

‘저렇게 울상인 모습 엄청 오랜만에 보네.’

지화자가 픽 웃으며 유은영을 불렀다.

“언니.”

“이런 표정 짓지 말라고요? 알겠어요.”

이제 척하면 척이었다.

유은영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가볍게 ‘지화자’의 뺨을 두드린 후 물었다.

“정리는 어떻게 해야 해요?”

“지금부터 하려고? 이틀 정도만 밤 새면 끝낼 양인데?”

“이틀을 밤샐 바에야, 조금씩 나눠서 할래요.”

“마음대로 해.”

지화자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은영에게 친절하게 알려줬다.

“언니가 해야 할 일은 올 한 해 있었던 게이트를 정산하는 거야. 등급별로. 참고로 우리 0팀이 올해 공략한 게이트는 총 57개야.”

얼마 안 되지?

덧붙여 묻는 말에 유은영은 지화자의 이마에 딱밤을 먹이고 싶었다.

‘얼마 안 되기는 뭐가 안 돼?!’

평균을 내면 달에 2.5개씩 공략을 뛰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0팀이 이런데 다른 팀은…….’

유은영은 새삼스레 이 비좁은 땅덩어리에서 게이트가 참 많이 일어나는구나 싶었다.

“게이트를 등급별로 나누었으면 그 다음은 유형별로 분류해.”

타임 브레이커 유형 따로, 세나리오 유형 따로.

“마지막으로는 A-Index에 새로 등록된 녀석들을 정리하는 거지.”

“시나리오 유형도요?”

“그럼.”

지화자가 말했다.

“시나리오 유형에서 이종족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알지?”

“네.”

지화자와 함께 마족을 만난 적 있는 유은영이었다.

‘그때가 처음이었지.’

지화자와 함께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이 말이다.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그뿐이랴?

진심으로 지화자를 한 대 때려버리고 싶었다.

‘내 몸이라서 참았지.’

유은영이 과거를 회상하며 픽 웃을 때, 지화자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녀석들이 나타날 때도 있거든.”

하지만 이 경우는 드물게 일어난다면서 지화자가 말을 이었다.

“참고로 우리 0팀이 올해 시나리오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새롭게 만난 이종족은 없어.”

“할 일이 하나 줄어들었네요?”

“그런 셈이지.”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그보다 언니,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1팀과 함께 공략한 게이트의 보고서 정리라는 거 알지?”

“…알아요.”

유은영이 불퉁하게 말했다.

“오늘 중으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정말?”

“네. 다행히도 조수현 부장님께서 불꽃 독사자에 대한 건 맡겨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잘됐네. 그럼, 우리도 점심 먹으러 갈까?”

“좋아요.”

유은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그보다 다들 너무하네요. 지화자 씨만 빼고 점심 먹으러 가다니!”

“원래 나도 같이 가려고 했어.”

“그런데 왜 안 갔어요?”

“그럼, 언니 혼자서 점심 먹게 될 테니까. 유은영 씨, 혼자서 밥 먹는 거 싫어하잖아.”

유은영이 멍하니 지화자를 쳐다봤다.

“…어떻게 아셨어요?”

묻는 말에 지화자가 멋쩍게 뺨을 긁적이고는 말했다.

“안 가르쳐줄래.”

그럴 줄 알았다.

유은영이 해맑게 웃으며 지화자에게 들러붙었다.

“뭐야? 떨어져.”

“싫어요!”

지화자가 질색했지만, 유은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더욱 그녀에게 붙었다.

“어머, 지 팀장?”

“아… 나혜선 팀장…….”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2팀의 나혜선이 유은영에게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왔다. 유은영이 그녀의 힘을 경계하며 웃는 낯으로 인사했다.

꼭 잡고 있던 지화자의 팔을 놓아주면서 말이다.

“오랜만이네?”

“지 팀장이 워낙 바빠야지! 그보다 크리스마스 날에 돌발 게이트에 휘말렸었다며? 다친 곳은 없어 보이네?”

“뭐, 다행히도.”

유은영이 방긋 웃었다.

나혜선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땠어? 듣기로는 시나리오 게이트였다고 하던데.”

“직접 알아봐봐. 네 재주로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되잖아?”

“후훗,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까 지 팀장한테 묻고 있는 거겠지?”

파지직!

두 여자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의미없는 신경전이 끝난 건 3팀과 4팀의 영웅호걸이 나혜선을 부르면서다.

“누님! 거기서 뭐 해요? 어서 점심 먹으러 가요!”

“영웅이가 배고프다고 난리에요.”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그랬잖아.”

나혜선이 티격태격 싸우고 있는 영웅호걸을 향해 웃어주고는 ‘지화자’에게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점심 먹으러 갈래? 옆에 계시는 F급 힐러 분이랑 같이.”

“됐어.”

유은영이 웃는 낯으로 거절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 힐러 분이랑 따로 점심을 먹을 거거든.”

나혜선이 입매를 비틀었다.

“지 팀장이 폐급 힐러님을 엄청 아낀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말이야. 그걸 내 눈으로 보니 참 신기하네.”

누구보고 폐급이라는 거야?!

유은영은 나혜선의 말을 바로잡아주고 싶었다.

자신은 더 이상 폐급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고보니 지화자 씨께 어쩌다 D급으로 등급이 오르게 된건지 물어봐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묻지를 못했다.

어쨌거나 유은영은 나혜선의 말을 무시하며 지화자를 잡아 이끌었다.

지화자가 성난 얼굴인 나혜선을 흘긋거리고는 유은영에게 물었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자상한 ‘지화자 씨’라고 하지 않았어?”

“나혜선 팀장님께는 그러고 싶지 않은 거 있죠?”

“구순철 부장이랑 이혜나 팀장한테는 잘만 그러더니.”

“그거야 두 분은 제 상사였으니까 그러죠. 처음에 말 났을 때 얼마나 살 떨렸었는데요!”

유은영이 우는 소리를 하며 지화자를 재촉했다.

“그보다 어서 점심이나 먹으러 가요! 이렇게 된 거, 저희도 외식하죠?”

“돈은 있고?”

“많죠.”

유은영이 해맑게 웃으며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내보인 지갑에 지화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거 내 돈이잖아.”

“불만이면 이번에는 지화자 씨가 사세요. 제 돈으로요.”

유은영의 말에 지화자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결과적으로는, 유은영이 점심을 사게 됐다.

지화자의 카드로 말이다.

어쨌거나 즐겁게 점심을 마치고 시작된 오후 업무.

유은영이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팀장님, 정신 차리세요.”

지화자의 말에 유은영이 간절하게 빌었다.

“잠깐만 누워 있으면 안 될까요? 춘곤증 때문에요.”

“이 겨울에 무슨 춘곤증이에요? 헛소리할 시간에 마저 보고서나 정리하세요.”

“지화자 팀장님! 힘드시면 제가 검토해드리겠습니다!”

하태균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 말이 유은영에게는 마른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졌다.

“하태균 씨……!”

유은영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그에게 자료를 넘기려는 순간이었다.

“하태균 씨께서 보고저를 정리한다고 해도 어차피 팀장님이 검토해야해요.”

그리고 우종문한테 보고도 하러 가야했다.

결국, 유은영은 울며 겨자먹기로 쥐어짜낸 집중력으로 보고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녁 6시,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저녁 9시까지.

“지화자야, 이제 그만 가면 안 돼? 나 까미 보고 싶어!”

“저도 까망이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집으로 가요!”

“맞아! 집으로 가자!”

리아와 라이의 칭얼거림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사무실에서 날밤을 지새웠을 테다.

오늘 안으로 1팀과 함께 공략한 게이트의 보고서 정리를 끝낼 수 있다고 호엄장담했건만!

“실패했네?”

“시끄러워요.”

유은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집으로 자료를 들고가 마저 처리하면 될 것을, 죽어도 그러지는 않는 유은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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