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좀 더 놀아요.”
지화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유은영이 변명하듯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게, 월요일부터 정신 없어질 것 같아서요! 1팀이랑 공략한 게이트 보고서 작성도 아직 마무리 못 했는데!”
설상가상 돌발 게이트에 휘말리고 말았다. 유은영의 말에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알아요. 다음주부터 매일 야근해야할 걸요?”
“그, 그런!”
유은영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일주일만 고생하면 될 거예요.”
지화자가 그렇게 말하고는 카드를 내밀었다. 유은영이 카드에 고이 모셔두고 있던 블랙 카드였다.
“이, 이걸 왜 저한테…….”
“저는 우종문 부장님 만나뵈러 가야하거든요.”
그 말에 유은영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S급, 혹은 돌발 게이트의 경우 공략 당일 보고를 해야했다.
“저도 같이 가요!”
“됐어요. 유은영 씨께서 간다고 하면 라이랑 리아도 가야하고. 이미 가버린 가하성 씨도 도로 불러야 하는걸요?”
결국, 유은영은 지화자가 내민 카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한지라 그녀는 지화자에게 웅얼거리며 말했다.
“혹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알겠죠?”
“네네, 알겠습니다.”
유은영은 지화자가 연락 따위 하지 않을 거란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 애들이랑 천천히 노세요. 라이, 리아. 유은영 씨 말 잘 들어. 유은영 씨한테 이상한 인간이 들러붙으면 떼어내고.”
“네엡!”
“응! 우리만 믿어!”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대답이었으나 지화자는 아이들을 믿기로 했다.
“그럼, 너희만 믿는다.”
“네!”
“응!”
지화자는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곧,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지화자, 갔네?”
“그러게요…….”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애써 미소를 그렸다.
“뭐할까요?”
“옷부터 사자!”
“옷요?”
유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이와 리아의 옷이야 충분히 차고 넘쳐났다.
유은영이 시간일 날 때마다 아이들의 옷을 사줬기 때문이었다.
그때, 라이가 말했다.
“저랑 리아 옷 말고 은영 누님 옷 사러 가자고요!”
“맞아!”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옷에 피가 묻어있단 말이야! 새로 사러 가자!”
“그리고 저녁 먹고 집으로 돌아가요!”
유은영이 아이들의 말에 비로소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지화자는.
“오, 마침 잘 만났군. 지화자 팀장. 아직 백화점에 있어서 다행이네. 길이 엇갈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말이야.”
백화점 입구에서 우종문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
갑작스러운 우종문의 등장에 놀랄만도 하건만, 지화자가 무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장님, 제가 찾아갔을 텐데 말입니다.”
“근처에 있다가 소식 듣고 오는 길이니 너무 신경쓰지 말게.”
우종문이 싱긋 웃고는 말했다.
“자리를 좀 옮기도록 하지.”
백화점에서 갑작스럽게 게이트가 열렸다는 소식에 취재진이 몰려들고 있었다.
우종문이 건넨 말에 지화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화자와 함께 백화점 내 VVIP 고객들에게만 제공되는 장소로 향했다.
“게이트에 휘말린 사람들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더군.”
“타임 브레이커 유형이었다면 피해가 컸을 겁니다. 시나리오 유형이어서 사람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죠. 그리고 다른 팀원도 함께라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가하성 군과 유은영 양, 라이와 리아도 함께라고 했었지? 보이지 않는군.”
“네 사람 다 게이트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조금 있어서요.”
부상을 당한 사람은 유은영뿐이었지만 지화자는 태연하게 거짓말했다.
“타임 브레이커 유형의 게이트였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왔을 테지만 시나리오 유형이라서 저만 보고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팀원들을 아끼는 모습이 퍽 보기 좋군.”
우종문이 흐뭇하게 웃고는 선심쓰듯 말했다.
“보고서는 천천히 작성해서 올려 주게나. 시나리오 유형의 게이트는 보고서 작성이 늦어도 별 상관 없으니 말일세.”
“아니요.”
지화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중으로 보고서 작성해서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장님께서 급히 판단하셔야 할 사안이 있어서요.”
“시나리오 게이트에서 새로운 이종족이라도 만났었나?”
“그건 아닙니다만…….”
지화자가 목소리의 끝을 흐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지유화를 만났습니다.”
“뭐?”
우종문이 멍하니 물었다.
“이번 시나리오 게이트에서 받은 퀘스트는 이교도란 자들을 처치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교도가 숭배하고 있는 사람은 마녀라고 불리는 자였죠.”
“설마, 그 마녀가…….”
“네, 지유화였습니다.”
지화자의 말에 우종문이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지유화와 동일인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났다고는 했지만, 직접 만난 건 아니거든요.”
자신은 그녀를 그린 초상화를 봤을 뿐이라면서 지화자가 말을 이었다.
“지유화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혹시, 자네가 봤다는 초상화를 내게 보여줄 수 있나?”
“네, 지금 바로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녀의 초상화는 진작 A-Index를 통해 찍어놓은 지화자였다. 우종문이 그녀한테서 자료를 받고는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단순히 닮은 수준이 아니군. 혹시, 이 마녀에 대해 얻은 정보가 있는가?”
“네, 정리해서 오늘 중으로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겠네. 지금 바로 센터로 돌아갈 생각인가?”
“네, 부장님. 그럴 생각입니다.”
지화자의 말에 우종문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지화자 팀장.”
“네.”
“유화는 자네 손으로 죽였네.”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유화라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아나도 이상할 게 없지. 유화니까.”
그녀의 본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우종문과 똑같이 생각할 터.
“그래도 너무 마음쓰지 말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내 들어본 적이 없으니.”
“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일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지화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우종문의 말대로 지유화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결투’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우리 동생.”
지유화는 그때, 피묻은 손으로 자신의 뺨을 쓰다듬었었다.
“고마워? 덕분에 모두가 너를 볼 때마다 언니를 떠올리게 되겠네? 하지만 하나 알아둬.”
금방에라도 죽을 듯이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나는 다시 돌아올 거야.”
미소를 그리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그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후우.”
지화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는 느낌에 숨을 쉬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지유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되다니.
꼴사나웠다.
지화자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돌아왔을 리가 없어.”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지유화일 리가 없으니까.
애초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돌아온단 말인가?
고이 그 시체를 화장까지 시켜줬는데.
설사, 돌아온다고 해도.
‘또 죽이면 돼.’
랭킹 1위가 되면서 이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는데, 사람 하나 죽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 사람이 제 혈육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지화자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웅, 휴대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유은영이 자신이 쥐어준 카드를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많이도 쓰네.”
자신이 받고 있는 연봉을 생각하면 세 발의 피였지만 말이다.
지화자가 심란했던 마음을 뒤로하며 센터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유은영은.
“은영아! 내 동생!!”
“오빠가 여기 왜 있어?!”
두 팔 벌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유승민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
라이와 리아가 두 눈을 데굴 굴리고는 유승민을 거미줄로 칭칭 묶어버렸다.
지화자가 그랬다.
유은영에게 달라붙는 이상한 놈은 떼어 내려고.
리아와 라이의 눈에 유승민은 그 이상한 놈이었다.
“리아 씨, 라이 씨!”
유은영이 다급하게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는.
“잘했어요!”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리아와 라이가 방긋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유은영아, 저 오빠랑 아는 사이야? 저 오빠는 지화자 남자 친구잖아.”
“아니에요!”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맞아! 아니야!”
나 역시 동감이란다, 동생아.
유승민이 유은영의 말을 거들면서 말했다.
“나는 우리 은영이 오빠야! 하나뿐인 오빠! 그러니까 이것 좀 풀어주지 않을래?”
“유은영아, 정말이야?”
“풀어줘도 돼요, 은영 누님?”
유은영이 고개를 저었다.
“은영아!”
유승민이 오빠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울먹였다.
유은영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오빠의 감?”
“미쳤나봐.”
유은영이 질색하며 유승민을 외면하기로 했다.
“리아 씨, 라이 씨. 가요.”
“은영아, 잠깐만! 사실 센터 측의 정보를 얻어 듣고 온 거야!”
유승민이 다급하게 말했다.
“강남에 있는 유명 백화점에 돌발 게이트가 갑자기 열렸는데 휘말린 사람 중 한 명이 너라고 해서, 그래서 급하게 온 거라고!”
도대체 어디를 가느냐고 다급하게 자신을 붙잡는 부하들의 손길을 모두 뿌리치고서 말이다.
“그리고 너 내일 생일이잖아! 선물 주려고 기껏 찾아왔는데 그럴 거야?!”
그 말에 리아와 라이가 유은영을 쳐다봤다.
“유은영아, 내일 생일이야?”
“내일 생일이에요?!”
놀라 묻는 말에 유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안 챙겨주셔도 괜찮아요!”
“안 돼!”
그렇게 말한 사람은 유승민이었다.
“우리 은영이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을 어떻게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 있겠어? 절대로 용납 못해!”
어릴 적, 유승민은 총명하기로 소문난 아이였다.
‘그런데 왜 저렇게 큰 걸까?’
유은영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생일은 내일 챙겨주면 되잖아.”
“내일 나 만나주기는 할 거고?”
“설마.”
유은영이 방긋 웃었다.
당장, 내일이면 또다시 지화자의 몸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유은영은 유승민을 만날 생각 따위 없었다.
유승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 찾아왔지. 우리 은영이한테 선물 주려고.”
유은영이 피식 웃었다.
“내가 나인 건 용케 알았네?”
그건, 자신이 원래의 몸을 되찾은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동생의 말속에 품어있는 질문을 정확하게 파악한 유승민이 헤실거렸다.
“오는 길에 지화자 팀장님을 만났거든. 아, 참고로 인사는 안 하고 멀리서 보기만 했어.”
“그래서 나인 걸 알았구나?”
“응, 그보다 우리 은영이.”
유승민이 웃는 낯으로 물었다.
“머리에 그 상처는 뭐니? 어떤 새끼가 그런 거야? 설마, 그 상처 때문에…….”
“리아 씨, 라이 씨! 저희 오빠 좀 풀어줄래요?”
유은영이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