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유은영은 자신의 정보를 반복해서 확인했다. 뭔가 오류라도 난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Name: 유은영(劉隱映)
-Birth: 20X1. 12. 26
-Local: 82_대한민국
-Rank: D급
-Number: Unknown
A-Index에 기록되어 있는 유은영의 정보는 몇 번을 확인해도 변화가 없었다.
분명, F급이었던 자신의 등급이 D급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에초에 유은영은 진작 F급을 벗어나 있었지만, 그녀는 이제와서 등급이 바뀐 것을 확인했다.
그것도 시나리오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E급이었던 것이 D급으로 변경된 지금 말이다.
유은영은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등급이 바뀌는 게 가능한 일이었나?’
그런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유은영아.”
리아가 그녀를 부른 건 그때였다.
“쟤는 어떻게 할까?”
“네?”
“죽일까, 아님 그냥 둘까?”
창백하게 질린채 벌벌 떨고있는 이교도가 보였다. 다른 이교도들은 모두 죽은 것처럼 보였다.
유은영이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냥 두죠.”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휘익, 철퍽!
무언가 날아와 이교도의 얼굴을 감싸버렸다.
“끄아아악!”
이교도가 자신의 얼굴에 붙은 것을 떼어내고자 발버둥쳤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얼굴과 손에 지독한 화상을 입고 죽어버린 거다.
유은영이 헛숨을 들이마실 때.
“리아!”
“오빠!”
라이가 한달음에 달려와 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이교도를 죽인 사람은, 다름 아닌 라이였다. 라이가 리아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다급하게 물었다.
“리아, 괜찮아?!”
“응! 오빠는?”
“나도 괜찮아.”
“다행이다!”
리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유은영도 같이 있어! 여기!”
“정말이네? 은영 누님!”
“…라이 씨.”
유은영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애써 웃으며 물었다.
“라이 씨, 다친 곳 없어요? 괜찮아요?”
“네? 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사람들이 위험해요!”
그 말에 유은영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교도들은 사람들을 제물로 바칠 거라고 했다.
“어서 가죠.”
유은영이 걸음을 재촉했다.
이교도가 죽은 것을 필사적으로 모른 척, 무시하면서 말이다.
어차피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서라면 죽여야 할 사람이었다.
‘신경 쓰지 말자.’
유은영의 머리 부근에 났던 상처는 어느새 딱지가 앉아 있었다.
***
“으아아악!”
이교도들이 비명을 질렀다.
촤아악!
흩뿌려진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교도 하나가 겁에 질린 얼굴로 빼액 소리 질렀다.
“오, 오지 마! 오면 이 녀석을 죽여버리겠다!”
“사… 살려주세요……!”
이교도에게 붙잡힌 남자가 벌벌 떨며 외쳤다. 하지만 지화자는 무자비했다.
남자와 함께 이교도를 죽여버린 거다. 그가 게이트에 휘말린 일반인이었다면 당연히 구했었겠지만, 남자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
가하성이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많이 변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가하성의 말에 지화자가 콧방귀를 꼈다.
“저는 변한 적 없어요.”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팀원한테 존댓말을 쓰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지화자는 괜히 유은영을 속으로 욕했다. 가하성은 지화자의 말에 심드렁하게 말했다.
“네, 그러시겠죠.”
철컥, 가하성이 탄창을 갈고는 총구를 들었다.
타앙!
총성과 함께 도망치던 두 명의 이교도가 털썩 쓰러졌다.
[‘용사’로서 이교도들을 처치하십시오.]
[54/300]
가하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한참 남았네요.”
귀찮아 죽겠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지화자가 말했다.
“나머지는 저 안쪽에 있을 거예요. 곧 제물을 바칠 시간이라며 사람들을 모을 거라고 했으니까 말이죠.”
“그래요? 그런데 그걸 누구한테 들었대요?”
가하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화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 사람한테요.”
툭, 그녀가 발로 건드린 이교도는 숨이 끊어져 있었다.
“가하성 씨가 이교도들 머리를 날려버리고 있을 때, 이분께서 뭐든 가르쳐줄 테니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했거든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애초에 지화자는 이교도들을 살려줄 마음 따위 없었다.
게이트 공략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숭배하고 있는 ‘마녀’ 때문이기도 했다.
‘마녀에 대해 알려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으니까.’
어쩌랴?
그렇다면 모두 죽일 수밖에.
까드득, 지화자가 이를 갈았다.
시야가 점멸하는 것 같더니 정신을 차리니 자신의 몸이었다.
너무 흥분해서 주위를 살피지 못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리아한테 주변 좀 경계하고 있으라고 할걸.’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지화자는 최대한 빠르게 유은영과 합류하기로 마음먹었다.
분명 당황해하고 있을 터.
더욱이 유은영은 자신의 불찰로 상처를 입고 말았다.
‘E급에서 D급으로 한 단계 더 올랐지만…….’
유은영이 그 상황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그녀가 상처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지도 걱정됐고.
고민에 잠겨있는 그녀를 가하성이 불렀다.
“팀장님, 안 움직일 거예요?”
“잠시만요.”
지화자가 가볍게 봉을 휘둘렀다.
화르륵!
이교도들의 시체가 일제히 불타기 시작했다. 가하성이 고약한 냄새에 미간을 좁혔다.
“시체들을 불태울 필요가 있어요? 안 그래도 동굴이라 환기도 안 되는데.”
“혹시 모르잖아요? 이교도들이 다시 살아날지도.”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모르세요?”
가하성이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지화자는 그에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럼, 갈까요?”
“네, 팀장님.”
지화자가 땅을 박차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하성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침입자를 발견했다!”
“죽여라!”
앞을 막는 이교도들은 착실하게 죽이면서 그들은 달렸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지, 지화자다! 지화자야!”
“우리는 살았어!”
“저희 좀 구해주세요!”
게이트에 휘말린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지화자가 가볍게 감옥을 부수고는 말했다.
“가하성 씨, 사람들을 부탁할게요. 지켜줄 수 있죠?”
가하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혼자서 이교도들을 처리할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남은 이교도들은 200명 남짓.
많은 수였지만 지화자는 그들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보였다.
“가하성 씨께서는 사람들 다치지 않게 잘 지키기나 하세요.”
“그렇게 말하시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가하성이 뾰족하게 말했다.
지화자는 어련히 그러겠다면서 다시 땅을 박찼다.
동굴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지화자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겁에 질려 흐느끼는 소리를 비롯해서 광기에 젖은 목소리 등, 온갖 소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곧 지화자는 소음의 정체를 맞닥뜨리게 됐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또한 그들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이교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우뚝 솟은 곳에서.
“유은영!”
지화자는 유은영을 발견했다.
***
“지화자 씨……!”
이교도들에게 붙잡혀 있던 유은영이 환하게 웃었다.
이내 그녀는 다급하게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사람들부터 구해주세요!”
“이 년이!”
유은영을 향해 검을 겨누던 이교도가 그녀를 발로 찼다.
유은영이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를 발로 찬 이교도가 똑같이 걷어차인 것은 그때였다.
“컥……!”
이교도가 쿨럭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유은영이 이교도를 발로 차 넘어뜨린 여자를 알아보고는 빼액 소리 질렀다.
“지화자 씨! 사람들부터 구하라니까요?!”
“걱정 마. 모두 구했으니까.”
지화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대로, 사람들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던 이교도들이 하나같이 죽어 있었다.
“어… 어떻게……….”
유은영이 입을 뻐금거렸다.
지화자는 그녀에게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줬다.
“중국에 롱유에라는 녀석이 있어. 3년 전인가? 우리나라에 방문했을 때 싸워본 적이 있거든.”
지화자가 유은영의 손목을 결박하고 있는 것을 손수 풀어주며 말을 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이용해 힘을 사용했어. 롱유에의 힘은 이럴 때 유용하거든.”
그러면서 지화자는 물었다.
“괜찮아?”
“네? 네, 괜찮아요.”
유은영이 자유로워진 손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대답했다. 그녀에게 지화자는 다시금 물었다.
“머리는?”
“머리도 괜찮아요.”
머리의 상처에 딱지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래, 그렇게 보이네.”
지화자가 안도하며 물었다.
“라이랑 리아는?”
“사람들을 구출하고 있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있었어?”
“네, 여기 계신 분들은 이 세계의 사람들이거든요.”
지화자는 그제야 이교도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던 사람들의 차림새가 특이하다는 걸 알았다.
“유은영 씨, 바보야? 내가 말했잖아! 이곳은 공략되면 사라질 세계라고!”
“그렇다고 해도요!”
유은영이 빼액 소리 질렀다.
“살아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암만 NPC라고 해도 사고할 줄 아는 사람들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모른 척 해요?”
이교도를 죽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언니는 정말……!”
지화자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말했다.
“말을 말지.”
그때, 그녀의 눈에 바닥을 기며 도망치고 있는 이교도가 보였다.
“어디를 가려고?”
지화자가 단숨에 그를 붙잡았다.
“히이익!”
이교도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벌벌 떨었다. 지화자는 그의 목에 무기를 치켜들고는 미소를 그렸다.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하나, 내 손에 죽는다. 둘, 내가 원하는 정보를 말해준다.”
그 말에 이교도가 소리 질렀다.
“워, 원하는 게 뭔가!”
지화자가 비딱하게 웃었다.
“너랑은 말이 잘 통할 것 같네? 다른 녀석들은 어찌나 입이 무겁던지.”
그래서 모두 죽여버렸다며 지화자가 무릎 굽혀 그와 눈을 마주치고는 물었다.
“마녀가 도대체 누구지?”
이교도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떨다가 꿀꺽 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마, 마녀님께서는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다! 버러지 취급받던 우리를 사람답게 살게 해주신 분이지!!”
이교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도 마녀님을 뵙게 되면 알게 될 거다! 마음을 빼앗긴다는 게 무엇인지! 경이로운 힘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를 말이다!”
“그렇구나.”
지화자가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그 마녀님, 꼭 만나보고 싶네.”
그러고는.
“커헉……!”
이교도의 숨을 순식간에 끊어버렸다.
목이 꺾인 이교도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지화자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그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줬었다.
하지만 그 선택지에 ‘살려준다’는 말은 없었다.
“지화자 씨.”
그때, 유은영이 조심스럽게 지화자에게 다가왔다.
지화자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었다.
“지유화가 아니야.”
지화자의 눈에 동굴 벽면 하나를 꽉 채우고 있는 초상화가 보였다.
살짝 곱슬기가 도는 머리칼을 가슴 아래로 기른 여자.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은 지화자와 똑같았다.
하지만 그녀와는 다르게 그림 속의 여자는 부드럽게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지화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유화일 리가 없어.”
그 말은 자신에게 거는 세뇌와도 같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