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이 밝았다.
유은영은 라이와 리아의 밝은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우와! 거미 친구! 오빠, 거미 친구야! 산타 할아버지가 진짜 선물 줬어!”
“그러게? 와아!”
“라이, 리아! 그것들 밖에 풀어놓지마!”
지화자가 버럭 소리 질렀다.
물론, 그녀의 말을 들을 리가 없는 라이와 리아였다.
“이름이 뭐야? 까미? 예쁘다! 내 이름은 라이야!”
“내 이름은 리아! 네 이름은 뭐야? 까망이라고?”
유은영이 밖으로 나오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라이 씨, 리아 씨. 선물 마음에 들어요?”
“응!”
“네!”
리아와 라이가 밝게 대답했다.
“산타 할아버지가 진짜 선물을 줄 줄 몰랐어요!”
“그것도 나랑 오빠가 진짜진짜 가지고 싶었던 친구를 선물로 줄 줄이야!”
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엄청 행복해!”
그렇게 보였다.
유은영이 흐뭇하게 아이들을 볼 때였다.
“지화자랑 유은영은 산타 할아버지한테서 선물 못 받았어?”
“네. 저희는 어른이니까요.”
그 말에 리아가 물었다.
“어른은 선물 받으면 안 돼?”
“그건 아니지만…….”
말 끝을 흐리는 목소리에 리아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그럼, 내년에는 나랑 오빠가 선물 줄게!”
“맞아요! 리아랑 같이 저금해서 꼭 선물 사드릴게요! 저희는 내년에도 착한 일 많이 해서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을 테니까요!”
그 말에 유은영이 웃었다.
“마음만이라도 고마워요.”
라이와 리아는 꼭 선물을 사주겠다느니 뭐니 그런 소리를 하면서 다시 선물받은 거미와 놀기 시작했다.
“저렇게 좋을까요?”
“좋겠죠.”
지화자가 심들어하게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유은영이 물었다.
“유은영 씨는 거북이랑 많이 친해졌어요?”
“그다지요.”
지화자가 구시렁거렸다.
“느려 터져서는. 말귀는 알아 듣나 모르겠네요.”
“알아 들을 거예요. 이름은 붙여줬어요?”
“아니요, 아직요.”
그 말은 이름을 고민하고 있는 뜻이렷다!
유은영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장수 어때요?”
“구려요.”
상처다.
유은영이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일 때였다.
“지화자야, 유은영아! 까미가 물어볼 게 있대!”
“뭘 물어보고 싶대요?”
“지화자랑 유은영은 나한테 선물 안 주냐는데?”
지화자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까미가 그랬다고?”
“응!”
“거짓말 하시네.”
“거짓말 아니야!”
리아가 빼액 소리 질렀다.
유은영이 심통이 잔뜩 난 리아를 달랬다.
“미안해요, 리아 씨. 선물은 준비하지 못했는데 어쩌죠?”
“히잉.”
리아가 우는 소리를 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까미가 놀러라도 나가면 안 되냐는데?”
“까망이도 바깥 구경하고 싶대요!”
라이가 리아의 말을 거들었다.
유은영이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돼요.”
하지만.
“안 돼.”
지화자는 고개를 저었다.
파지직―!
유은영과 지화자가 눈싸움을 시작했다.
* * *
“망할.”
눈싸움의 승자는 유은영이었다.
“이왕 나온 거, 기분 좋게 즐기자고요.”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언니는 모자나 푹 눌러쓰고 있어.”
“네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눈싸움에서 승리한 유은영은 모두를 데리고 근처 백화점에 있는 아이스링크장으로 향했다.
“유은영아! 같이 놀자!”
“맞아요! 같이 놀아요!”
라이와 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유은영’을 불렀다.
‘지화자’는 부를 수 없었다.
그녀를 불렀다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될 테니.
주의를 당부하는 목소리에 라이와 리아는 시무룩하게 말했었다.
“지화자는 지화자인데 지화자라고 부를 수가 없다니.”
“너무해요.”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한 아이들이었다.
어쨌거나 라이와 리아는 아이스링크장에 도착한 후 물만난 고기처럼 날아다녔다.
“유은영아아!”
“은영 누니임!”
자신을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지화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짐은 제가 보고 있을게요. 라이 씨랑 리아 씨랑 놀고 오세요.”
“귀찮게……!”
결국 지화자는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아는 ‘유은영’이 아이스링크장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붙잡아 넘어뜨렸다.
“리아!”
“꺄하하! 오빠, 유은영 넘어졌어! 바보야, 바보!”
그 소리에 ‘유은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으앙! 오빠!”
“누님! 리아 괴롭히지 마요!”
라이가 리아를 보호하면서 ‘유은영’에게 빼액 소리 질렀다.
그 모습들을 보고 있던 유은영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귀찮다고 하시더니 애들이랑 잘 노네.”
그렇게 유은영이 평화로운 광경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팀장님?”
“…가하성 씨?”
의외의 사람을 만났다.
유은영이 놀란 눈으로 가하성을 반겼다.
“가하성 씨께서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그보다 저는 어떻게 알아보신 거예요?”
“그냥 알겠던데요.”
가하성이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팀장님께서는 여기 무슨 일이세요? 느긋하게 쇼핑을 즐기러 온 건 아닐테고.”
그때, 라이와 리아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가하성이 아이들의 목소리를 알아 듣고는 말했다.
“라이랑 리아가 밖에서 놀고 싶다고 때라도 썼나 보네요.”
“하하, 그냥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서 라이 씨랑 리아 씨 데리고 놀러 나왔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저 사람은 유은영 씨 아닌가요?”
“아, 그게. 우연히 만났어요!”
자신이 ‘유은영’과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라이와 리아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속 시원하게 ‘우리 같이 살게 됐습니다!’라고 밝히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화자가 허락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유은영의 말에 가하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연히요?”
“네. 쇼핑 끝내고 집에 가려는 걸 잡아서 라이 씨랑 리아 씨 좀 부탁했어요.”
유은영이 멋쩍게 웃었다.
“제가 남들 눈에 띄는 걸 싫어하잖아요. 띄어서 좋은 것도 없고.”
“그렇기는 하죠.”
가하성이 그렇게 말하며 유은영의 옆에 앉았다.
‘왜?’
유은영이 당황해하는 찰나 가하성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일어날 거니까요.”
“아아, 네에.”
정적이 찾아왔다.
유은영은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끼며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이 어색한 적막을 부수기 위해서였다. 그때, 유은영의 눈에 가하성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 봉투가 들어왔다.
“선물을 많이 사셨네요?”
“줄 사람이 많아서요.”
가하성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대답을 끝으로 다시 어색한 적막이 찾아오는 찰나.
“고아원 애들한테 줄 선물이에요.”
가하성이 말했다.
“네?”
“이것들요. 고아원 애들한테 가져다 주려고요.”
가하성이 멋쩍게 뺨을 긁적이고는 말했다.
“어쨌든,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애들이랑 잘 노세요.”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가하성이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가하성은 유은영한테서 멀어질 수 없었다.
쿠궁―!
백화점이 흔들렸다. 아이스링크장 역시 크게 흔들렸다.
“꺄아아악!”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라이 씨, 리아 씨!”
유은영이 곧장 아이스링크장으로 달려갔다. 지화자가 라이와 리아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파아앗!
환하게 터지는 빛에 유은영은 그들을 향해 뻗은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 * *
―국가 넘버, 82.
A-Index 오류가 감지됐습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국가 넘버, 82.
A-Index 오류가 감지됐습니다.
속히 오류를 해결하고,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240번지에 생성된 게이트를 공략하시기를 바랍니다―
* * *
쿠궁―!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유은영이 정신을 차렸다. 잠깐 기절을 했었나 보다.
“아이고, 머리야…….”
유은영이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혹시 건물이 무너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문득 드는 불길한 생각에 유은영이 꿀꺽 침을 삼켰다.
다행히도 건물이 무너졌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요, 용사님이 또 오셨다!”
“새로운 용사님이시다!”
그렇다고 다행인 상황도 아니었다.
‘용사? 누가? 내가?’
유은영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보일 때였다.
“지화자 팀장님.”
“가, 가하성 씨?”
유은영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가하성 씨가 왜 여기 있으세요? 가신 거 아니에요?”
“가는 길에 휘말렸어요.”
“네?”
“게이트에 휘말려버렸다고요.”
가하성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A-Index에서 감지하지 못했나봐요. 나참, 귀찮게.”
그러니까 돌발 게이트라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일반인들도 많이 휘말린 것 같은데 곤란하게 됐네요.”
“그런…….”
유은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다급하게 물었다.
“유은영 씨는요? 라이 씨랑 리아 씨는 못 봤어요?”
“네, 못 봤어요. 아무래도 다른 곳에 떨어졌나봐요.”
그때였다.
“용사님들을 뵙습니다. 저는 이 나라의 국왕인 아비누스라고 하옵니다.”
사람들 사이로 왕관을 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교도들의 처치해줄 용사님들께서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기쁠 따릅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유은영과 가하성의 눈앞에 푸른 윈도우 창이 나타났다.
[‘용사’로서 이교도들을 처치하십시오.]
[0/300]
가하성이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역시 시나리오 게이트였군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타임 브레이커 유형이었으면 민간인의 피해가 엄청났을 거다.
“팀장님, 공략하실 거죠?”
“당연하죠.”
유은영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아무래도 게이트에 휘말린 다른 사람들은 이교도들에게 잡혀있는 것 같으니 최대한 빠르게 공략을 진행하도록 하죠.”
“네.”
가하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팀장님, 이교도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움직이죠?”
“그건 저희가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비누스가 손짓하자 그의 곁을 지키던 호위 기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이교도들의 근거지로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유은영이 가하성과 함께 기사의 뒤를 따랐다. 아비누스는 그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디 저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용사님들이여.”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지화자가 시나리오 게이트에 대해 알려줬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만들어진 세계야. 너한테 말을 건 병사는 게임으로 치면 NPC지. 그런데 사고할 줄 아는 NPC란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자신도 이곳이 만들어진 세계인 걸 안다는 거야. 우리가 공략을 끝내면 자신이 있는 세계가 백지로 돌아간다는 것도 말이야.”
왜일까?
새삼스럽게 거북한 마음이 드는 것은.
‘실존하는 세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겠지.’
지화자한테도 말한 적이 있었다.
“있잖아요, 지화자 씨. 혹시, 이곳은 원래 있었던 세계의 일부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순간이 시나리오 게이트로 활용되고 있는 거죠.”
“일리 있는 말이야.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도 유은영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거 알지?”
마음이 더더욱 불편해졌지만.
“용사님, 도착했습니다.”
이제 집중해야할 때였다.
지화자의 말처럼, 이곳이 정말 실존하는 세계의 일부라고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