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지화자 씨가 파충류를, 그것도 거미를 키운 적 있다니!
유은영이 놀란 얼굴로 지화자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무실로 돌아간 뒤였다.
그보다.
“거미라…….”
홀로 남은 유은영은 센터 근처에 파충류샵이 있는지 검색해봤다.
다행히도 파충류샵이 센터 근처에 있었다.
하지만 유은영은 몰랐다.
기껏 라이와 리아의 선물을 사러 들른 파충류삽에서.
“조, 조수현 팀장님?”
“…지화자 팀장님?”
조수현을 만날 줄을 말이다.
유은영이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조수현 팀장님께서 여기는 무슨 일로……?”
아, 그보다!
“손은 좀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대로 조수현의 손은 멀쩡해보였다.
“다행이네요.”
유은영의 말에 조수현이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저는 아이들 간식 사러 왔습니다. 지화자 팀장님께서는 이곳에 무슨 일이십니까?”
“내일 크리스마스잖아요. 라이 씨랑 리아 씨 선물사러 잠깐 나왔어요.”
“그렇군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어색해!’
유은영은 당장에라도 파충류샵을 나가고 싶었다. 그때, 조수현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라이 씨와 리아 씨라니. 지화자 팀장님께서 아이들을 그렇게 부르는 거 처음 봅니다.”
“네? 아, 그게.”
유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앞으로 모든 팀원을 존중하기로 했거든요.”
“그렇군요. 그러고보니 지화자 팀장님께서 많이 달라졌다는 소문을 많이 듣기는 했습니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단 말이야?
유은영이 놀란 기색을 숨기면서 말했다.
“저도 좀 달라져야죠.”
“그래서 저를 그렇게 걱정해주셨던 겁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유은영은 당황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얼굴 밖으로 드러난 당혹감을 재빠르게 지우고는 말했다.
“조수현 팀장님께서 잘못되시면 제가 고생하니까요. 그리고…….”
유은영이 잠깐 숨을 멈췄다.
“화자야, 여기 선물.”
“선물이요……?”
“내일 크리스마스잖아.”
지화자의 기억이 눈 앞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할 겨를따위 없었다.
지화자가 그 당시에 느꼈던 감정이 물 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지화자가 받은 선물은 거미였다.
암수 한 쌍의 부부인 거미.
지화자는 거미를 싫어했다.
하지만 난생 처음 받아보는 선물이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유화가 그러더라고. 화자, 네가 어릴 적부터 거미를 좋아했다고.”
들리는 이름에 쿵, 심장이 떨어져내렸다.
“수현 씨, 선물 벌써 줬어? 같이 주자니까.”
또한, 숨이 멈췄다.
살짝 곱슬기가 도는 머리칼을 가슴 아래로 기른 여자가 조수현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예쁘장하게 웃으며 지화자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동생, 선물 마음에 들어? 타란튤라라고, 독성이 강한 녀석이야. 한 번 물리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고 하네?”
죽을 수도 있다니.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지화자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장난이야. 사실 타란튤라의 독은 그렇게 강하지 않대. 물릴 위험도 적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 알겠지?”
지화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우리 동생.”
지유화가 성큼, 그녀에게 다가온 건 그때였다.
“고맙다고 해야지?”
낮게 들리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지화자는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들었다.
지유화의 뒤로 조수현이 보였다.
지유화가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래, 화자야. 유화가 네 선물 고르느라 엄청 고민했어. 고맙다고 해야지.”
지유화의 말을 거드는 조수현이.
“지화자 팀장님? 지화자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던 광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 기억에서 ‘지화자’가 느꼈던 감정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유은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수현 팀장님,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착각하지 마세요.”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그러나 유은영은 자신의 입을 막지 않았다.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띄우며 눈 앞의 남자에게 말할 뿐이었다.
“저는 지유화만큼이나 당신을 증오하고 싫어하니까. 제가 아무리 달라져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조수현이 두 눈이 살짝 떨렸다.
유은영은 그대로 뒤돌아 가게를 벗어났다.
* * *
유은영은 결국 센터에서 30분 정도 떨어져있는 파충류샵에서 라이와 리아의 선물을 샀다.
선물은 퇴근길에 받아서 가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 탓에 유은영은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야 사무실로 돌아왔다.
“늦으셨네요?”
“…죄송해요, 유은영 씨.”
유은영은 변명없이 사과했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지화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거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퇴근 시간이 다 됐다.
“팀장님! 그럼, 라이와 리아 데리고 먼저 퇴근해보겠습니다!”
“네, 하태균 씨. 라이 씨랑 리아 씨 잘 부탁할게요.”
“넵!”
하태균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념해서 라이와 리아에게 저녁을 사주기로 했다.
“하성이 오빠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맞아! 하성이 형님도 같이 저녁먹으면 좋을 텐데!”
“선약이 있거든.”
가하성이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들고는 인사했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월요일에 뵙죠.”
그렇게 유은영은 오랜만에 지화자와 단 둘이서 퇴근하게 됐다.
“퇴근 길에 가게 들러야해요.”
“가게는 왜?”
“라이 씨랑 리아 씨 선물 가지러 가야하거든요”
“그래? 어디에 있는 가게인데?”
“여기요.”
유은영이 지화자에게 가게 위치를 보여줬다. 지화자는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곧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유은영이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거다.
“지화자 씨.”
“응?”
“지유화 씨는 어떤 분이셨어요?”
“지유화는 갑자기 왜?”
“봤거든요.”
끼이익―!
매끄럽게 도로를 내달리고 있던 차가 갑작스럽게 멈춰섰다.
“지유화를 봤다고? 도대체 어디에서? 어디에서 본 거야?!”
“지, 진정하세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빵빵―!
신경질적인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지만 지화자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장 말해! 어디에서 본 거야!”
당장에라도 자신의 멱살을 잡을 듯이 구는 모습에 유은영이 빼액 소리 질렀다.
“지, 지화자 씨의 기억에서요!”
그녀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지유화 씨는 지화자 씨가 죽였잖아요! 살아 있을 리가 없는데 왜 그러세요?!”
지화자가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그래… 그렇지…….”
지화자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유화는 죽었지. 내 손으로 직접 숨통을 끊었어. 그래, 그랬지.”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내뱉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곧, 진정한 듯 지화자가 유은영에게 물었다.
“지유화를 내 기억에서 봤다고?”
“네.”
유은영이 우물쭈물거렸다.
“라이 씨랑 리아 씨 선물 사러 들린 파충류샵에서 조수현 팀장님을 만났거든요.”
“그 인간이 파충류샵에는 왜 있었대?”
“아이들 간식 사러 왔다고 했어요. 파충류 키우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말에 지화자가 멈칫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은영이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지화자가 물었다.
“그래서?”
“아, 어쨌든 잠깐 대화를 나누다가 조수현 팀장님께서 제 정체를 의심하는 것 같은 이야기를 꺼내셨거든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유은영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적당히 말을 꾸며내려고 했는데…….”
그때, 지화자의 기억이 자신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고 유은영이 말했다.
“이런 적 처음이에요.”
지화자가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소감은?”
유은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지화자 씨는 거짓말쟁이세요. 크리스마스 선물 받은 적 한 번도 없다고 하더니.”
“사실인걸?”
지화자가 다시 차를 몰았다.
“선물은 받는 사람이 기뻐야 선물이잖아. 그런 의미에서 조수현이 지유화랑 같이 내게 준 선물은 선물이 아니었어.”
하지만 처음에는 기뻐했잖아요.
유은영은 튀어나오려던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때 지화자가 입을 열었다.
“지유화가 어떤 인간이었냐고 물었지?”
유은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을 본 건지는 모르겠으나 지화자가 담담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쓰레기였어.”
지화자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언니한테는 말해줄 수 있는 게 이게 전부네? 미안.”
미안?! 지금 지화자 씨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거야?!
‘도대체 왜?’
유은영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지화자에게 물었다.
“지화자 씨, 혹시 제 몸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아니?”
“그런데 왜 답지 않게 사과를 하고 그러세요?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바뀐다고 하던데 아니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때마침 가게에 도착했다.
지화자가 근처에 주차하고는 말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어서 애들 선물이나 찾아와!”
유은영이 입술을 삐죽 내리고는 차에서 내렸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지화자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하여튼간에 사람이 좋게 대해주려고 해도…….”
쯧, 지화자가 짧게 혀를 찼다.
곧 그녀는 과거에 잠겼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아본 선물은 암수 한 쌍의 거미였다.
지화자는 거미가 싫었다.
3평 남짓한 좁은 단칸방. 거미는 그 방의 불청객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선물 받은 것을 최선을 다해 키웠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선물은 그여에게 있어서 보물이었다.
그러나.
“우리 동생, 왔어?”
지화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받은 선물을 잃고 말았다.
지유화.
그녀가 지화자가 애지중지 키우고 있던 타란튤라 한 쌍을 불태워 죽여버렸기 때문이었다.
“얘네가 낳은 새끼들, 수현 씨한테 줬다며? 그래서 죽였어.”
터무니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지화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손으로 지유화를 죽일 때에도, 그녀는 자신의 언니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못했다.
“읏차! 애들 데리고 왔어요!”
조수석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과거에서 벗어난 지화자가 눈가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늦었네?”
“그게, 고민하다가 한 마리 더 샀거든요.”
“거미를?”
“아니요!”
유은영이 그렇게 말하며 지화자에게 작은 어항을 넘겼다.
“뭐야?”
“거북이요.”
어항 안에는 거북이가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있었다.
지화자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거북이인 거 아는데 얘를 왜 나한테 주냐고.”
“선물이에요.”
유은영이 배시시 웃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지화자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선물따위 이제 그 누구한테서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물이라니.
그것도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니.
지화자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거북이를 보며 우물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말하는 지화자의 입가에는 옅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이번 크리스마스는 무척 즐거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