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아, 진짜. 짜증나게. 그냥 주먹으로 한 대 때릴 걸 그랬나?”
유은영이 화장실에서 로렌치니 윌던에게 얻어맞은 곳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지화자야!”
“누님! 왜 이렇게 늦었어요?!”
리아와 라이가 유은영을 반겼다.
유은영이 리아의 옆에 앉고는 말했다.
“밖에서 바람을 쐬다가 넘어졌거든요.”
“넘어졌다고요?”
지화자가 미간을 살포시 좁히고는 그녀의 뺨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다치셨네요.”
그 말과 함께 따뜻한 기운이 ‘지화자’를 감싸기 시작했다. 유은영이 놀라 황급히 지화자의 손에서 멀어지고는 말했다.
“아, 하하! 그렇게 크게 안 다쳤어요. 그냥 꼴사납게 혼자 제 발에 걸려서.”
유은영이 머쓱하게 웃고는 황급히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그런데 고기는요?”
“애들이 진작 다 먹었죠.”
지화자의 말에 리아와 라이가 뿌듯하게 웃었다. 유은영은 멍하니 입을 뻐금거리다가 빼액 외쳤다.
“제 몫 남겨두라고 했잖아요!”
“그러기도 전에 다 먹었던데요?”
“그럴 수가!”
유은영이 경악했다.
“괜찮아, 지화자야! 집에 가서 치킨 먹으면 되니까!”
“다리 모두 누님한테 드릴게요!”
리아와 라이의 말에 지화자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고기를 지금 20인분어치 먹었는데 치킨이 먹고 싶어?”
“응!”
“네!”
리아와 라이의 대답에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좋아요. 가는 길에 치킨 시켜요. 양념? 간장? 아님, 그냥 후라이드?”
“세 개 다 먹고 싶어!”
“저도요!”
성장기 아이들은 먹는 것에 있어서 아주 진심이라고 하더니.
지화자가 질리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화자 팀장님, 카드 좀 주세요. 계산하고 올게요.”
“아, 네!”
유은영이 지화자에게 그녀의 카드를 넘겼다. 지화자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러 나갔다.
그런데.
“계산이 다 됐다고요?”
“네, 웬 잘생긴 청년이 들어와서는 그쪽 테이블을 계산하고 돌아갔어요.”
“잘생긴 청년이요?”
“네네! 연예인 뺨 칠 정도로 아주 잘 생겼던데요?”
지화자가 미간을 좁혔다.
‘유승민인가?’
하지만 그건 아닐 것 같았다.
유승민의 성격상, 고깃집에 자신이 있는 걸 봤다면 눈치 없이 안으로 들어왔을 테다.
‘도대체 누구지?’
지화자가 표정을 굳혔다.
“아가씨? 왜 그래?”
“혹시 잘 생긴 것 말고 다른 특징이 있었나요?”
“키도 무척 컸어! 배구 선수나 농구 선수해도 될 만큼.”
유승민은 절대 아니었다.
그때였다.
“유은영 씨, 이만 가요. 치킨 시켜났어요. 집에 도착하면 곧바로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아아, 네. 알겠어요.”
지화자가 얼떨결에 대답하고는 종업원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엄청 맛있어요!”
라이와 리아의 대답에 종업원이 흐뭇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유은영이 인사했다.
“다음에 또 올게요.”
“언제든 찾아와요!”
고깃집 안쪽에 있던 사장이 우렁차게 그들에게 인사했다.
지화자를 제외한 모두가 까르르 웃고는 고깃집을 나갔다. 그렇게 차에 타자마자 지화자가 말했다.
“지화자 팀장님.”
“네?”
“밖에서 누구 만났었나요?”
유은영이 흠칫 몸을 떨었다. 지화자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장난이에요. 지화자 팀장님께서 만날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하, 하하! 그, 그렇군요!”
유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지화자는 그녀를 흘깃거리고는는 미간을 좁혔다.
‘누구 만났네, 만났어.’
그 대상과 괜한 가십거리가 생기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지화자였다.
그리고 다행히 지화자의 바람은 이뤄졌다.
맞이한 다음날, 자신을 둘러싼 가십 기사 따위는 메인 포털에 올라오지 않은 거였다.
“진짜 혼자서 넘어진 게 맞았단 말이야?”
지화자가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픽 웃었다.
“덜렁대기는.”
***
출근길, 유은영이 차에서 내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속이 너무 더부룩해요.”
“어제 그렇게 먹어댔으니까 당연히 속이 더부룩하겠죠.”
지화자가 유은영에게 소화제를 내밀었다.
“유은영아, 지화자가 마신 음료 나도 줘. 나도 속이 더부룩해.”
“저도요.”
“너희는 알아서 사먹어.”
지화자가 라이와 리아에게 돈을 쥐어주었다.
“앗싸!”
라이와 리아가 활짝 웃으며 카페테리아로 내려갔다. 그렇게 두 사람이서 0팀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오셨습니까?”
“가하성 씨?”
유은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오늘 평소보다 더 일찍 출근하셨네요?”
“일찍 잠에 들었거든요. 그런데 중간에 조수현 팀장님께서 부탁을 한다고 제게 전화를 걸어서요.”
덕분에 날밤을 그대로 깠다면서 가하성이 구시렁거렸다.
“지화자 팀장님,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조수현 팀장님께서 그렇게 찾았습니까?”
“네? 따, 딱히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유은영이 그렇게 말하면서 황급히 지화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망했다.’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다행이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해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만 말해주세요, 가하성 씨! 지화자 씨께서 저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는 게 보이지 않나요?!
안타깝게도 가하성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조수현 팀장님과 무슨 일이 있었기에 팀장을 그렇게 애타게 찾아대시는건지.”
“아, 하하! 하하하! 그럴 일이 조금 있어서 말이죠! 그보다 가하성 씨! 부탁할 게 있는데 들어주실 거죠?”
‘들어주면 안 될까요?’도 아니고 ‘들어주실 거죠?’란다.
답이 정해진 질문에 가하성이 잔뜩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라이랑 리아한테 카페테리아 가서 고구마 라떼 좀 사라고 보냈는데 애들이 안 와서요! 찾아와 주실 수 있을까요?”
“어련히 알아서 찾아오지 않을까요? 걔들이 어린 애들도 아니고.”
“어려요, 어려!”
유은영이 가하성을 억지로 0팀의 사무실 밖으로 쫓아내고는 활짝 웃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잠깐만요, 팀장님!”
가하성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지만 유은영은 진작 문을 닫아버린 후였다.
“유은영 씨.”
아참, 지화자 씨도 보냈어야 했는데!
유은영이 불린 이름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화자가 그녀를 향해 날선 목소리를 쏟아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조수현이랑 만났었어? 도대체 언제? 혹시 고깃집 앞에서?”
“저, 저기. 질문은 하나씩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지화자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입을 열 때였다.
“지화자 팀장, 출근했나?”
누군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현장 파견 부서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오, 이런. 유은영과 이야기를 나누던 모양이군.”
“아닙니다, 우종문 부장님!”
유은영이 황급히 대답했다.
“이야기 다 끝냈어요. 그렇죠, 유은영 씨?”
“아니요.”
지화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종문 부장님, 죄송하지만 급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찾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고 싶지만 급한 일이라네.”
우종문이 미안하다는 듯 지화자를 향해 웃어주고는 유은영에게 말했다.
“엘리자베스 윌던 씨께서 귀국을 오전으로 앞당겼네. 바로 지금 엘리자베스 윌던 씨께서 있는 곳으로 가야할 것 같은데 괜찮겠나?”
“네! 완전 괜찮아요!”
유은영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유은영 씨, 돌아와서 이야기 나눠요.”
유은영이 어색하게 웃고는 곧장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부장님, 나이스 타이밍!’
유은영은 속으로 한껏 좋아하면서 안심했다.
그때, 유은영과 함께 사무실 밖으로 나온 우종문이 그녀에게 물었다.
“유은영과 무슨 일 있었나?”
“네? 아아, 아니요! 그냥 제가 어제 다친 게 걱정되는 모양이더라고요.”
유은영이 멋쩍게 뺨을 긁적이고는 말했다.
“제가 나중에 잘 말할 테니 신경쓸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우종문이 싱긋 웃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게.”
“네, 부장님.”
유은영이 우종문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우종문은 수고하라면서 걸음을 옮겼다.
“아, 잠깐. 나 면허 없는데?”
그 사실을 우종문이 사라진 뒤에야 깨달은 유은영이었다.
어쩌면 좋으려나 고민하는데.
“지화자 팀장님.”
면허가 있는 웬 남자가 뒤에서 자신을 불렀다.
“옵……!”
유은영이 황급히 말을 바꿨다.
“크흠, 흠. 유승민 씨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입니까?”
“지화자 팀장님께 볼 일이 있었는데.”
유승민이 ‘지화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싱긋 웃었다.
“나중에 뵙고, 지금은 오붓하게 단 둘이서 드라이브나 할까?”
“드라이브?”
“어차피 엘리자베스 윌던 씨께 가야하잖아. 그렇지만 우리 은영이는 면허가 없는데…….”
유승민이 목소리의 끝을 흐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유은영이 그가 보이는 웃음에 얼굴을 구기고는 씩씩거렸다.
“차까지 어서 안내해!”
“당연히 그래야지.”
유승민이 싱글벙글 웃으며 ‘지화자’와 함께 길을 나섰다.
남매는 곧장 엘리자베스 윌던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향했다.
“은영아, 분명 어제 원래대로 몸이 돌아오지 않았었니?”
“그랬지.”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랑 지화자 씨, 두 사람 중 한 명이 가사상태에 빠지면 원래의 몸을 되찾는 것 같더라고.”
“그래?”
유승민이 두 눈을 빛냈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이상한 생각하지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우리 은영이가 그렇게 심통이 났을까?”
“뻔하지.”
유은영이 픽 웃으며 말했다.
“나랑 지화자 씨가 서로의 몸으로 돌아가는 걸 기다린 후, 지화자 씨를 영영 잠들게 만들 생각이겠지. 그럼, 나는 계속 내 몸으로 있을 테니까. 아니야?”
유승민은 대답대신 웃는 걸 선택했다.
“오빠가 지화자 씨를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유승민이 키득거렸다.
“하지만 우리 은영이 많이 똑똑해졌는데? 오빠 생각도 꿰뚫어보고 말이야.”
“진짜 그럴 생각이었다고?!”
“응,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서 그냥 생각으로만 그치기로 했어. 그보다 도착했어, 은영아.”
끼익, 멈춘 차에서 유은영이 곧장 내렸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유은영은 엘리자베스 윌던과 이야기를 나눈 후 유승민의 차에 다시 올라탔다.
“공항까지 가자.”
“우리 은영이, 많이 뻔뻔해졌네?”
“지화자 씨께서는 뻔뻔한 것으로 따지면 세상에서 제일이거든.”
유승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동생이 안 좋은 걸 배우고 말았다. 어쨌거나 그는 유은영을 공항까지 태워줬고, 그녀는 덕분에 엘리자베스 윌던의 배웅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지화자 팀장, 그동안 고마웠네. 덕분에 방한 일정을 무사히 끝마쳤군.”
“아닙니다, 엘리자베스 윌던 씨. 가시는 길 편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렌치니 윌던 씨와 마리사도요.”
로렌치니 윌던은 그새 마리사에게 치료를 받은 모양이었다.
상처라고는 하나 없이 깔끔해진 얼굴에 유은영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너, 이……!”
“로렌치니.”
엘리자베스 윌던이 조카를 나지막하게 부르고는 말했다.
“그만 가자꾸나. 그럼, 이만.”
유은영이 우아하게 몸을 돌리는 엘리자베스 윌던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렇게 그녀가 공항 안쪽으로 제 일행들과 사라진 후.
“후우, 드디어 저 낯짝을 안 봐도 되겠네.”
유은영은 안심했다.
참고로 유은영이 가리킨 낯짝의 주인은 로렌치니 윌던이었다.
“두 번 다시는 안 만났으면!”
유은영이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고는 공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승민의 차를 얻어탄 후 센터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국가 넘버, 82.
서울특별시 마포구 와우산로 94 게이트 생성 예정입니다.
예상 정보를 전달해드립니다.
Type: 타임 브레이커
Lank: B급
게이트 생성 예정 시간을 아래와 같이 전달해드립니다.
20■■. 12. 24.
PM 00: 00―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스템 창에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마포구라면 조수현 팀장님네 담당이지?”
B급이면 길드들과 협조를 하려나? A급 이상부터 그런다고 했으니까 아니려나?
그때,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가하성 씨? 무슨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라 팀장님. 조금 전에 나타났던 A-Index의 안내창 확인했나요?
“네, 확인했어요.”
―그것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협조 요청이 와서요.
“협조 요청이라니, 누구한테요?”
―조수현 팀장님한테서요.
유은영이 미간을 좁혔다.
―조수현 팀장님께서 저희 0팀과 함께 게이트를 공략했으면 한다고 연락을 주셨어요.
“아니, 왜요?! 죄송하지만 곤란하다고 해주세요! 그날 다른 게이트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어자치 자정에 열리는 게이트니,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시던데요?
가하성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물론, 크리스마스 이브날 자정을 살짝 넘긴 시간에 게이트가 나타난다거나 하면 곤란하게 될 테지만요.
그 말에 유은영이 벅벅 머리를 긁고는 말했다.
“일단 가서 이야기해요.”
―네, 알겠습니다.
유은영이 뚝 전화를 끊고는 주저 앉았다.
“은영아? 왜 그러고 있어?”
“오빠…….”
유은영이 자신을 찾으러 온 유승민을 향해 울먹였다.
“어떡하지? 나 X된 것 같아.”
유승민이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입가를 가렸다.
우리 은영이가 입에서 저런 상스러운 말을 내뱉다니! 분명 그녀 옆의 지화자로부터 옮긴 것일 터!
유승민은 지화자에 대한 분노를 더욱 불태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앞날이 암단한 유은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