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저 질문이 왜 안 나오나했더니.
지화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모른다고 했잖아.”
그 말에 유은영이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이대로 영영…….”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영영 돌아가지 않으면 어쩌죠?”
“어쩌기는 뭘 어째.”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언니는 ‘지화자’로, 나는 ‘유은영’으로 살아야겠지.”
“싫어요오!”
“그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예상한 대답이었다는 듯, 지화자는 픽 웃었다.
그야, 뻔했다.
누가 자신의 몸으로 살아가고 싶겠는가?
그것도 전 국민에게 사랑받던 제 언니를 죽여 그 자리를 강탈한 살인범의 몸으로 말이다.
지화자가 그렇게 자조적으로 웃고 있을 때,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지화자 씨가 제 몸으로 살아가면 맨날 폐급이라고 멸시 받을텐데, 절대로 안 돼요!”
“…언니가 그런 소리 듣는 건 상관없고?”
“네!”
유은영이 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각성한 후부터 매번 듣는 소리였으니까아 상관없어요오. 그치만!”
유은영이 자신의 몸을 향해 검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그렇지만 지화자 씨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야해요!”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기는 하잖아.”
“둘 중 한 사람이 가사상태에 빠지는 거예요?”
“그래.”
지화자의 대답에 유은영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장난해요?! 그렇게 돌아간 몸으로 좋아할 것 같아요?”
“내가 차지하고 있는 언니의 몸이 가사상태에 빠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나봐?”
“네! 저는 폐급 힐러니까요!”
우렁찬 대답이 듣기 좋았지만 그 뿐이었다. 지화자가 유은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했다.
“폐급 아니야.”
“네?”
“폐급 아니라고.”
유은영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지화자를 쳐다봤다.
“알고 싶으면 술 좀 깨. 술깨고 이야기해줄게.”
“치사해애!”
유은영이 코를 한번 훌쩍이고는 손을 들어 마른 세수를 한 번 했다. 그런 후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지화자에게 말했다.
“유은영 씨,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술 좀 더 깨고 들어갈게요.”
‘유은영’이란 이름을 부른 건, 곧 누군가의 인기척을 유은영이 느꼈다는 것.
지화자가 곧장 걱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팀장님, 혼자 있어도 괜찮으시겠어요?”
“네에, 괜찮아요!”
유은영이 활짝 웃었다. 지화자는 고민하는 듯 하다가 알겠다면서 몸을 돌렸다.
“아, 잠깐만요!”
그런 그녀를 유은영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라이 씨랑 리아 씨가 고기 다 먹지 못하게 해주세요!”
그 말에 지화자가 기가 차다는 듯 유은영에게 물었다.
“그렇게 먹고도 들어갈 곳이 남아 있어요?”
“있으니까 이러죠!”
그 말에 지화자가 픽 웃었다.
“네네, 알겠습니다. 그럼, 적당히 있다가 들어오세요.”
“네엡!”
유은영이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휴대폰을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유은영 씨, 들어갔습니다. 로렌치니 윌던 씨.”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거리고 있는 곳을 향해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유은영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 놓고는 말했다.
“당신과의 볼 일은 모두 끝난 것으로 아는데, 여기까지 무슨 일입니까?”
“빚진 걸 갚아주려고 왔지!”
어둠 속에서 뜀박질 소리가 들리더니 곧 유은영의 앞에 웬 남자가 나타났다.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주먹을 가볍게 잡아낸 유은영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주먹이 아닌 돈으로 갚아주시면 감사하겠는데요. 안에서 작게 회식을 하고 있는데 밥 값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 이익……!”
로렌치니 윌던이 부들부들 떨다가 다리를 들었다.
퍽!
유은영이 날아든 발길질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우당탕.
고깃집 앞에 쌓여있던 가자재와 함께 유은영이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었다.
로렌치니 윌던은 그대로 ‘지화자’의 위에 올라타서는 그녀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버려! 감히 나한테 이런 치욕을 안겨주다니!!”
퍽, 퍼억!
유은영이 가만히 그에게 맞고 있다가 바닥에 쓰러져있는 것을 주워들고는.
“아악!”
곧장 로렌치니 윌던을 향해 휘둘렀다.
로렌치니 윌던이 뺨을 붙잡고는 비명을 질렀다.
유은영은 그대로 그를 밀쳐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먼지 묻은 옷을 탈탈 털었다.
“그러게 수준을 알았어야죠.”
“뭐?”
“네 수준을 알았어야한다고.”
그 말은 유은영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랬다면……!”
지화자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았을 테다.
유은영은 다시 ‘지화자’의 몸에 돌아갔을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었다.
그런데 지화자는 아랑곳하지 그 고통을 감내하며 눈앞의 남자와 싸웠었다.
까드득.
유은영이 이를 갈며 봉을 꺼내 쥐었다.
“빚진 걸 갚아주러 왔다고 했죠? 그 빚, 저도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당신한테 갚아주면 될까요?”
유은영이 로렌치니 윌던을 향해 무기를 치켜들 때.
“지화자 팀장님! 그만두십시오!!”
그녀를 막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렌치니 윌던 씨,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요!”
“다친 곳은 있지만 괜찮아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로렌치니 윌던이 아니었다.
‘지화자’가 꺼내든 봉을 사라지게 만들고는 난데없이 나타난 남자에게 물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요, 조수현 팀장님?”
현장 관리 부서 1팀의 팀장, 조수현이 로렌치니 윌던의 뺨에 손수건을 대고는 황급히 대답했다.
“우종문 부장님께서 부탁하셨습니다! 지화자 팀장님께 곧 위험해질 거라면서요!”
“그래서요?”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안 받으셔서 찾아다녔더니!”
조수현이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지화자’를 향해 소리 질렀다.
“함부로 민간인에게 힘을 휘두르면 안 된다는 것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로렌치니 윌던 씨께 상처를 입히다니요!”
“로렌치니 윌던 씨께서는 S급 각성자인데요? 그것도.”
유은영이 와이셔츠의 단추를 위에서 조금 풀고는 오른쪽 어깨를 내렸다.
“제 몸에 상처를 낼만큼 아주 대단한 각성자시죠.”
조수현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그리고 생각건대 우종문 부장님께서 말씀하신 위험이 바로 로렌치니 윌던 씨일 것 같네요.”
유은영이 그렇게 말하고는 바지 주머니 안쪽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유은영 씨, 들어갔습니다. 로렌치니 윌던 씨. 당신과의 볼 일은 모두 끝난 것으로 아는데, 여기까지 무슨 일입니까?
―빚진 걸 갚아주려고 왔지!
그 다음 들리는 건 로렌치니 윌던이 유은영을 향해 깽판을 치는 소리들이었다.
로렌치니 윌던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어, 언제 녹음을!”
유은영이 녹음을 멈추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유은영 씨께서 고깃집으로 들어가신 후에 휴대폰을 잠깐 만졌거든요. 제가 당신이 온 걸 모르고 있을 줄 알았습니까?”
유은영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찾아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녹음을 가지고 재미난 상황을 연출하라면 정말 잘 연출할 수 있거든요.”
예를 들면 윌던 기업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상황이라거나 그런 것들을 말이다.
“그러니까.”
유은영이 성큼, 로렌치니 윌던 앞에 서서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만 가시죠? 빚은 청산을 다 하신 것으로 알 테니까요.”
조수현이 멍하니 있다 ‘지화자’의 말을 거들었다.
“로렌치니 윌던 씨, 엘리자베스 윌던 씨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실 겁니다.”
“젠장! 젠장!!”
로렌치니 윌던이 분하다는 듯 몇 번이고 욕설을 내뱉고는 유은영에게 소리 질렀다.
“밤길 조심해, 너!”
“진부한 멘트 날릴 시간에 꺼져주시죠? 마침, 집나간 조카 분을 데리러 온 보호자께서 찾아오신 것 같으니까요.”
끼이익!
골목길을 빠르게 내달리던 고급 세단이 그들의 앞에 멈춰섰다.
“로렌치니!”
“고모님?!”
“너, 이……!”
고급 세단에서 내린 엘리자베스 윌던이 제 조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쫘악―!
그대로 로렌치니 윌던의 뺨을 때려버렸다. 지화자에 의해 피가 흐르고 있던 그의 뺨에 말이다.
“고, 고모님.”
“언제 정신을 차릴 생각이냐? 지화자 팀장에게 그렇게 당해 놓고도 찾아올 생각이 들든?!”
엘리자베스 윌던이 험악하게 말을 쏟아냈다.
“이탈리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오르고 싶다고 했지? 오냐, 그렇게 만들어주마.”
엘리자베스 윌던이 손수건을 들어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마자 너보다 높은 랭커들과의 결투를 준비해났다. 네 힘으로 어디 한번 올라가보도록 해라. 그 전까지!”
윌던 기업을 이끌고 있는 노련한 여자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윌던 기업의 후계자 자리에서 너를 박탈한다.”
“고모님!”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어서 차에 타도록 하거라.”
로렌치니 윌던이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엘리자베스 윌던이 그가 차에 올라탄 것을 확인하고는 지화자에게 말했다.
“지화자 팀장, 곤란한 상황을 겪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엘리자베스 씨.”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조수현 팀장님께서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주셔서요. 서로 얼굴 붉힐 일은 다행히도 없었답니다.”
얼굴 붉힐 일이 없었기는!
엘리자베스 윌던은 아직 손에 묻은 핏물을 쳐다보고는 억지로 입고리를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럼, 내일 보도록 하죠.”
“네, 엘리자베스 윌던 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여자의 모습에 엘리자베스 윌던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조카가 무사하다는 것에 스스로를 위안하며 휙 몸을 돌려 고급 세단에 올라탔다.
그녀가 타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유은영은 고급 세단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조수현 팀장님도 이만 돌아가시죠? 우종문 부장님께는 제가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조수현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침울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이다.
‘괜히 신경 쓰이게!’
유은영이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는 물었다.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그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대답이 날아들었다.
“죄송합니다.”
“네?”
유은영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죄송하다니? 갑자기 뭐가?’
다행히도 그녀의 의문은 금방 해소됐다.
“로렌치니 윌던 씨께서 지화자 팀장님을 공격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로요. 도대체 언제 로렌치니 윌던 씨께서.”
“저를 공격했냐고요?”
유은영이 조수현의 말을 끊고는 미소를 그렸다.
“우종문 부장님께 물어보세요. 그 현장에 있었으니까요.”
“네?”
“그럼, 저는 이만.”
“저, 잠깐! 지화자 팀장님!”
조수현이 그녀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 다급하게 불렀지만, 유은영은 대답하지 않고 고깃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지화자 팀장님…….”
조수현이 닫힌 문에 입술을 달싹이다가 두 손을 꽉 쥐었다.
“화자야.”
그녀의 앞에서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