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거짓말! 내가 졌다니!!”
“로, 로렌치니 씨…….”
“아니지? 아니라고 해, 마리사!”
로렌치니 윌던이 파트너로 데리고 온 마리사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섣불리 그렇다고 대답했다가는 눈앞의 남자가 어떻게 폭발할지 몰라서였다.
하지만 침묵은 긍정이라고, 로렌치니 윌던은 제 분에 못 이겨 폭발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그 X같은 년이!”
로렌치니 윌던이 지화자를 한껏 욕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렌치니 씨! 아직 움직이시면 안 돼요!”
마리사가 그를 황급히 다시 눕히려고 했지만.
“저리 비켜!”
“꺅!”
A급이라고 해도 힐러.
건장한 체격의, 그것도 S급 각성자의 힘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마리사는 로렌치니 윌던에게 내동댕이쳐져 테이블과 함께 우당탕 넘어지게 되었다.
“으윽.”
마리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문이 열렸다.
“마리사, 무슨 소란이니?”
조금 전까지 마리사와 함께 로렌치니의 곁을 지키고 있던 엘리자베스 윌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세상에, 마리사!”
“에, 엘리자베스 님.”
엘리자베스 윌던이 황급히 마리사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니?”
“네, 괘, 괜찮은데, 그게, 로렌치니 씨께서…….”
마리사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일어나자마자 자신이 진 것이 확실하냐면서 몇 번이고 물으시다가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뭐라?! 이 망아지 같은 녀석이! 기어코 사고를!”
지화자로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은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제 착각이었나 보다.
엘리자베스 윌던이 까드득 이를 갈고는 복도에 서 있던 경호원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지금 당장 로렌치니 윌던을 잡아 오도록 해라!”
경호원들은 모두 각성자들이었지만, 그들 중에서 로렌치니를 압도할 수 있는 실력자는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어서!!”
상사가 명령을 내리면 따르는 게 직장인 국룰이었다.
경호원들이 황급히 고급 호텔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엘리자베스 윌던이 휴대폰을 들었다.
로렌치니 윌던이 분을 삭히고자 바깥으로 나간 것은 아닐 테다.
‘지화자 팀장에게 다시금 결투를 신청하러갔겠지! 그 어리석은 망아지 녀석이!’
엘리자베스 윌던이 초조한 듯, 손톱을 물을 때였다.
―엘리자베스 윌던 씨?
“아아, 우종문 부장? 미안하지만 지 팀장에게 연락 좀 해줄 수 있을까?”
―무슨 일입니까?
“내 조카 녀석이…….”
후우, 엘리자베스 윌던이 깊게 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로렌치니가 패배한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지화자 팀장을 찾으러 간 것 같아서 말이네.”
***
퇴근 시간을 진작 넘긴 깊어진 밤이었으나 현장관리 부서의 부장실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아아, 물론이지요, 엘리자베스 윌던 씨. 조카분의 행방을 찾으면 바로 알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종문은 그러고도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전화를 끊었다.
“후우, 앞뒤 분간도 못 하는 녀석이 윌던 기업의 후계자라니. 여러모로 걱정이 많겠군.”
작게 한숨을 내쉰 우종문이 싱긋 웃으며 눈앞에 서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나, 조수현 팀장?”
우종문이 전화를 받기 전, 조수현에게 받았던 보고서를 확인하며 말했다.
“아직도 있을 줄 몰랐다네.”
“죄송합니다, 부장님. 나가봐도 좋다는 소리가 없으셔서…….”
“괜찮네.”
다행히도 중요한 대화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수현이 안심하면서도 우종문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지화자 팀장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아아, 그게 말이지.”
우종문이 확인하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넣고는 싱긋 웃었다.
“조수현 팀장, 지 팀장에게 연락 좀 해줄 수 있을까?”
“…지화자 팀장에게 말입니까?”
“그래. 곧 지 팀장에게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그러네.”
그 말에 조수현이 곧장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우종문이 흐뭇하게 웃었다.
***
조수현이 ‘지화자’에게 연락을 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야.
“우와! 고기다, 고기!”
“리아 씨, 천천히 드셔요.”
다시 ‘지화자’의 몸에 들어가 있는 유은영이 삼겹살을 굽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소는 지화자가 추천한 아는 사람만 아는 고깃집.
그 덕분에 ‘지화자’를 알아보는 사람도 몇 없었다.
어쨌거나 유은영은 라이와 리아, 그리고 지화자와 함께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리아, 라이. 고기 차고 넘칠 정도로 많으니까 급하게 먹지 마.”
“네에!”
리아와 라이가 사이좋게 쌈을 한가득 싸고선 입 안에 집어넣었다.
“어때요?”
“진짜 맛있어! 그치, 오빠?”
“응!”
라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앉아있는 ‘유은영’에게 물었다.
“유은영 누님, 그거 안 먹으면 제가 먹어도 돼요?”
“그러시던가.”
“앗싸!”
라이가 해맑게 웃으며 유은영 몫의 쌈무를 제 앞으로 가져왔다.
“오빠, 나도!”
“리아. 너는 지화자 팀장님이랑 나눠먹어. 괜히 라이 거 뺏어 먹지 말고.”
“싫어!”
리아가 빽 소리 질렀다.
“어차피 이거 다 먹으면 한 번 더 달라고 하면 되잖아?”
맞는 말이었다.
“그래, 네 혼자 다 먹어.”
“웅!”
“남기면 알지?”
“몰라!”
리아가 그렇게 대답하고는 상추 위에 쌈무를 올려놓고 열심히 쌈을 싸기 시작했다.
유은영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잘 구워진 삼겹살을 먹기 좋게 잘랐다.
그때였다.
“지화자야, 지화자야.”
“네?”
“여기! 이거 내가 쌈 싼 거!”
유은영이 놀란 눈으로 아이에게 물었다.
“저 주시는 거예요?”
“응!”
리아의 고갯짓에 유은영이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리아 씨.”
리아는 손수 유은영의 입에 자신이 직접 싼 쌈을 넣어주었다.
유은영은 기분 좋다는 듯 헤실거리며 열심히 쌈을 씹어먹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크흡, 흡!”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매운맛이 콧구멍을 통해 빠져나갔다.
“…지 팀장님, 괜찮으세요?”
“괜찮, 쿨럭! 크흡! 흡!”
말을 하려고 하자 입 안쪽이 따가웠다. 혀도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유은영이 손부채질을 한 후 어렵게 물었다.
“리아, 씨. 고기랑 같이 뭘 넣은, 쿨럭, 거예요?”
“고추! 청양고추!”
“몇 개, 크흡, 나요?”
“으음, 몰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해서 최대한 많이 넣었어!”
“끄흡.”
유은영이 쇄골 아래를 두드리며 콜록거렸다.
“…지화자야, 맛없었어?”
“아니, 아니에요. 맛있, 맜있었어요. 정말로요.”
“그래? 그럼 한 번 더 쌈 싸줄래! 잠깐만 기다려봐!”
“아니요! 괜찮아요!”
유은영이 황급히 리아를 말렸다.
“저는 괜찮으니까 유은영 씨께 쌈을 싸주시는 게 어떨까요?”
“괜찮습니다.”
리아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지화자가 재빠르게 말했다.
“저는 누가 손댄 음식 먹는 거 싫어해서요.”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간다 싶었다. 결국, 유은영은 한 번 더 리아가 싸주는 쌈을 먹게 됐고.
“쿨럭!”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잔기침을 터트리게 됐다.
“지화자 팀장님, 여기 물이요.”
“아, 아니요. 이건, 이건 물로 해결될 맛이 아니에요.”
“…그거 맛없다는 소리야?”
올망졸망 자신을 쳐다보는 리아의 눈빛에 유은영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게, 소주! 그래요, 소주를 부를 정도로 맛있다는 소리예요!”
“그렇구나! 지화자야, 소주는 술이지?”
“네? 네, 맞아요.”
유은영의 대답에 리아가 활짝 웃었다.
“할아버지가 그랬어! 술 한 잔을 부르는 음식이 진정으로 맛있는 음식이라고!”
세상에, 우종문 부장님! 도대체 애한테 뭘 가르쳐주신 거예요?!
유은영은 진심으로 그렇게 소리쳐 묻고 싶었다. 우종문이 이 자리에 없는데도 그랬다.
유은영이 소주로 입 안의 매운맛을 달랠 때, 지화자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리아, 부장님께서 사는 데 있어 좋은 거 가르쳐주셨네?”
왜인지 모르게 신난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유은영이 단번에 소주잔을 비우고는 지화자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요. 그냥 뭔가 괘씸해서요.”
“괘씸하다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그보다 팀장님.”
지화자가 빈 잔에 술을 따르려던 유은영의 행동을 저지했다.
“오늘 안 그래도 험한 일을 많이 겪으셨는데 음주 적당히 하세요.”
“한 잔밖에 안 마셨거든요?”
유은영이 그렇게 말하고는 빈 잔에 기어코 술을 다 따랐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 단지, 유은영이 잇몸을 만개하며 말했다.
“자, 건배해요!”
“건배?”
라이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은영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유리잔끼리 부딪치는 거예요. 여기, 테이블 가운데에서요.”
“오오!”
라이가 입술을 오므렸고 리아는 자신의 잔을 번쩍 들었다.
“유은영아, 나도 술!”
“애가 술은 무슨 술이야? 음료수나 마셔.”
그 잔을 지화자가 빼앗았다. 리아가 그녀를 향해 불퉁하게 입술을 씰룩였다.
“왜? 왜 술 안 되는데?!”
“법이 그런 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불만이면 국회 가서 법 좀 개정해달라고 해.”
“국회?”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너는 음료수나 마시세요.”
지화자가 미리 시켜둔 사이다를 리아의 잔에 한가득 부어줬다.
그렇게 모두의 잔이 채워졌다.
모두라고 해봤자, 가하성과 하태균이 빠진 자리였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유은영은 외쳤다.
“자, 그럼 짠합시다!”
“와아아! 짠!!”
리아와 라이가 환호성을 내지르며 유은영과 지화자의 잔에 자신들의 잔을 부딪쳤다.
***
고깃집에서 시작된 0팀의 작은 회식은 끝날 줄은 몰랐다.
“있자나요오. 가하성 씨랑 하태균 씨도 부를까요오?”
“아니요.”
지화자가 짜게 식은 얼굴로 취기가 잔뜩 달아오른 제 얼굴을 쳐다봤다.
“아하하하! 지화자 얼굴 진짜 빨개! 사과처럼 익었어!”
“누님, 한 잔 더 마셔봐요!”
라이가 유은영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줬다. 유은영은 좋다면서 헤실거렸다.
‘좋기는 뭐가 좋아?’
골치 아파 죽겠다. 지화자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짧게 혀를 찼다.
그 와중에 유은영은 라이한테 받은 술을 입에 홀짝이려는 중이었다. 그 꼴을 가만히 볼 수가 없어 지화자는 말했다.
“지화자 팀장님. 이리 주세요.”
“오오? 마시나요? 저 대신 마셔주는 건가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뭐라는 거야?
유은영 몫의 술을 그대로 자신의 잔에 버리려던 지화자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지화자가 자신을 쳐다보거나 말거나 유은영은 아이들에게 단어 하나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리아 씨이, 라이 씨이. 바로 저 유, 그래. 유은영 씨가 저대신 술을 마셔주는 걸 흑장미라고 하는거예요!”
애들한테 좋은 거 가르쳐준다.
“흑장미?”
“그으래에요. 참고로 흑기사는 남자가 나대신 술마셔주는 거!”
“그렇구나!”
그렇구나는 뭐가 그렇구나야!
“지 팀장님,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그만 일어나죠?”
“안 돼! 고기 남았어!”
“맞아요오! 고기! 맛있는 꼬기!”
리아의 말에 유은영이 한껏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날 수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취하면 저렇게 추한 모습이라고?’
그럴 리가 없었다.
지화자는 자신이 소주 반 병도 비우지 못한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다.
주량을 넘기는 순간, 속이 울령거리면서 자꾸만 눈이 감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대로 두 눈 꼭 감고 자버리는 게 자신의 주정이었다.
“이모니임! 여기 삽겹살 7인 분 더 추가요오!”
“아이고! 다 먹을 수 있겠어요? 지금 그쪽 테이블 15인분은 족히 넘었는데!”
“먹을 수 있어요! 그쵸, 리아 씨이? 라이 씨이?”
“응!”
“네!”
라이와 리아의 대답에 유은영이 우렁차게 외쳤다.
“그렇다고 하네요!”
지화자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어? 갑자기 왜요?”
“잠깐만 일어나보세요.”
유은영과 함께 말이다.
“이모님, 죄송하지만 고기 좀 대신 구워주실 수 있을까요? 일행이 많이 취한 것 같아서 바람 좀 쐬게 해주려고요.”
“물론이죠. 애들은 걱정말고 다녀와요!”
“감사합니다. 라이, 리아. 둘 다 얌전히 있어.”
“네에!”
“응!”
라이와 리아가 고기를 한가득 입에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지화자는 유은영을 가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후우…….”
유은영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 갑자기 불어온 겨울 바람에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우우, 추워어.”
“추위를 느끼는 걸 보니까 술이 조금씩 깨고 있나봐?”
“우움, 유은영 씨?”
“는 언니고.”
지화자가 유은영의 말을 고쳐주고는 말했다.
“주변에 사람 없어.”
“정말요오?!”
유은영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뭐가 그리 좋은지 배시시 웃으며 고깃집 계단에 주저앉았다.
“일어나. 옷 구겨져.”
“싫어요.”
유은영이 뚱하게 그리 말하고는 입을 열었다.
“지화자 씨. 우리 정말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언제 웃었냐는 듯, 온갖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