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사실, 유은영은. 아니, 지화자는 전혀 괜찮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유은영 역시 그랬다.
기껏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나 싶었더니만.
‘시발.’
다시 바뀌고 말았다.
지화자가 뒷목을 꾹꾹 누르고는 이혜나에게 말했다.
“이혜나 팀장님, 그렇게 있지만 말고 저희 팀장님 좀 봐주실래요? 내상을 좀 심하게 입으셔서요.”
“아…! 그래야지, 참……!”
이혜나가 황급히 정신을 차린 후 물었다.
“지화자 팀장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보여요?”
라고 지화자가 유은영의 얼굴로 날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 말에 이혜나가 빽빽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유은영’의 상태 역시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아 너그럽게 넘어 가기로 했다.
대신 그녀는 곧장 ‘지화자’의 상태를 살폈다.
0팀의 전담 어시스트 힐러로 간 ‘유은영’의 말대로 내상을 꽤 심각하게 입은 것 같았다.
‘게이트 공략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다친거람?’
덕분에 룰루랄라 신나게 퇴근하던 와중에 다시 직장에 돌아오게 됐다.
하지만 눈 앞의 여자에게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는 일.
“바로 치료 시작할게요.”
이혜나는 곧장 ‘지화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좀 어떠세요?”
후우, 작게 숨을 내쉰 유은영이 덥썩 이혜나의 손을 잡았다.
“지, 지화자 팀장님?”
“팀장님을 다시 보게 됐어요.”
“네?”
“이혜나 씨를 다시 보게 됐다고요! 지금까지 운좋게 A급 힐러로 각성한 주제에 사람 참 많이 무시한다 싶었더니!”
“제,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세요?!”
이혜나가 잔뜩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그때 지화자가 이혜나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유은영의 손을 억지로 풀어내면서 말했다.
“이혜나 팀장님께서 양해해주세요. 지화자 팀장님의 상태가 보다시피 많이 안 좋거든요.”
그렇게 보이기는 했다.
“그보다 치료 다 끝났으면 이만 가보시죠? 퇴근하던 와중에 불려온 거 아닌가요?”
“응? 아, 맞기는 한데.”
이대로 가도 되는 건가?
이혜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저 재수탱이의 머리를 검사해봐야할 것 같은데.’
당연히 ‘재수탱이’는 0팀의 팀장, 지화자를 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혜나는 간호 관리 부서에서 같이 일하며 은근히 따돌렸던 ‘유은영’의 말을 듣기로 했다.
“은영 씨, 지화자 팀장님 상태 악화되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네.”
“0팀의 전담 어시스트 힐러가 됐다고 우쭐대려고 하지말고 곧바로 연락해야한다고.”
“알겠……!”
거듭되는 강조에 울컥 목소리를 높였던 지화자가 억지로 미소를 그렸다.
“알겠어요. 팀장님 말씀 꼭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말고 편한 마음으로 다시 퇴근하셔요.”
지화자는 웃는 낯으로 이혜나를 손수 사무실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걱정 가득한 팀원들을 둘러 보고는 그들 중에서 특히나 걱정이 많은 두 사람에게 말했따.
“라이, 리아. 할 일 없으면 이혜나 팀장님 좀 배웅해줄래?”
“지화자는?”
“괜찮아.”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라이와 리아는 사무실 안에 들어가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아줌마, 따라오세요.”
“맞아, 따라와.”
“아줌마?!”
순순히 ‘유은영’의 말을 듣기로 했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이혜나를 손수 센터 밖까지 배웅해주기 위해 길을 나섰다.
제일 걱정 많은 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가하성과 하태균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행동을 지화자가 막았다.
“가하성 씨, 하태균 씨. 죄송하지만 아직 들어오지말아 주실래요?”
“왜요?”
가하성이 왜 막느냐는 듯 짜증이 난 얼굴로 ‘유은영’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지화자가 싱긋 웃었다.
“지화자 팀장님께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라서요. 아시겠지만 팀장님 옷에 피가 많이 묻어버렸잖아요?”
그 말에 할 말을 잃은 가하성이었다. 지화자는 그를 향해 ‘어디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와봐’라는 시선을 보낸 후 말했다.
“그럼, 지화자 팀장님께서 옷 다 갈아입으시면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그렇게 문을 닫고 사무실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유은영이 우물거리며 물었다.
“지화자 씨, 여벌 옷 없잖아요.”
“있어.”
지화자가 언제 가져와 뒀는지 모를 옷을 유은영에게 던져줬다.
“입어.”
“윽… 정장…….”
지화자가 유은영에게 던져준 옷은 정장이었다.
“매일 입는 거잖아. 왜 그렇게 질색해?”
“오늘만큼은 편한 차림으로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요.”
“어차피 집에 돌아가면 편한 차림으로 있게 되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윌던의 방한 일정이 공식적으로 끝난 날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조카와 결투를 치른 날이었다.
또한, 유은영이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결투의 상대였던 로렌치니 윌던에게 그녀가 처참하게 짓밟힌 날이기도 했고.
‘그리고 갑자기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지화자 씨와 몸이 뒤바뀌고 말았지.’
어쨌거나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난 날이었다. 그런데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정장으로 갈아입고 퇴근해야 한다니!
유은영은 문득 지화자의 옷장에 걸려있는 수십 벌의 정장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밋밋한 검은색 정장들 뿐이었던 옷장.
“지화자 씨, 우리 주말에 쇼핑 나갈래요?”
“이혜나가 능력이 꽤 많이 좋나 보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더니 태연하게 쇼핑을 가자는 소리를 하다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텐데?”
맞는 말이었다.
지화자는 원래의 몸을 찾은 후에도, 그리고 다시 몸이 바뀐 후에도 팀원들이 자리를 피하게끔 만들었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그 이유야 뻔했다.
‘원래의 몸을 되찾았다가 다시 바뀐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하니까 그러신거겠지.’
지금 중요한 건 바로 그거였다.
‘하지만 골치 아픈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싶은데.’
유은영이 시무룩하게 입술을 씰룩일 때였다.
“그래, 가자.”
“네?”
“주말에 쇼핑 나가자고.”
“저, 정말요?”
“응,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유은영이 우물쭈물거리다 지화자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나야 괜찮지. 언니야말로 괜찮겠어? 모자 푹 눌러쓰고 다녀야할텐데?”
그 말에 유은영이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상관 없어요!”
“좋아, 그럼 라이랑 리아 녀석 데리고 주말에 쇼핑 나가자.”
“네!”
유은영이 활짝 웃었다. 지화자는 미간을 좁혔다.
유은영은 자신의 얼굴로 그딴 식으로 웃지 말라는 소리가 들려올 줄 알고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하지만 다른 말이 들려왔다.
“그 전에, 언니. 우리 긴밀하게 나눌 이야기가 있지?”
윽,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언니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잠깐이나마 원래의 몸을 되찾은 이유는 알겠어요.”
지화자가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제가 지화자 씨의 몸으로 기절한 순간, 저는 제 몸으로 정신을 차렸어요.”
“그래, 나도 언니가 로렌치니 윌던에게 꼼짝없이 죽겠거니 싶을 때 내 몸으로 눈이 떠지더라고.”
지화자가 네가 기어코 내 몸으로 죽으려나 싶었구나 했다면서 키득거렸다.
“어쨌뜬 내 생각은 이래. 아마 언니가 생각하고 있는 이유랑 똑같겠지.”
지화자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중 한 명이 가사상태에 빠지게 될 때 잠깐이나마 원래의 몸을 되찾는거지.”
“그리고 그 상황이 벌어지게 된 원흉을 제거하면……!”
“다시 몸이 바뀌는 거지.”
지화자가 유은영의 말을 이으며 비딱하게 웃었다.
“불완전한 영혼석이고 하더니.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알아서 원래의 몸을 되찾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그럼, 어쩌죠? 저희 정말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요?”
“그러기를 바라야지. 그보다 어서 입기나 해.”
“안 그래도 그럴 거예요.”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새 것이나 다름없는 와이셔츠의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유은영 누님! 지화자 누님 아직 옷 안 갈아입었어요?”
“유은영아! 이혜나인지 뭔지 배웅해주고 왔어!”
벌컥, 문이 열리며 라이와 리아가 들어왔다.
“라이, 리아! 잠깐만! 함부로 들어가면 어떻게 해!”
그런 아이들을 붙잡고자 사무실에 들어왔던 하태균이 고장난 시계처럼 순간 삐그덕거렸다.
눈 앞에서 자신의 상사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하태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곧, 그는.
“죄, 죄송합니다악!!!”
하태균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쾅! 문을 닫아버렸다. 그 와중에 라이와 리아를 챙겨 나간 것이 용했다.
유은영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보였다. 그에 지화자가 말했다.
“네가 이해해. 하태균, 저 자식. 생긴 것과는 다르게 쑥맥이거든.”
“아하.”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단추를 마저 잠궜다. 그렇게 옷을 다 갈아입자마자 유은영은 사무실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다들 많이 기다렸죠?”
“지화자야!”
“누님, 괜찮아요?!”
리아와 라이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네, 다 나았어요. 애초에 그렇게 큰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암만 그렇다고 해도 0팀의 모두가 알았다. ‘지화자’가 입은 내상이 꽤 심했다는 것을 말이다.
로렌치니 윌던과 싸우는 내내 몇 번이고 피를 토해냈으니 알 수밖에 없었다.
가하성이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지화자 팀장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네,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걱정마시고 어서 퇴근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하태균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대답했다. 여전히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씩씩하게 대답한 하태균은 고장난 기계처럼 움직이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가하성이 그런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짐을 챙기기 위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태균 형님, 어디 아프세요? 지금 얼굴 엄청 빨개요.”
“더워서 그래! 더워서!”
“겨울 다 됐는데 더워요?”
“그래! 하하! 아하하! 하성아, 먼저 가보마! 지화자 팀장님, 유은영 씨! 먼저 가보겠습니다! 라이, 리아! 내일 보자!!”
하태균이 어색하게 인사하고는 쏜살같이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저도 이만 가볼게요. 내일 뵙겠습니다.”
가하성이 ‘지화자’에게 꾸벅거린 후 사무실을 나갔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가하성 씨? 깜빡하고 챙기지 못한 거라도 있나요?”
그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유은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팀장님, 몸 안 좋으시면 내일 그냥 푹 쉬세요.”
“괜찮아요. 그리고 가하성 씨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일 엘리자베스 윌던 씨만 배웅해주고 푹 쉴거예요.”
엘리자베스 윌던의 공식적인 방한 일정이 끝났다고 하나, 유은영은 ‘지화자’로 할 일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마세요.”
웃는 낯으로 말하는 목소리에 가하성이 뾰족하게 말을 내뱉었다.
“누가 걱정했다고 그래요? 괜히 업무 보겠답시고 출근하셨다가 쓰러지면 곤란할 것 같아서 말해본 거예요.”
그러고는 쾅!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으며 퇴근해버렸다.
‘내가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
유은영이 멋쩍게 뺨을 긁적일 때였다.
“지화자 팀장님께서 실수한 건 없으니까 너무 신경쓰지마세요.”
“네?”
“가하성 씨께서 싸가지 없는 거 알고 계셨잖아요?”
그보다 더욱 싸가지가 없는 사람이 바로 지화자 씨 아닌가요?
순간 유은영은 그렇게 물어볼 뻔 했으나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그보다 저희도 이만 가죠.”
“맞아, 지화자야! 빨리 가자! 고기랑 치킨 사준다고 했잖아!”
그 말을 내뱉었던 장본인인 지화자가 짧게 혀를 차며 물었다.
“리아, 너는 아픈 사람한테 얻어 먹고 싶어?”
“그치만 지화자가 다 나았다고 했는걸? 아니야? 혹시 우리한테 거짓말한거야?”
리아의 올망졸망 두 눈을 빛내며 유은영을 쳐다봤다. 거짓말을 한 거라면 당장 울 것처럼 말이다.
“아, 아니에요! 저 다 나았어요!”
유은영이 황급히 두 손을 내저은 후 말했다.
“고기 먹으러 가요!”
“치킨은?”
“고기 먹은 다음에 야식으로 먹어요.”
“좋아!”
리아가 헤실거렸다.
“오빠! 오늘 우리 엄청 많이 먹겠다! 그치?”
“그러게!”
라이도 헤실거리며 웃었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우다다 복도를 뛰어나가는 소리에 지화자가 짧게 혀를 차고는 유은영에게 말했따.
“언니, 애들 말 일일이 들어줄 필요 없어.”
“하하, 저도 먹고 싶어서 그래요. 삼겹살에 소주 한 잔 걸치고 싶거든요. 지화자 씨는 안 그러세요?”
“딱히? 나는 술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리고 언니는 지금 부상자야.”
“네네, 그랬지만 실력 좋은 우리 이혜나 팀장님 덕분에 다 나았다고요.”
“퍽이나.”
지화자가 픽 웃었다.
“그래서 대답은요?”
“그래, 가자.”
지화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유은영이 왜 술을 찾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많이 혼란스럽겠지.’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알아서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겠거니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둘 중 한 명이 가사상태에 빠지면 몸을 되찾게 된다.
즉, 그 말은 유은영은 정말 로렌치니 윌던에게 죽기 직전까지 갔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유은영은 분명 그 사실을 깨달았으리라.
그렇기에 지화자는 유은영에게 기꺼이 어울러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내가… 이 내가 졌다고……?”
지화자에게 흠씬 얻어 맞은 후, 개과천선할 줄 알았던 로렌치니 윌던이 정신 차리지 못할 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