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엘리자베스 윌던은 몇 번의 방한으로 지화자와 마주치며 그녀가 적당한 선을 아는 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조금 전의 그 말 역시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수준의 농담이란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화자는 결투로 누군가를 죽인 전적이 있는 각성자.
그것도 자신의 친언니를 죽였던 S급 각성자였다.
엘리자베스 윌던이 입술 안쪽을 꾹 깨물며 ‘지화자’를 노려봤다. 그 시선에 ‘지화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걸 걱정하는 것 같아서 말한 거였는데, 아무래도 괜한 참견이었던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저렇게 고개를 한껏 숙이며 사과하는데 화낼 도리가 없었다.
크흠, 엘리자베스 윌던이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아닐세, 나야말로 부탁하는 입장에서 너무 흥분했군.”
그러면서 그녀는 말했다.
“지화자 팀장, 적당히 봐주게.”
“당연하죠.”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윌던 일가와의 점심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후 일정은 엘리자베스 윌던이 한국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처를 돌아보는 거였다.
엘리자베스 윌던이 움직일 때마다 검은 차가 우르르 도로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뒤, 윌던 일가가 탄 차의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는 유승민의 차가 있었다.
유은영은 앞서 가고 있는 윌던 일가 경호원들의 차를 보며 구시렁거렸다.
“경호 인력을 저렇게 많이 데리고 왔으면서, 나는 도대체 왜 부른 거야?
“그게 관례니까.”
“관례?”
“응, VIP로 지정된 사람이 방한을 하면 무조건 국내 랭킹 1위가 경호를 맡는다.”
유승민이 말했다.
“지유화 님께서 랭킹 1위일 적 만든 관례야.”
그 말에 유은영이 픽 웃었다.
“지화자 씨께서 용케 그 관례를 안 부쉈네.”
“나름대로의 추모 아닐까?”
“추모?”
“그래, 암만 자기 손으로 죽인 언니라고 해도 그 언니가 만든 관례는 차마 부술 수 없던 거지.”
“오빠…….”
유은영이 탄식하듯 유승민을 부르고는 픽 웃었다.
“부여받은 성언이 여전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속을 내다볼 수는 없는 모양이구나?”
“으, 응?”
정곡을 찔린 유승민이 크게 당황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기도 전에 유은영이 재잘거렸다.
“지화자 씨께서 지유화 씨를 추모하고자 이 관례를 가만히 뒀다고? 그럴 리가.”
유은영은 그간 봐왔던 지화자를 떠올리며 말했다.
“지화자 씨는 그냥 센터 업무에서 빠질 수 있으니까 가만히 둔 거야. 분명해.”
그리고 유은영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 * *
‘지루해, 잠 와.’
오후 3시, 잠이 오기 딱 좋은 시간. 지화자는 기계처럼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한 달 전의 B급 게이트 보고서 작성 건으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유은영은 지금 다음달, 0팀의 예산을 짜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지화자’가 해야할 일이지만, 유은영에게 맡겼다가는 큰 일이 날 것 같아 그냥 자신이 하겠다고 했었다.
유은영은 흔쾌히 허락했다.
‘숫자 보기 지겨워서 옳다거니 그런 거겠지.’
유은영은 간호 관리 부서에 있을 적, 하루가 멀다하고 엑셀 작업을 했었다.
숫자라면 싫증이 났을 터.
‘그러니까 그렇게 좋다고 제발 나보고 해달라고 한 거겠지. 망할 언니 같으니라고.’
‘유은영’의 몸에 들어가기 전부터 자신이 해오던 일이지만, 왜인지 모르게 싫증이 났다.
‘아, 언니 부럽다.’
지금쯤 귀빈 경호랍시고 할 일 없이 도로를 내달리고 있겠지. 아님, 그냥 밖에서 광합성을 하고 있거나.
지화자가 그렇게 화면 속 숫자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쉴 때.
“은영 누님!”
“유은영아!”
라이와 리아가 그녀에게 달려와 지루함을 날려줬다.
“저희 보고서 어때요? 잘 작성했어요?”
“맞아! 우리 보고서 잘 작성했는지 좀 봐줘! 하성이 오빠랑 태균 오빠가 유은영, 네가 보고서 작성에서는 제일이라고 했어!”
지화자가 그 말에 가하성과 하태균을 노려봤다. 두 사람은 크흠, 헛기침을 터트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지화자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라이와 리아가 작성한 보고서를 확인했다.
“라이는 그럭저럭 잘했는데 리아, 너는 도대체 뭘 한 거야? 다시 해 와.”
“왜!”
“이게 어떻게 보고서야? 누가 보고서에 그림 그리면서 놀아래?”
“논 거 아니야! B급 게이트에서 만난 원숭이들을 손수 그려 넣은 거란 말이야!”
그 말에 지화자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건 A-Index에 어련히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릴 필요 없어.”
“A-Index? 유은영아, 그게 뭐야?”
“뭐?”
“공략할 때부터 궁금했는데, 도대체 A-Index가 뭔데 그것만 보면 된다는 거야?”
그 말에 지화자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가 라이를 향해 물었다.
“라이, 너도 A-Index가 뭔지 몰라?”
“네? 아, 저는 아는데 열람해 본 적 없어요. 저희는 각성자가 아니니까 알 필요 없다고 그랬거든요.”
“도대체 누가?”
게이트를 공략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A-Index였다.
그런 것을 도대체 누가 알 필요 없다면서 알려주지 않았단 말인가! 지화자가 그렇게 험악하게 얼굴을 구길 때, 라이가 말했다.
“지화자 누님이요.”
망할 지화자.
지화자가 스스로를 욕했다.
“그래서 A-Index가 뭔데?”
리아의 말에 지화자가 골치 아프다는 얼굴을 보였다.
‘과거의 나란 쓰레기야, 얘들한테 도대체 왜 알려주지 않았던 거야! 귀찮게!’
그냥 그런게 있다고 대충 얼버무리기에는 어려웠다.
라이와 리아는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한, 이곳 센터에서 계속 일할 공무원이었고 그렇기에 두 사람은 A-Index에 대해 알아야했다.
그러니까.
“라이, 리아.”
“네.”
“응.”
“부장님 만나러 가자.”
A-Inedx에 대한 두 사람의 접근 권한 허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우종문의 허락이 필요했다.
유은영의 입에서 튀어 나온 ‘부장’이란 이름에 라이와 리아가 활짝 웃었다.
“할아버지 만나러 가요?”
“좋아! 할아버지 만나러 가자!”
라이와 리아가 두 눈을 반짝였다. 두 사람에게 있어 우종문은 자신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준 은인이었다.
모두가 자신들이 괴물이라면서 죽여야 한다고 할 때, 유일하게 자신들의 편에 서서 인간답게 살 권리를 준 사람.
라이와 리아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0팀의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라이, 리아! 같이 가야지!”
지화자가 황급히 두 사람을 따라갔다.
하지만 폐급, 아니. E급 각성자의 몸뚱이로 라이와 리아를 따라잡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라이, 리아!”
지화자는 우종문의 부장실 앞에서야 겨우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두 사람이 보좌관에 의해 부장실 안으로의 접근이 금지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이와 리아가 헉헉,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지화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애가 탄다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은영 누님, 지금 못 들어간대요. 어떻게 해요?”
“맞아, 어떻게 해? 먼저 온 손님이 있대!”
“그럼 기다려야지.”
지화자가 땀을 닦고는 우종문의 보좌관에게 물었다.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아니요, 금방 끝날 겁니다. 조수현 팀장님께서 보고 차 우종문 부장님게 들린 것이라서요.”
조수현.
꺼림칙한 이름에 지화자의 얼굴리 절로 구겨졌다.
“유은영아,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면 늙어서 주름 생겨.”
이 망할 꼬맹이가?
지화자가 한쪽 눈가를 찡그리고는 리아에게 말했다.
“나는 힐러라서 주름 걱정할 필요 없거든?”
“하지만 폐급이라며?”
“그건 또 누구한테 들은 거야?”
“그냥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주워 들었는데?”
빌어먹을 센터.
지화자가 자신의 직장을 속으로 한껏 욕하고는 말했다.
“폐급이라고 해도 너희보다 주름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정말? 하지만 벌써 눈가에 주름이 졌는데?”
“거짓말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준다?”
그 말에 리아가 말했다.
“산타 할아버지 없는데? 유은영아, 설마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고 믿고 있는 거야?”
리아가 불쌍하다는 듯, 지화자를 쳐다봤다. 지화자는 아이의 시선에 이마를 짚었다.
‘말을 말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망할 남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단 말인가!
‘이 빌어먹을 꼬맹이들이랑 더 대화를 나눴다가는 제 명에 못 죽는다.’
지화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우종문의 부장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라이, 리아?”
“수현 형님!”
“수현 오빠!”
우종문의 부장실에서 1팀의 팀장인 조수현이 나왔다. 조수현이 라이와 리아를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 우종문 부장님께는 도대체 무슨 일로…….”
“지화자 팀장님께서 라이와 리아의 A-Index 권한을 차단시켜 놓은 모양이더라고요.”
지화자가 조수현의 말을 끊으며 싱긋 웃었다.
“그 권한 좀 허가해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네, 그럼 이만.”
지화자는 그렇게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 말에 그녀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암만 지화자라고 해도 지금은 ‘유은영’의 몸에 들어와 있다. 조수현이 남의 팀 팀장이라고 해도, 자신보다 상사란 말씀.
지화자는 조수현의 말을 못들은 척 무시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차라리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못들은 척 무시했을 텐데, 지척에 있는 거리라 그럴 수가 없는 지화자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날선 목소리로 조수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지화자 팀장님께서는 지금 귀빈 분의 경호를 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혹시 경호를 하느데 있어 이상이 생겼다거나, 그런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
“네, 오지 않았습니다. 남의 팀 팀장에 관심이 참 많으시네요, 조수현 팀장님.”
“아…….”
세간에서 유명한 폐급 힐러의 날선 목소리에 조수현이 얼빠진 소리를 내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워낙 어릴 적부터 봐온 동생이라.”
“동생?”
내뱉은 목소리에 살기가 실렸다. 하지만 암만 그래도 이제 막 E급이 된 힐러가 내뿜는 살기였다.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애초에 지화자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조수현은 멋쩍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지유화 씨와 많이 친한 사이였거든요.”
“많이 친한 사이가 아니라, 남자 친구분 아니셨나요?”
조수현이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하죠? 마치, 지유화 씨와 사귄 것이 부끄럽다는 듯이 말이에요.”
“그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조수현이 소리를 지르는 순간.
“밖에 왜 그렇게 소란스럽나?”
우종문의 목소리가 부장실 안쪽에서 들려왔다.
‘부장님, 나이스!’
지화자가 속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조수현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조수현 팀장님.”
조수현은 멍하니 그녀가 부장실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듯, 강하게 주먹을 쥐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