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한 달이란 시간은 의외로 빠르게 지나갔다. 원래 시간이란 게 그러지 않는가?
“으음, 이탈리아어로 ‘안녕하세요’는 부오나세라(Buonasera). ‘미안합니다’는…….”
“지화자 팀장님,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이탈리아어 공부요.”
유은영의 대답에 질문을 던졌던 지화자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 윌던 씨는 한국말을 굉장히 잘 하신답니다. 그녀의 외조모께서 한국인이셨거든요.”
“아하.”
“그리고 부오나세라(Buonasera)는 저녁 인사랍니다.”
“그, 그래요? 저녁 인사랑 그냥 하는 인사랑 무슨 차이가 있나? 왜 나누어져 있지?”
유은영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지화자가 그녀를 향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차이가 있으니까 나누어져 있는 거겠죠? 그러니까 지화자 팀장님께서는 이탈리아어 공부는 그만하고 B급 게이트 보고서 작성이나 어서 마무리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에, 네.”
유은영이 입술을 삐죽이며 팀원들이 보낸 보고서들을 취합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말 지루하고, 또 재미없는 작업의 연속.
유은영은 시계만 계속 쳐다봤다. 점심이 되자마자 일어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유은영이 그토록 기다리던 점심이 찾아왔다.
“우리! 점심 먹으러 가죠!!”
유은영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당탕, 얼마나 급하게 일어났으면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지화자를 비롯한 모든 팀원들이 얼빠진 얼굴로 유은영을 멍하니 쳐다봤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라이와 리아였다.
“좋아요, 지화자 누님! 오늘 외식이에요?!”
“맞아! 지화자가 사는 거야?! 그럼 나는 소고기!”
어? 이게 아닌데? 갑자기 왜 외식 이야기가 나온 거지?
유은영이 당황할 때, 가하성이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소고기라면 좋네요. 오랜만에 외식하죠. 업무 끝나고 회식하는 것보다 훨씬 좋네요.”
“하성아, 우리 팀이 언제 회식한 적 있냐?”
“그건 없지만요. 그래서 태균 형님은요?”
“나야 좋지! 지화자 팀장님께서 사주시는 건 뭐든 좋습니다!!”
가하성과 하태균까지 외식 소리에 의기투합하고 말았다.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유은영이 황급히 지화자에게 물었다.
“유은영 씨는요?”
“저도 좋죠. 다들 얼마나 드실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네요.”
지화자가 ‘유은영’의 얼굴로 방긋 웃었다. 그 웃음에 유은영의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렇기에 유은영은 황급히 팀원들을 채근했다.
“자자, 그럼 어서 먹으러 가죠!”
그렇게 유은영이 앞장서서 0팀의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을 때다.
“오, 지 팀장. 아직 있었군.”
“우, 우종문 부장님? 부장님께서 여기는 왜…….”
스멀스멀 피어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유은영이 물었다. 우종문은 방긋 웃었다.
“곧 귀빈께서 방한하지 않나?”
“그렇기는 하죠……?”
“슬슬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해서 말이네. 시간 좀 내줄 수 있나?”
“시간이요?”
유은영이 시계를 흘긋거렸다.
이제 막 점심이 시작된 시간, 그런데 부장이 시간을 내달란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부장님이 같이 점심을 먹자는 소리겠지!’
절대로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게, 오랜만에 팀원들끼리 바깥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해서.”
“그런 거라면 팀원들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게 하면 되겠군. 그렇지 않나?”
유은영의 말에 우종문이 그녀 뒤의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가 눈치만 보고있을 때.
“네, 그렇습니다.”
지화자가 ‘유은영’의 얼굴로 심히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은영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화자 씨! 나 도와줘야죠! 그렇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해요!’
하지만 어쩌랴?
“그렇다고 하는군, 그럼 가지.”
“네에.”
가장 믿었던 팀원이 자신을 배신했는데, 잠자코 우종문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지화자 팀장님.”
“네?”
설마 이제 와서 구해주려고?
유은영이 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카드 주셔야죠.”
“아…….”
얼빠진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럼 그렇지.’
유은영은 울고 싶은 심정을 꾹 억누르며 지화자에게 카드를, 아니. 지갑을 통째로 내밀었다.
어차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모두 지화자의 것이 아닌가?
‘다 가져가라지.’
유은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지화자는 좋은 시간 보내고 오라는 듯 활짝 웃었다.
그녀가 자신의 얼굴로 보이고 있는 웃음이 왜인지 모르게 재수가 없어 유은영은 와락 얼굴을 구겨버렸다.
그런 그녀를 우종문이 재촉했다.
“지 팀장, 이야기 끝났으면 어서 따라오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네에, 부장니임.”
유은영은 그렇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우종문 부장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0팀의 팀원들은 오늘은 소고기 파티라면서 즐거워할 뿐이었다.
의리라고는 쥐뿔도 찾아볼 수 없는 팀원들이었다.
***
우종문이 지화자와 함께 향한 곳은 고급 한식집이었다.
드르륵, 종업원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그 안에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장님.”
“됐네, 편히 앉아있게.”
우종문이 남자를 도로 자리에 앉히게 하고는 지화자에게 그를 소개했다.
“자, 지 팀장. 어차피 구면이겠지? 이쪽은 유승민 군이라네. 청와대 소속으로.”
“가끔 안보국의 일을 맡아서 처리하고 있기도 하죠.”
유승민이 우종문의 말을 이어서 자신을 소개했다.
“네에, 그러시구나.”
유은영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대단한 일을 하시고 있었네요, 유승민 씨.”
“하하, 지화자 팀장님에 비하면 별거 아니죠.”
유승민이 방긋 웃었다. 그의 환한 웃음에 유은영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하지만 우종문의 눈에는 그녀의 구겨진 얼굴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서로 정답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니 보기 좋군.”
그 말에 유은영은 헛기침을 터트릴 뻔했으며, 유승민은 심장을 부여잡을 뻔했다.
눈앞의 동생이 ‘지화자’의 모습만 아니었다면 우종문의 말에 무척 기뻐했을 거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금이야 옥이야 어렸을 적부터 업어다 키웠던 여동생이 성격 파탄 났기로 유명한 여자의 몸에 들어가 있단 말인가!
유승민은 눈물이 넘쳐흐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고는 입을 열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우종문 부장님. 덕분에 지화자 팀장님과 이런 자리도 가지게 되고 영광입니다.”
“하하, 며칠 후에 있을 귀빈을 함께 지 팀장과 함께 맞이해야 하는 입장이지 않나? 서로 합도 맞추고 해야지.”
“귀빈이라면 엘리자베스 윌던 씨죠? 그분 혼자 한국에 방문하는 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상석에 앉은 우종문이 근심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조카를 데리고 온다고 하더군.”
“조카라면 로렌치니 윌던입니까? 이번에 S급으로 각성을 했다는.”
“그래, 부여받은 성언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꽤나 골치 아픈 성언을 부여받은 모양이더군. 이탈리아 내에서 빠르게 랭킹을 올리고 있다지.”
우종문이 한숨 섞인 말을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지화자 팀장.”
“네? 네, 부장님.”
“엘리자베스 윌던께서 그 녀석을 데리고 오는 이유가 있을 거라네. 무슨 이유인지 짐작 가나?”
평소의 유은영이었다면 아무 생각 없이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지화자’의 몸에 적응한 지 오래라, 그녀가 할 법한 행동을 보였다.
“먼저, 엘리자베스 윌던 씨의 방한 목적이 뭡니까? VIP를 만나는 것이 목적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VIP란 대통령을 말했다.
유은영의 질문에 우종문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사업차 들리는 거라네. 주기적으로 한국에 방문했었지. 자네도 여러 번 경호를 맡지 않았었나?”
“그랬기는 했죠. 그럼, 그분의 조카인 로렌치니 윌던 씨의 성격은 어떻습니까?”
그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유승민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포악하고 잔혹하다고 합니다. 그쪽에서 별명을 붙이기로는 ‘콧대 높은 폭군’이라고 하더군요.”
콧대 높은 폭군이라.
“그렇다면 저한테 조카 교육 좀 시켜 달라면서 데리고 올 가능성이 높겠네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러지 않고서야 데리고 올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 팀장, 로렌치니 윌던은 윌던 기업을 이끌 차기 후계자로 손꼽히고 있는 자라네.”
“손꼽히고 있을 뿐, 확정된 사실은 아니란 말씀이시군요.”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우종문 부장님, 아무래도 엘리자베스 윌던 씨께서는 제게 조카 교육을 부탁드릴 것 같은데 말입니다.”
우종문이 말없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유은영은 ‘지화자’의 얼굴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비공식적으로 ‘결투’를 준비해주실 수 있을까요?”
결투, 그것은 각성자 간에 싸움을 의미했다. 서로 동의하에 전투가 이뤄지며 가장 빠르게 랭킹을 올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서로를 죽이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룰.
그것을 자신의 언니를 죽이면서 깨뜨려버린 ‘지화자’가 제 입으로 결투를 꺼내 들었다.
우종문 부장은 눈앞의 여자가 마치 ‘결투’를 꺼내 들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애초에 그는 엘리자베스 윌던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있었다.
그건 ‘지화자’가 예상했던 일과 정확히 들어맞는 거였다.
조카 교육.
“고삐 풀린 망아지를 다스릴 수 있는 녀석은, 그보다 더욱 고삐 풀린 망아지가 아니겠습니까?”
우종문이 엘리자베스 윌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눴던 것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귀빈 맞이를 하는 데 불편함은 없을 거네.”
우종문이 ‘지화자’와 유승민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는 말했다.
“자네들은 그저 맨 앞쪽에서 엘리자베스 윌던께 꽃다발을 주고 그녀와 함께 온 로렌치니 윌던과 그 파트너와 함께 악수를 한 번씩 나누면 되니까 말이지.”
그때 우종문의 휴대폰이 울렸다. 급한 일인지, 우종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서로 이야기들 나누게.”
그렇게 우종문이 방을 나가자마자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오빠.”
덜그럭, 유승민이 고장 난 기계처럼 옴직였다.
“오빠? 갑자기 왜 그래?”
“은영이 네가… 그 얼굴로 내게 ‘오빠’ 소리하는 걸 듣고 있으려니 괴로워서 그래…….”
유승민이 가슴을 끌어 쥐며 울먹였다. 유은영은 참 꼴값 떤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 유승민은 가슴 아프다는 듯 말했다.
“우리 은영이, 센터에 들어갈 때만 해도 무슨 일 있겠거니 하고 안심했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면서,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유승민은 훌쩍였다.
유은영은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찼다. 자신에 대한 오빠의 과보호가 심한 건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는 유은영이었다.
자신은 백화점 붕괴 사고로 10년 동안 식물인간인 채로 병원에 누워 있었다.
유승민은 백화점 붕괴 사고로 자신이 식물인간이 되고, 아버지가 죽은 것에 큰 죄책감을 안고서 몇날 며칠을 폐인처럼 지냈었다고 했다.
‘아마,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이라도 했었나 보지.’
그리고 그건, 그가 부여받은 성언과 크게 관련이 있을 터.
“오빠.”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랄 좀 그만 하고, 내 질문에 답이나 제대로 해.”
“아무렴, 그래야지. 그보다 우리 은영이, ‘지랄’이라니. 욕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던 애가.”
“시끄럽고.”
유은영이 유승민의 말을 끊어 먹고는 그에게 물었다.
“오빠는 어디까지 볼 수 있어?”
묻는 말에 유승민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